기간 |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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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이야기는 힘이 세다.
오래전 이야기 하나
20대 때는 비리비리했던 스탈린이 무럭무럭 살이 올라 후덕한 인상을 자랑하고 있었을 무렵. 소련에서는 '굴라크'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강제 수용소라고 하는데요. 정치범, 정치적 경쟁자, 부농, 소수 민족 등 온갖 종류의 범죄(!)로 인해 사회주의의 적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끌려간 곳이지요. 드넓은 수용소의 한 곳에서는 유독 옛날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던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마치고 드디어 자러 갈 때, 그 할머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전설들을 구수하게 풀어내주었죠. 수용자들은 이야기에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다른 방에서는 사람들이 극심한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못 이겨 숱하게 죽어나갔던 반면, 그 방만은 이상하게도 모두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억압의 수용소에서
수용소라고 하니까, 왠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이 생각납니다. 뭐 지구 어디에서나 성소수자의 삶은 힘들지만, 한국이라는 모순적인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왠지 모르게 수용소에 갇혀있는 느낌이 들지요. 법의 이름으로 추방되었지만 모든 법적 권리를 잃어버린 곳, ‘유대인’, ‘빨갱이’, ‘인민의 적’이라는 정체성만 존재할 뿐 인간으로서 삶의 가능성을 상실한 곳. 성소수자라는 낙인이 찍힌 상태에서, 그곳이 지금 바로 여기라는 생각은 그리 과도하지 않겠지요. <동성애는 죄악>이라는 낡디 낡은 구호 대신에 <며느리가 남자라니 동성애가 왠말이냐>, <인생은 아름다워보다 게이 된 내 아들 에이즈 걸려 죽으면 SBS가 책임져라>는, 참 감탄을 그치 못할, 광고 카피계의 일대 획을 그으신 분들과 같이 살고 있는-그리고 그 분들이 주류인-세상이니 말입니다. 이제는 국가까지 나서서 [인생은 아름다워]를 교정시설에서 못 보도록 막으셨네요.
호모 사케르와 예외상태
직접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었던 프레모 레비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유명한 책을 남기고 자살한 이후, 수용소라는 소재를 가지고 깊은 연구를 한 끝에 거대한 기획을 남긴 사람으로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아감벤의 유명한 저작으로는 호모 사케르 연작 3부작이 있는데, 이 책들에서 그는 끊임없이 삶과 생명(zoe와 bios), 정치와 법의 관계, 그리고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현대는 끊임없이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나가는 시대입니다.
호모 사케르는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거나(다들 잘 아시다시피 고대 로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소유물이었죠), 경계를 부정하게 만드는 등의 범죄를 저지를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상태입니다. 한 번 호모 사케르로 호명된 이상, 그 사람은 시민들이 죽여도 형법의 살인죄로 처벌받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집니다. 그러니까, 살아도 산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지요. 아감벤의 말을 따르면 ‘배제이자 포함’인 셈입니다. 따라서 ‘성스러운 사람’이라는 명명은 역설적이면서도 매우 효과적입니다.
아감벤은 근대 정치에서 호모 사케르의 대표적인 사례로 수용소에 갇힌 인간들을 들고 있습니다. 수용소에서는 모두가 그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유대인 혹은 무슬림이라는 정체성만 가진 상태로만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가능성을 모두 박탈당한 인간들은 호모 사케르가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주권, 신성성, 인민의 주권, 천부인권 등의 개념은 모두 의문이 붙습니다. 법 이외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의 이름으로 추방되는 ‘예외상태’가 되는 셈이지요. 예외 상태는 법 이외의 영역이면서 정치권력의 핵심입니다. 현대는 정상상태와 예외상태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예외상태가 정상상태로 언제든지 넘어갈 수 있으면서, 경계가 애매해져 분리할 수 없는 시대이지요.
성소수자가 겪고 있는 현실은, 특히 이 땅에서 부딪히는 현실은 수용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레즈비언 커플이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폭행치사까지 이어졌는데도 살인죄로 기소되지 않았다는 일은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지라도, 성소수자라는 이유 때문에 폭행을 당한다던가,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일은 드문 사건이 아닙니다. 같은 이반들끼리도 아웃팅에 대한 위협은 상시적으로 존재하기도 합니다. 호모포비아-뿐만 아니라 트랜스포비아, 혹은 에이즈포비아-는 도처에 있으며, 그렇다고 뾰족이 법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소수자는 호모 사케르이며 동시에 예외상태에 있습니다.
법무부에서는 다시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고 합니다. 요즈음 특히 심해지는 성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의 배후에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자신들의 종교가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의심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차별금지법은 소수자를 보호하겠다는, 분명한 의지와 보호법익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확실한 진일보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례에서 소수자를 옹호하는 전가의 보도는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계와 재계의 강고한 반대의 벽에 부딪혀 법이 형해화 될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제정․입법․실현되는 과정에서 언제든지 예외상태가 호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
아감벤의 작업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푸고는, 정치 기술과 자기 기술을 나눕니다. 정치기술은 삶 외부의 경험들을 내부로 수렴해나가는 과정이지만, 자기 기술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이를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포함해나가는, 일종의 주체화 과정입니다. 그리고 자기 기술을 일종의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으로 사유합니다. 자기를 배려하는 것만이 해방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 재미있게 삽시다. 신나게 삽시다. 각자 위치한 자리에서 즐겁게 놉시다. 곳곳에서 우리의 이야기가 울려퍼질 때, 그것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때 우리 스스로가 우리고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희망을 가집니다.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의 힘을 빌려 영원히 삽니다. 삶이 거대한 수용소 같을지라도, 좌절하지 맙시다. 우리의 힘으로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기획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