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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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상태 : ‘자유로운 연애 중’
규환(소식지팀)
<영화 '몽상가들'의 한 장면>
SNS 페이스 북을 하려면 우선 자신의 프로필을 입력해야 한다. 이름과 생일, 학교를 적고 출신지를 차례차례 입력하다보니 문득 너무 많은 것을 공개하나싶은 기분이 든다. 다들 이 정도는 까놓고 시작하는 구나. 남들보다 더 멋스럽게 프로필을 꾸미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상하게 슬슬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스크롤을 내려 보니 연애상태라는 조금 낯간지러운 공간이 눈에 띈다. 현재 난 애인이 없으니까 넘어가려던 찰나, ‘자유로운 연애 중’이라는 매력적인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자유로운 연애중이라니? 순간 왠지 끌린다. 잠시 고민하다 ‘싱글’로 적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간다.
그렇다. 젊은 미국청년이 만들고 수 억 지구인이 사용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필요에 따라서는 많은 걸 공개하고 공유하는 기능을 지닌 페이스 북, 그 곳에는 우리가 미처 집고 넘어 가지 못했던 미묘한 지점이 존재한다. ‘연애중’과 ‘싱글’의 그 중간 어디엔가, 혹은 ‘복잡한 관계’로는 타인들을 설득하기 조금 어려운, 그러한 관계를 ‘자유로운 연애 중’ 이라는 선택항목으로 남겨두는 감수성을 그들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자유연애를 허하라.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내부적으로 항상 변화를 준비한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언제나 투쟁의 결과로서 기록되었다. 그중에서도 1968년 프랑스의 봄에는 ‘개인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낳은, 역사적으로 가장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혁명으로 평가받는 ‘68혁명’이 일어났다. 1968년의 프랑스 대학생들은 그 당시 사회의 억압과 권의주의, 반전, 프로파간다 등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기존의 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들고 지구적으로 젊은이들과 함께 연대한다.
그들이 쟁취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구호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찌됐든 개인적으로, 그래서 정치적으로 해방을 경험한 그들은 격식과 존칭을 버리고, 서로 너라고 불렀으며 더벅머리에 자유로운 패션을 즐겼던 ‘히피’와 맥락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결과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영역인 성문화의 자유를 추구한 그들은 그렇게 새로운 성 개념의 관계정립을 모색하여 페미니즘의 태동을 알렸으며, 동시에 그 동안 억압되었던 다양한 가치들 중 자유연애를 해방구로 찾아 탈출한 결과가 ‘다자연애’의 의미 있는 탄생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20여년 늦은 1987년 봄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다소 늦었지만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정치적 해방과 다양한 성, 문화적 해방을 이끌기도 하였다. 그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욕구와 무관하지 않은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
독점하지 않는 미덕
그렇다면 ‘폴리아모리’라고도 불리는 ‘다자연애’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많은’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폴리(poly)’와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의 변형태인 ‘아모리(amory)’의 합성어로, 서로를 독점하지 않는 다자간(多者間) 사랑, 즉 두 사람 이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파트너의 동의하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바람피우기’ 또는 ‘스와핑’과는 구별된다. 라고 사전적 의미로 정의 된다. 출처-네이버 지식사전
다자연애라는 말에는 이런 필요조건이 붙는다. ‘독점하지 않을 것’
우선 독점한다는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개념이고, 연애라는 것 또한 두 사람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충분히 정치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권력관계를 뺀 평등한 관계의 모양을 다자연애의 출발점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비독점적인 다자연애를 하려면 서로간의 ‘평등한 감정교환’이 가능해야 한다.
‘평등한 감정교환’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주변의 보편적인 연애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독점연애의 모습은 다음 문장으로 압축해 설명가능하다.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이 상처 받는다’는 다소 따분한 연애론에 대해서 들어봤을 것이다. 이 문장안의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상대방을 본의 아니게 독점해버린 것이다. 덧붙여서, 더 많이 사랑했다는 말은 연애상대에 비해 더 많은 감정을 쏟아 부은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손해’를 본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노골적으로 연애를 무의식적으로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우리, 혹은 사회구조의 모습이 반영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다자연애자라면 적어도 이러한 프레임에 당당히 반기를 들겠다. 우리는 도대체 왜 그런 소모적인 연애를 하는 것일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독점하는 연인들의 관계는 보통 처음엔 온갖 규칙과 함께 시작한다. 이를테면 누가 누구에게 언제 전화를 해야 할지, 각종 기념일엔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내놓을 것인지, 어떤 ‘이성 친구’를 만나는 게 괜찮은지 같은 것들 말이다. 연애를 시작한 후에, 규칙을 빙자한 ‘통제’가 사실은 ‘질투’란 감정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 걸 겨우 깨달았다 해도, 불쾌한 감정의 정체가 질투가 아니었음도 알게 된다. ‘언젠가 그는 날 떠날 거야.’ ‘그의 눈에 더 이상 내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건 바로 내 안에 자리한 뜻 모를 ‘불안감’이었다.
