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5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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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기] 내가 죽으면 말야..
지나 (사무차장)
'유언장'이라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언은 나중에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오늘 집에 가는 길에 이상형을 마주치는 바람에 코피를 쏟다가 과다출혈로 죽을 지도 모르는 게 사람의 일. 그래서 난 고등학교 시절에 첫 유언장을 썼었던 것 같다. 이건 어쩌다 한 번 생각날 때마다 업그레이드를 했었는데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 언니네트워크에서 진행하는 <찬란한 유언장>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4월 22일 일요일. 비바람이 몰아친다. 유언장을 쓰기 딱 좋은 날씨랄까. 홍대 근처에서 진행된 행사는 <더 월2>에 나오는 레즈비언 커플의 영상을 보면서 시작. 할머니가 되도록 잘 지내던 커플이 어느 날 갑자기 한 쪽의 죽음을 맞이하는데 비혼, 게다가 퀴어 커플이니 어쩔 수 없다. 평생을 함께 지내며 마련한 것들을 두고 그냥 쫓겨날 밖에. 내 반쪽이 죽은 것도 슬퍼서 혼절할 지경인데 잘 살던 집에서 어떤 재산권도 행사하지 못하는 남은 사람이 짊어지는 짐은 상상하기도 싫은 무게일 게다. 그래서 이 영화의 교훈은 '유언장을 잘 써두자'쯤 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유언장이 법적인 효력을 가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단다. 내가 암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길게길게 유언장을 써도 법적인 효력은 없다. 그래서 장서연 변호사님과 한가람 변호사님이 법적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쓰는 방법을 강의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자세한 사항은 언니네트워크에서 발간하는 자료집에 있겠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반드시 자필로 작성하고, 작성일도 꼭 필요하단다. 최후로 남긴 유언이 효력이 있기 때문에 내가 4월에 유언장을 써서 김씨한테 뭘 주기로 했다가 헤어져 10월에 새로 만난 박씨를 위해 다시 유언장을 작성했다가 12월에 갑자기 죽었을 경우, 여차하면 헤어진 그 년한테 뭔가 가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도장! 도장 없으면 지장도 괜찮지만 서명은 안 된단다. (요즘은 다 서명이면 되는데 왜 그러냐고 따지실 분은 대법원에 문의하실 일이니 리플란이나 언니네트워크에 따지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작성 당시 주소도 쓰면 좋다고 한다.
이런 작성법을 들은 이후 모두 각자의 유언을 쓰기 시작한다. 유언장을 종종 써보긴 했지만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장을 쓰게 된다니 새로운 기분.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이나 지금이나 내용은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막힘 없이 술술 써내려 간다. 잠시 후, 간택(!)을 받은 몇몇 분들이 유언장의 내용을 공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주로 재산의 분배 등에 대한 얘기들이었는데 그 중에는 '저는 이 세상에서 충분히 즐거웠고 행복했으니까 영혼 결혼식은 하지 말아주세요' 같은 확 와닿는 당부도 있었고, 장례식은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있었다.
이렇게 조금은 다른 가족들의 유언은 5월 26일부터 6월 1일, 대학로갤러리에서 전시가 있다고 하니 어떤 유언들은 참고도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얼결에 발표하게 된 친구사이 사무차장의 유언도 있다. 동산, 부동산을 정리해서 현금으로 한 유산의 70%는 조카에게 주고, 30%는 '친구사이'에게 기부하겠다는 문제의 내용이 있지만 놀라실 것 없다. 아직 도장 안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