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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호][커버스토리 '친구사이 소식지' #2] 내가 기억하는 소식지 기사 BEST : 오프라인 소식지·웹진 시절 (1994-2008)
2018-10-31 오후 18: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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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0월 

[커버스토리 '친구사이 소식지' #2]

내가 기억하는 소식지 기사 BEST

: 오프라인 소식지·웹진 시절 (1994-2008)

 

 

 

 

친구사이 소식지는 1994년 창간 때부터 2001년까지 종이 형태의 오프라인 소식지로 발간되었고, 2003-2008년에는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기사를 작성하거나 외신 기사를 번역해서 게시판에 올리는 웹진 형태로 운영되었습니다. 당시에 활동하셨던 분들의 증언을 통해, 해당 시기의 친구사이 소식지와 거기에 올라와있던 기사에 대한 스케치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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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이는 1년 가까이 혼자서 정신과 출입을 하였더군요. 얼마나 큰 고통을 느꼈으면 부모 몰래 혼자서 그 큰일을 치러야만 했는지,"

 

 

「푸른 편지 : 동성애자를 동생과 자식으로 둔 어떤 누나와 어머니의 편지」,

『친구사이 소식지』 8, 1995.2.

 

 

터울님이 글을 부탁하며 보내주신 잘 갈무리된 그간의 친구사이 소식지 파일들을 열어보고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 순식간에 그 시대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한참을 들여다 본 후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4년의 나는 잘못된 인연으로 들어간 첫 직장에서 고통을 곱씹고 있었으며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호모’들은 창문이란 것이 없었던 종로의 ‘보갈바’에서 밤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살할 것 같은 얼굴로 다들 술을 마셨다. 그들과 다를 바 없었던 나는 단골 바에서 우연히 친구사이 소식지 2호를 돌리러 들어온 몇몇 분들을 마주치게 되었고 그것이 시작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날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은데 그 만남이 지금도 뉴스에 나올 정도로 무섭게 뜨거웠던 94년 여름의 전조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지금과 달리 인권의식이 왜 필요한지 모르는 게이들로 가득 찬 데다 제대로 된 정보마저도 유통되지 않던 당시의 종로에서, 놀랍도록 특별한 책자를 마주한 때만 해도 난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는 이렇게 애쓰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었는데 디자인을 전공하고 관련 업무를 하던 나에게 소식지의 제작환경이 영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퀄리티에 비해 제작비가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몇몇 게이바의 광고비 외에는 후원이란 것이 거의 없었기에 회원 몇몇 분들이 각출해서 내는 100여 만원의 제작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분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지 않은가 싶었다. 적절히 아이디어를 내고 미력하나마 나의 재능을 기부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후 당시 친구사이 회장님이 자신의 월세방을 내어 만든 화곡동의 첫 번째 친구사이 사무실에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쁜 초짜 디자이너의 생활 속에 어찌어찌 짬을 내어 단돈 15만원으로 만든 리플렛 형식의 3호 소식지가 인쇄되어 나왔을 때 기쁨도 잠시, 후원했던 게이바의 광고에 오타(그것도 전화번호에)가 나와 회장님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던 일이 작은 에피소드였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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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를 마칠 때 즈음이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배포에는 관여하지는 않았는데 회원들이 그 작은 방에 모여 따끈따끈했던 소식지를 일일이 접었고 지금보다는 숫자가 적었던 종로의 게이바에 직접 방문해서 전달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특별한 일이 주어지지 않았던 나머지 회원들에게 소식지 배포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는데 다양한 게이바를 탐방하는 재미난 일로 여기고 그 무용담을 회의시간에 풀어놓는 분들도 많았었다.

 

그 와중에 소식지를 든 회원들이 문전박대 당하거나 바에 앉아서 고통을 곱씹던 손님들로부터 ‘왜 이런 일을 해서 조용히 사는 우리들을 세상에 노출시키느냐’라며 타박을 받고 돌아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당시 ‘호모들’의 낮은 인권의식에 열분을 토하다 결국 애써 마신 뱃속의 술까지 토하는 사태까지 가고는 했다. 그것마저도 우리에게는 중요한 의식과 같았는데 더 열심히 하자는 결의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제작비 감소라는 이유로 디자이너로서 친구사이에 참여하게 된 나는 얼마후 조금은 인권에 관심을 가진, ‘어쩌다 보니 편집장’이란 것이 되어있었는데 문제는 매호 지면을 채우는 일이 무척이나 난제였다. 지금과 달리 동성애자들의 진영에 행사라는 것 자체가 거의 없는데다 제대로된 텍스트 생산능력을 가진 회원도 드물어서 여기저기서 기사나 논문을 가져와 무단으로 전재하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들의 시각으로 편향된 내용을 거르지 못해 항의를 받기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다소 감상적인 글들 역시 단골 소재였었고 동성애 운동으로 인해 소기의 성과를 보이고 있었던 외국의 사례는 프라이드를 갖지 못해 괴로워하던 많은 분들을 위한 좋은 기사감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좀더 선진적인 외국의 상황을 몹시 부러워하며 무지개 다리 건너 좋은 곳이 있다는 것을 다른 게이들에게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인터넷 시대 이전이라 소식지가 다양한 역할을 하다보니 징검다리라는 펜팔코너를 운영했던 것도 재미난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친구사이 사서함으로 보낸 펜팔 당사자들의 절절함의 강도는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8호에 실린 회원 어머니의 편지가 우리에게 주었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데 그때의 우리에겐 무엇보다 힘이 되는 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족의 따스한 말 한 마디의 위력은 지금이나 그때나 다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마치 퀴어문화축제에서 이루어졌던 부모님들의 허그처럼...

