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5월 |
---|
내 인생의 퀴어영화 #20 :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 효신의 피는 흐르고 있다 -
누군가 나에게 ‘인생영화’를 물어볼 때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대답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 메멘토 모리>(이하 <메멘토 모리>)다. 제목부터 공포영화라는 점을 인지시키지만 무서운 장면은 손에 꼽을 정도고, 스릴조차 느끼기 어려워 드라마 장르에 넣어도 어색하지 않을 이 영화를 망설임 없이 인생영화로 꼽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볼 때마다 다르게 보인다는 점 때문에 재관람을 자주 하지만, 돌이켜보니 이 영화를 퀴어의 관점으로 접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두 여고생의 슬픈 사랑 이야기’라고만 생각했고, 이 영화가 관람시마다 제공하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움과 깊은 여운 때문에 즐겨봤던 것이다. ‘내 인생의 퀴어영화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자연스레 이 영화가 떠오른 나는 내 ‘인생영화’를 퀴어의 관점으로 접근하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 꺼내보았다.
성장의 욕심을 짓누르는 금기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들과 우열을 겨룰 만큼 우리나라는 상당히 발전했다. 학교에서 영어로 강의하시는 미국인 교수님도 한국은 이미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 영화가 공개된 1999년보다 훨씬 진보했다. 며칠 전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으로 동성애가 주요 이슈로 떠오른 아이러니가 놀라울 따름이다. 1999년은 시기상으로 새로운 100년을 향한 도약의 해였지만, 도약에의 희망과는 달리 너무나도 폐쇄적인 사회였다. 많은 것들이 자유로부터 멀어져 금기라는 족쇄에 갇힌 채,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은 그저 무심히 떠다니는 일장춘몽에 불과했다. 폐쇄적인 사회에서 학교라는 공간은 그 이상으로 잔인했다. 1999년으로부터 10년 후인,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2000년대 후반에도 두발 단속, 교복 길이 단속 등 ‘학생다움’이라는 거창한 거짓말에 가려진 억압의 요소들은 학생들을 자유로부터 가두기 바빴다. 우리는 더 크고 싶었고, 성적을 위한 ‘국영수’ 학습보다 청춘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성장에의 욕심은 ‘국영수’에 짓눌린 채 교실 휴지통에 처참히 버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신(박예진)과 시은(이영진)은 성장을 짓누르는 공간인 학교에서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동성 간의 사랑을 ‘했다’. 분명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만 마음이 따라가는 걸 어찌하랴. 그렇게 <메멘토 모리>는 두 사람의 사랑을 묵묵히 담는다. 제약이 클수록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은 더욱 애절하고 서정적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퀴어영화가 이성애 멜로영화보다 매력적인 이유가 이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랑을 허락받기엔 수많은 장애물을 거쳐야만 한다. 학생의 신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학생과 성인의 사랑은 너무나도 다르다. 보다 자유로운 성인의 사랑과는 달리 학생의 사랑은 자유를 넘어서 더 많은 요소들로부터의 속박으로 인해 아슬아슬하다. 이 아슬아슬한 감정을 제대로 포착한 점이 <메멘토 모리>의 가장 큰 장점이다. 효신과 시은의 사랑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위치적으로) 가까운 주변인들 때문에 숨겨지지 않는다. 결국 소문으로 확장됐지만 두 사람은 무덤덤하며, 오히려 급우들 앞에서 키스를 하며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과정까지 거친다. ‘너희들이 가둔 우리의 자유를 사랑으로 부숴버릴 거야’라는 강한 의지가 담긴 장면이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이 지점에서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동성 간의 키스를 보고 경악하는 아이들의 비난과 야유를 견디지 못 한 시은이 효신을 밀어낸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균열은 곧 이별을 낳게 된다. 금기된 사랑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효신과, 시선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정하려는 시은. 시선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나는 이 지점에서 ‘성장’이라는 키워드가 개입한다고 생각했다. 학생의 신분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성인이 되고자 몸부림치지만, 학교 담장에 부딪쳐 학생의 한계를 인지하고 순응하는 순간에 조금씩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효신은 이 과정을 누구보다 훨씬 많이 겪었을 법한 인물로 묘사된다. 친구들과 어울리며 장난치고 수다를 나눌 시간에 효신은 ‘내가 죽으면 사람들에게 어떤 아이로 기록될까?’라고 스스로 묻는다. “‘그냥 한 아이였다. 한 아이가 있었다.’ 이렇게 기억됐으면 좋겠어.”라는 소망까지 담는다. 그러나 시은의 성장은 효신의 성숙함에 미처 도달하지 못 한다. 시은은 육상부 코치의 지시대로 움직이고 뛰는 기계적인 인물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지금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성장에의 욕구를 시은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효신과 함께 있는 시간에 시은은 코치의 기계가 아닌, 감정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드러난다. 효신의 목마름은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지지만, 시은은 무언가를 갈구한다기보다 은밀한 공간에서 효신과 함께 있는 현재 상황에 순응하는 것에서 그친다. 성장이라는 직선 위에 앞으로 나아가려는 효신의 위치와 본인의 자리에 머무르는 시은의 위치가 다르니 시선의 인식 역시 달랐을 것이고, 그 끝에서 두 사람의 사랑은 무너지고 만 것이다.