평등한 감정교환은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흔히들 찾는 마트에서도 소비자와 판매자간의 평등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사고자 하는 물건의 진정한 가치가 얼마인지는 상품에 붙은 가격표를 통해서 판단하기 영 미심쩍은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폐’를 통해서 우리는 표면적인 숫자로 그것의 가치를 가늠 짓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형태로 서로간의 ‘거래’를 매듭짓는다. 이러한 방식은 연애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제 갓 연애를 시작하게 된 싱그러운 커플은 서로의 빛나는 감정을 주고받는다. 처음에는 그것이 바가지를 쓰든, 과대포장 되었더라도 감정을 소비하는 사람은 큐피드 화살 덕에, 혹은 눈에 보이는 감정의 화폐 '선물‘ 혹은 ’스킨십(?)‘ 따위 덕분에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고 적어도 그 둘 사이의 빈틈이 생겼다면, 어느 순간 서로 현실의 눈을 뜨게 되고 어느 한 사람에게는 상대방 보다 더 많은 감정을 주고받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 사람과 어느새 독점된 관계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순리라고 받아들여지지만, 원시사회에선 마트나 화폐 따위 없이 서로 각자 공들여 생산한 소금과 돌칼 따위를 의심의 여지없이 등가 교환했으니, 역사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일처다부, 일부다처 등 다양한 자유연애를 했나싶기도 하다.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란 생각도 들지만, 아무튼
이러한 슬픈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감정의 양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내가 가진 양만큼 상대방과 주고받고, 내가 여러 사람과 똑같은 양의 감정을 주고받는다면 서로 질투나 시기, 혹은 그에 따르는 연애 후 상처 따위는 이론적으로 존재할리 없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전 세계의 평범한 다자연애자들 조차 감정의 양을 딱히 정해 놓고 다자연애를 하진 않는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파트너가 다른 파트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에 느끼는 질투 따위의 감정을, 파트너가 나 아닌 다른 파트너와 시간을 보냈다는 것 보다, 나와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지 않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적으로 타협해 나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비록 ‘몽상가’라 할지라도..
우리가 동성애자로서 이성애자 중심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 진보를 꿈꾸며 성소수자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우리가 기본적으로 누려야할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집단으로서의 ‘가족’을 꾸려나가기 위해 제도적 ‘결혼’에 틀에 맞춰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성간, 동성간을 막론하고 사랑과 번식의 문제는 전적으로 그 나라의 사회문화적 여건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인 ‘독점연애’, ‘결혼 ’제도는 충분히 도전을 받을만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5년 이래 지난 15년간 배우자가 있는 15세 이상 성인의 비율(유배우율)은 77.6%에서 66.6%로, 무려 11% 포인트나 급감했다. 여기서 20세 이하를 뺀다면 성인 10명당 4명이 배우자 없이 산다는 얘기다. 유배우율은 1975년 84.4%에서 5년마다 2% 포인트 내외씩 떨어지다가 2000년 이후엔 5% 포인트씩 무섭게 떨어졌다. 청ㆍ장년의 미혼, 장년의 이혼, 노년의 사별이 증가한 데 따른 것이라고 한다. 배우자 없이 사는 사람이 급증한 만큼, 연애와 결혼 세태도 급변하는 중일 것이다. <한국일보 칼럼 中>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내재화 된 죄책감이나 죄의식으로부터 본질적인 해방을 경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때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행해지는 자유로운 선택이나 행동 따위를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사회화 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자유로운 연애’라는 것을 한번 쯤 꿈꾸거나 감히 한번쯤은 범하여도 용서 받을 수 있을까? 라는 호기심은 항상 내 마음속에 있어왔다. 우리의 의식 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욕망에 부가적으로 따라붙는 ‘죄책감’이라는 꼬리표와 그에 따르는 ‘책임’에 대해, 혹 ‘다자연애’ 라는 것이 나의 일이라면,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할 자신이 없다고 떳떳하게 말 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몽상’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서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섹스, 멋진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