 

방송출연과 그에 따른 아웃팅으로 인해 짧은 활동을 마무리하게 될 때까지 어렵게 어렵게 편집을 맡아 했었던 20대의 나는 어느새 세월 속으로 사라졌지만 20여년도 훨씬 넘는 시간이 흘러 소식지 100호를 기념하는 글을 쓰고 있자니 감회가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셀 수 없이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험한 산 속을 나와 무지개 다리가로 가는 큰 길에 접어들었다. 인터넷과 핸드폰의 시대, 무엇보다 좀더 진보한 인권 상황을 맞이해 옛날과 다른 형태와 역할로써 친구사이 소식지가 그 길에 함께 해왔음은 분명한 일이다.

 

언제인가 지인들과 인권단체가 그 소임을 다하고 없어지는 날이 진정한 인권의 시대라는 말을 나눈 적이 있다. 친구사이 소식지도 앞으로의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는 날이 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이유는 보다 체계적으로 활동하는 회원들의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새로운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이룬 성취로 인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일을 마치면 비밀번호가 달린 오래된 여행가방을 찾아 언젠가 추억하려고 모아놓았던 소식지들을 간만에 꺼내들고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몇 번이고 들으면서 앞으로 나올 소식지의 미래를 그려보는 새벽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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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전 소식지 편집장, Bar VIVA master / 김상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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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를 봤는데, AIDS에 걸린 사람이 아무하구나 섹스를 했대더라. 혹시 너두... 항문으로 섹스하니?"

 

 

「친구사이 회장이 모두에게 보내는 메세지

: 혹시 너도 항문으로 섹스하니???」,

『친구사이 소식지』 18, 1998.1, 1쪽.

 

 

지금과는 다르다.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던 ‘감히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들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게이 커뮤니티 내부에서 부지기수였다. 동성애자, 게이, 호모, 커밍아웃, 에이즈, 항문섹스 등 성소수자와 관련된 것들은 다 그랬다. 이름을 붙이기조차 어려운 것들에 대해서 인권까지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 난감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랬던 시절이다. 국내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던 1998년초, 친구사이 회장(대표)이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고, HIV와 섹스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에피소드가 친구사이 소식지에 등장했다. 포토샵으로 드랙퀸처럼 가발을 씌운 그의 얼굴 사진과 함께 였다. 당시 소식지는 게이빠, 극장 등 외부에 배포되었던 터라 ‘항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긴 했지만, 사석에서 들은 이야기로 그의 모친은 ‘똥구녕’이라는 속어를 사용했단다. 지금도 상상하긴 쉽지 않은 풍경이다. 이십 대의 갓 데뷔한 청년들이 대부분이던 당시 친구사이에서 이 글은 한동안 화제가 되었고, 여기에 자극받은 일부 젊은 회원들 사이에서 커밍아웃의 바람이 불기도 했다.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글은 항문섹스로 시작해서 HIV 감염 예방으로 연결되는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당연히 HIV 감염인의 인권에 대해서, 항문섹스의 권리에 대해 이어지는 정치적 올바름을 취했겠으나, 그때는 게이 커뮤니티 내부에서조차 ‘동성애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못해 ‘이쪽’ ,‘이반’, 심지어 ‘보갈’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하던 분위기였다. 친구사이 역시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단체라는 위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권단체’에 어울리는 활동방향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내공은 부족했고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를 할라손 치더라도, 정확한 정보전달을 하는 것만으로 힘이 부쳤다. 물론 당시에도 친구사이에 PL들이 존재했고, 감염인의 인권상황에 대한 울분과 사적인 지원들이 있었겠으나 조직적인 사업과 담론으로 수면위에 올릴 만큼 성숙하거나 대범하진 못했다.
 

