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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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대선' #2
: '우리의 시대'에 대하여
2015년 김보미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시작으로, 2017년 백승목 성공회대학교 학생회장에 이르기까지,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하고 출마해 당선된 학생 대표자가 벌써 여섯 명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가를 비롯한 공동체가 성소수자를 평등한 동료 시민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방증한다. 또한 수도권을 넘어 전국 대학가에서 폭발적으로 많은 성소수자 모임이 생겨나고 빠르게 성장한다. 캠퍼스 안팎의 성소수자들은 여느 때보다 당당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오늘날의 변화는 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지금 이 순간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많은 시민이 더 달라질 ‘우리의 시대'를 꿈꾸면서 저마다의 자리에서 변화의 씨앗을 심고 있다. 그러므로 지난 4월7일 문화제의 제목은 정확했다. ‘변화는 시작됐다: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 권순부,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 『한겨레』 2017.4.10. |
김 선생님, 순부입니다. 평안하신지요? 오래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중학교 방송부 선배를 만났어요. 제가 한때 좋아했던 형이었습니다. 애인과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요. 예나 지금이나 참 근사한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엊그제는 <한겨레>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권해주셨던 그 신문입니다. 성소수자인 저의 동료들과 함께하는 '우리의 시대'는 다르다는 내용의 글이었어요. 사회의 인식이 많이 변하였고, 그러니까 정치인들도 마땅히 좀 잘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이렇게 지껄여대고 돌아서는 저의 가슴은 공허합니다.
작년 가을에 저는 군형법 상 '추행'죄 폐지를 위한 입법청원 운동을 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대학과 거리를 누비면서 1만2천 명이 넘는 사람의 서명을 받는 동안, 군형법 제92조의6(추행)이 왜 나쁜 법인지 참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사실 이 운동은 제 선배들이 지난 10년 동안 해온 것인데요, 그럼에도 아직 없애지 못한 과거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 모를 일이죠. 많은 이들에게 이름조차 낯설었을 이 법률은 지난 한 주 새 아주 유명한 것이 되었답니다.
군형법 제92조의6은 이미 헌법재판소에 네 차례나 올라갔고, 그렇다면 사실상 법률적 파산 선고를 받은 것이나 같다더군요. 그런데 퇴임을 앞둔 육군참모총장이 갑자기 이 칼을 뽑아들어 마구 휘두르고 있습니다. 수십 명의 군인이 수사를 받았고, 어느 육군 대위는 끝내 부당하게 구속되고 말았습니다. 이번 기획수사를 지시한 육참총장 장준규는 한국기독군인연합회의 회장이라네요.
어쩌다보니 저는 강인한 척을 자주 합니다. 그렇지만 실은 저도 두려워요. 부족한 저를 믿고 의지하는 동료와 친구들을 실망시킬까봐 두렵습니다. 군에서 정말 축구를 안 해도 되냐고 거듭 묻던 친구들과 술잔 부딪던 밤이 아직 오래지 않았거든요. 한번은 의무경찰로 간 친구를 기자회견장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차별선동세력과 우리 측 사이의 수라장에서도 그 아이는 제게 눈을 찡긋해보였습니다. 그러니 선생님, 이렇게 사랑스러운 이들 앞에서 제가 감히 어떻게 두려워하겠습니까.
얼마 전에는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왔어요. 저는 다른 친구들만큼 고인과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저에게도 몹시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아무래도 죽음이 너무 많네요.
저는 요즘 잠을 무척 많이 잡니다. 본래 나돌아 다니기를 좋아하는데, 근자에는 통 집밖에 나가지를 않아요. 오랜만에 복학했지만, 학교도 곧잘 빠집니다. 가급적 일도 덜 맡으려고 합니다. 활동가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입니다.
저는 잘 지냅니다. 늘 주머니가 가볍지만, 선배들이 술을 많이 사줘요. 도무지 못 살겠다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새삼 깊이 맛보는 시절입니다.
'죽고 싶다'는 마음은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저는 믿습니다. 아무래도 이성적인 판단은 아닌 것 같고요, 그냥 저의 작은 믿음입니다.
선생님, 우리의 시대는 정말 다른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이런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요. 그래서 세상이 좀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꽃길만 걸을 수는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가 소중한 꽃임을 잊지 말자는, 어느 '중년 활동가'의 말을 아로새깁니다. 오랜만에 서신 드리는데, 두서없는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아무쪼록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2017년 봄,
순부 드림
좋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