공포영화 <메멘토 모리>를 지지하는 이유
어떻게 보면 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가 20대에 진입하기 직전인 고등학생 시절이 아닐까 싶다. 1~2년만 기다리면 성인이 된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매일 들떠있지만 너무나도 많은 제약 앞에서 무너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나날들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간다. 그럴수록 효신과 시은은 서로에게 의존했을 것이다. 국어 시간에 난해한 시(詩) 창작으로 왕따가 된 효신과 육상부 코치의 만행으로 힘들어하는 시은은 서로의 상처를 만져주며 사랑으로 아픔을 극복해나갔다. 그러나 영화는 두 사람의 아픔을 완치해주지 못한 채 끝을 맺는다. 이는 영화의 가장 큰 사건인 효신의 자살이 시사하는 것처럼, 금기와 제약에 갇힌 퀴어의 좌절이라는 기획의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사랑이라고 생각한 감정이 동성애의 부정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시선으로 인해 무너졌을 때의 좌절감은 성인에게도 해당되지만, 청소년에게 이런 좌절감은 성인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크다. 특히 심리적인 차원에서 청소년은 변화에 가장 민감한 시기이므로, 심하게는 좌절감이 곧 내가 따라가는 감정이 옳지 못하다는 인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메멘토 모리>의 장르가 왜 공포여야만 했는지 납득이 간다. 이 영화가 표현하는 진정한 공포는 기술의 활용이나 감독의 연출로 시청각적인 효과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 동성애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이다. 폐쇄적인 사회 속 더욱 폐쇄적인 학교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려던 효신과 시은의 아슬아슬한 사랑이 혐오라는 담장을 넘지 못한 채 효신의 피로 물들고 말았다. 유혈이 낭자하고 신체가 절단되는 시각적 묘사, 예상치 못한 순간에 관객을 놀라게 하는 청각적 묘사보다, 소외된 인물의 아픈 감정을 끊임없이 찔러대는 정신적인 잔인함은 전자보다 여운이 훨씬 오래 남는다. 이 여운이 <메멘토 모리>를 향한 씁쓸한 애정과 컬트적인 반응으로 이어졌다고 해도 무방하다.
18년이 흐른 현재에도 효신과 시은이 겪은 공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두 사람이 2017년에 다시 등장한다고 해도 아직까지 강하게 남아있는 동성애의 부정적인 시선 때문에 효신의 선택은 1999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효신과 시은에게 비로소 자유를 제공하는 그날까지 퀴어의 연대는 멈추면 안 된다. 퀴어를 향한 시선이 우호적인 지지로 바뀌지 않는다면 미래의 18년, 아니 그 이상으로 효신의 영혼은 교정을 계속 맴돌 것이 분명하다. 환상으로 등장하는 효신과 시은의 커밍아웃 시퀀스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먼 훗날 효신과 시은이 학교에서 당당히 손을 잡고 키스를 할 수 있는 미래가 온다면 그때야 비로소 효신의 영혼은 편안히 떠날 것이고, 이 영화에 대한 나의 무한한 애정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효신의 피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homo, be cinematic / 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