변명은 여기까지. 누가 뭐래도 소식지에 올라온 이 짧은 글이 섹스, 항문성교를 음지에서 양지로, 화장실에서 평범한 일상 속으로 끌어낸 공은 결코 폄하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회장(대표)의 얼굴 사진을, 그것도 드랙까지 한 사진을 소식지에 올릴 수 있는 패기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친구사이의 고유한 미덕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참, 혐오세력은 2,30년 전에나 할 법한 허위 선전을 지금도 하고 있다. 여기에 대응해서 ‘@구녕섹스의 인권’에 대해 똑바로 눈 뜨고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당당해지고 또 성숙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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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정회원 / 전재우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합법화하는 게 마치 사람하고 개의 섹스를 합법화하는 거랑 똑같다고 암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Foreign News] 이게 내 나라인가? - 미국 레즈비언의 항변」,

『친구사이 웹진』 2004.3.7.

 

 

물론 사회마다 역사와 환경이 다르니 외국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외국 성소수자들은 어떤 어려움에 맞서는지, 그리고 거기서 우리가 참고할 점은 뭔지 늘 궁금했어요. 또한 해외 성소수자 관련 정보가 지금보다 드물던 시절이다보니, 2003년 여름에 유학 간 뒤로 친구사이 홈페이지에 주로 언론 기사를 번역해 올리게 됐죠. 다만 아무리 크게는 맞더라도 ‘서구 = 부러운 인권 선진국, 비서구 = 불쌍한 인권 후진국’이라는 등식을 그대로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설령 서구의 성소수자 인권 운동과 단절되거나 다르더라도 자기가 ‘지금 여기’ 처한 여건에서 사회를 바꾸는 사람들 얘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제가 체류했고, 싫든 좋든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크며, 서유럽과 달리 보수 기독교 등 종교가 아직도 사회적으로 강력한 미국이기 때문에 결국 이 기사를 꼽게 됐네요. 많이들 기억하시겠지만, 2003년 11월에 매서추세츠주 대법원이 ‘동성 결혼 불허 = 차별’이라고 판결하고 2004년 2월 초에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동성 커플에게도 법적 문서인 결혼 허가증(marriage license)의 발급을 개시하면서, 유럽에서는 2001년부터 시작된 결혼 평등권 실현이 미국에서도 불 붙게 됐죠. 물론 시민 결합(civil union) 등 결혼에 준하는 법적 인정은 서구의 여러 나라나 지자체에 그 전부터 있었지만, 이성 부부와 같은 위치와 권리를 누리진 못했으니까요. 게다가 이 기사에서 언급되듯, 비록 당시에는 2개 주에서뿐이었지만 캐나다는 2003년 6월부터 동성 결혼 법제화가 확산되기 시작했고, 미국 성소수자들이 많이 부러워한 게 기억 나네요. 거짓 명분 아래 이라크를 침략하기도 한 부시 2세 대통령은 이미 연방 차원에서 ‘부부 = 남녀’라고 못 박은 결혼 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 1996년)이 있는데도 이런 지자체별 동성 결혼 확산에 대한 ‘백래시’로서 연방 헌법을 개정해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기사의 필자는 막 걷기 시작한 아기를 위해서라도 캐나다로 떠나고 싶어하지만, 동성 파트너는 그래도 미국에 남자고 하죠. ‘자유 민주 국가’이자 ‘선진국’이라는 모국에서 갈수록 2등 시민이자 실질적 ‘비환영 무국적자’로 전락하는 신세에 필자는 외치죠. ‘이게 나라냐…!’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성소수자 등 약자, 소수자에 대한 각종 차별과 탄압에 시달리는 사람 일부는 해외 망명이나 이주를 시도하고 또 달성하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난민’들이 꼭 비서구의 개발 도상국에서만 생기지는 않는다는 사실, 법률처럼 추상적인 공적 제도가 개인의 일상 구석구석에 미치는 강력한 영향, 그리고 국가라는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저는 이 기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서로 변화시키고 이끌기도 하는 ‘인식’과 ‘제도’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고요. 안전과 생존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모국을 떠나는 사람도,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남아서 자기가 나고 자란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존중과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기는 마찬가지죠. 결혼 평등권과 가족 구성권 보장은 둘째 치고 포괄적 차별 금지법 제정조차 ‘일부’ 보수 종교 집단 등 혐오 세력 탓에 어려움을 겪는데다 난민, 이주민에 대한 의심과 비하가 널리 퍼져 있는 우리 상황도 연상되고요.

 

돌이켜보니 번역을 더 오래 올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더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더 많은 나라와 사회를 다루지 못해 아쉽네요. 뉴스란 시간이 지나면 의미가 없어지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그 많은 사람의 고통과 저항이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 만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믿어요. 세상이란 부단한 노력을 통해서만 바뀌고, 방심하면 곧바로 원상 복귀하기 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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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정회원 / 대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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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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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사 2018-11-02 오전 08:58

사람의 고민이란 게 시기가 달라도 결국 비슷비슷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 같네요. 물론 혐오세력이 바뀌려고 하지를 않으니깐 그런 것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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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경 2018-11-19 오후 15:16

재우 언니, 데미지 언니가 뽑아 준 소식지 내용들.... 뭔가 아직도 여전히 이면서, 조금씩 바뀌어
가야 하는 현재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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