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0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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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스케치 #2]
대만 동아시아 워크숍, LGBT 프라이드 참관기
지난 10월 27일 대만의 성소수자 운동 단체인 통츠 핫라인의 주최로 ‘성소수자 운동과 보수세력’ 이라는 이름의 동아시아 워크숍에 초청을 받아 대만에 다녀왔습니다. 이 워크숍은 한국, 대만, 일본의 성소수자 단체 활동가들이 모여 각국의 성소수자 인권 상황들을 공유하고 정보를 교류하는 자리였는데, 마침 워크숍의 다음 날인 28일은 대만 LGBT 프라이드가 열리는 날이기도 해서 함께 간 활동가들과 대만 LGBT 프라이드에도 참여를 하고 왔습니다. 사실 대만 LGBT 프라이드와 올해 친구사이의 워크숍 ‘아이 캔 스피크’의 일정이 겹쳐 친구사이 워크숍에 참석하지 못해 미안함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한국을 벗어나 더 많은 경험들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와 후기를 남깁니다.
#1. 동아시아 워크숍
워크숍은 아침 9시 이른 시각에 각국의 참가단 기자회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워크숍이 진행된 타이페이의 진광교회라는 곳은 우리나라의 몇몇 교회들처럼 성소수자들에게 우호적인 목사님께서 목회활동을 하고 계시는 곳이었는데, 지하 2층 예배당 정면의 십자가 아래에서 각국의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모여 앉아 있는 풍경이 생경하면서도, 예배당이라는 공간이 주는 알 수 없는 안정감이 공존하는 묘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기자회견 후 키노트 발표와 함께 각국의 참여자들의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키노트 발표에서는 지금의 보수개신교의 혐오의 논리와 운동의 전략들이 어디서부터 만들어지고 동아시아 국가들을 경유하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잘 정리한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이후 대만, 일본, 한국 순서대로 진행이 되었는데, 대만의 지금 상황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이 거쳐 온 활동들을 들으며 한국과 비슷한 부분들이 참으로 많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만 내 보수 개신교 세력들이 대만 성평등교육위원회 등 여러 공론의 장에서 자신들의 색을 지우고, 학부모의 얼굴, 학생의 얼굴, 교사의 얼굴로 참여하여 공공연하게 혐오의 논리를 펼치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체들을 만들어 활동하고, 메신저 등을 통해 성소수자들과 관련한 왜곡되고 거짓정보들을 퍼트리는 방식은, 정말 한국의 그것과도 너무나 흡사해서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대만의 발표가 끝이 나고 이어진 일본의 상황에서는 대만과 조금 다른 고민들을 들어볼 수 있었는데, 일본은 인권과 관련한 언어들에 대한 일본사회 내 반감들이 있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와, 한국과는 달리 초국적 기업이나 일본 내 사기업에서부터 먼저 성소수자 친화적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시행되는 흐름들 속에서 성소수자 인권과의 균형을 어떻게 잡아 나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한국은 한국 내 보수 개신교의 전반적 역사와 현재의 상황, 차별금지법과 개헌과 관련한 법제도적 상황, 그리고 다양한 방식들로 연대하며 혐오에 대응해왔던 운동의 역사들과 커뮤니티 내에서 치유의 방식들, 또 대학 내 성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대응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발표를 마지막으로 오전 9시에 시작된 워크숍은 오후 6시가 훌쩍 넘어서 마무리가 되었고, 이어진 저녁 만찬 자리에서 각국의 활동가들과 이야기들을 나누며 대만의 역사와 현장의 이야기들을 더욱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저녁 만찬이 진행된 장소는 바로 ‘제니퍼 루’ 라는 대만의 성소수자 정치인이 자신의 지역구에서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그의 파트너와 함께 운영하고 있는 카페였습니다. 함께 간 활동가들과 성소수자 정치인과 이러한 공간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미처 하지 못했던 워크숍의 뒷이야기들을 나누며, 이렇게 워크숍의 밤은 길고 긴 수다의 시간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2. 대만 LGBT 프라이드
전날 밤에도 비가 살짝 왔고 퍼레이드 당일 일기예보에도 비소식이 있어서 잠들기 전까지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퍼레이드 당일 아침 하늘은 흐리기만 할 뿐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우산과 우비를 가방에 넣고 숙소를 나와 걷기 시작했는데, 프라이드의 출발지에 가까워질수록 거리에서 갖가지 무지개 표지들을옷가지며 가방 아니면 몸에 두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에서 피어나는 동질감과 반가운 마음에 살짝 들뜨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이번 대만 LGBT 프라이드는 올해 5월 대만의 동성혼이 법제화된 이후 열리는 첫 LGBT 프라이드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퍼레이드의 행진코스가 무려 세 개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서쪽, 북쪽, 남쪽 방향으로 각각 이어진 코스를 따라 각자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되었는데, 출발지 근처에서부터 정말 많은 인파들에 이리저리 떠밀리다 어제 동아시아 워크숍에서 만난 대만의 유명한 성소수자 정치인인 ‘제니퍼 루’가 선두 트럭 위에서 발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 트럭을 따라 저와 일행은 북쪽 코스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퍼레이드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나중에 대만 지역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날 퍼레이드에 12만 명이 참여했다는 기사를 접하고 정말 사람이 많았음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퍼레이드 자체는 한국의 행렬처럼 아주 흥겨운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그룹들끼리 또 반려견,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까지 삼삼오오 모여 각자의 방식대로 축제를 즐기며 걷는 광경들이 여유로워 보여 더 좋았습니다. 또 잿빛 하늘과 거리의 낡은 건물의 곳곳에 보이는 푸른 잎사귀들이 만들어내는 남국의 정취와, 그래서 더욱 돋보이는 행렬 사이사이의 무지개들이 유난히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듯 했습니다. 행렬 중간중간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많은 피켓과 선전물들을 받으며 미소와 함께 "땡큐"로 화답했고 또 앞서가는 트럭에서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와 'Judas'가 나올 때는 함께 뛰며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한국에선 축제 현장에서도 각 단체 부스를 운영하거나 퍼레이드가 끝나면 또 뒷마무리를 생각하며 행진의 여운이나 감흥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늘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바쁘게 움직여야 했는데, 이렇게 사람들과 마음 편히 걸으며 온전히 즐기는 퍼레이드는 처음이어서, 행진이 끝나고 출발지로 돌아와서도 여유롭게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축제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과, 저녁의 노을로 물든 타이페이 하늘의 풍경들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해두려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길고 긴 퍼레이드가 끝이 나고 중앙무대에서 폐막 행사가 진행되었는데, 감사하게도 한국과 일본의 활동가들이 함께 폐막 무대에 올라 응원과 연대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짧은 발언의 기회를 얻어 무대에서 대만 퍼레이드의 참여자들에게 한국의 성소수자들이 처한 상황과 또 희망과 연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폐막식이 끝나고 이후 개인 일정시간에 저는 현지에서 연락이 닿은 대만의 친구들을 만나 대만의 종로라 불리는 시먼(西門)의 홍루(紅樓)를 방문했습니다. 그 이후 새벽까지 긴 일정이 이어졌다는 후문이.
이번 대만 동아시아 워크숍 초청 및 LGBT 프라이드 참여는 제게는 활동가라는 이름을 가지고 해외의 성소수자 단체의 활동가들과 만나 교류를 하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각국의 상황들을 공유하고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비슷했던 지점과 차이점들을 발견하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 안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활동에 있어서 타국의 성소수자 이슈들이 우리의 현장과 이어져 있다는 새로운 감각들을 깨닫게 된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한껏 고무된 채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영어학원부터 등록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성소수자들은 일상적인 차별과 혐오 속에서도 온전한 나의 모습 그대로 평범하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힘을 잃지 않고 마땅히 누려야 할 나의 권리를 위해 함께 힘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쟁취한 더 많은 권리와 승리의 경험들을 언젠가 다시 각국의 활동가들과 모여 나눌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바라며 글을 줄입니다.
친구사이 대표 / 낙타
몸 건강히 잘 다녀와서 다행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