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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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가족의 탄생 #8>
마음 가는대로, 오늘을 함께하는 두 사람 – 게이 커플 '경태&범석'의 이야기
‘피가 섞이지 않아도 괜찮아.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이라면 가족이 될 수 있어.’
2006년 5월 개봉한 영화 <가족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로부터 10년 간,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가족구성에 대한 이야기는 2006년 가족구성권연구모임부터 2013년 김조광수·김승환 부부 결혼식에 이은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이하 가구넷)의 출범, 그리고 최근 동성혼 불복 소송에 따른 심리까지 험난하지만 다부지게 계속돼 왔죠.
그럼에도 ‘종북게이’, ‘골수 페미니스트’ 등의 용어가 난무하며 혐오가 판치는 게 현실입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요원하고, 성소수자를 포함한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은 좌초됐으며, 한 지자체의 성평등기본조례에서 성소수자 관련 조항은 삭제됐습니다. 이러한 차별과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가시화를 통한 존재 드러내기와 당연한 권리 주장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이에 친구사이에서는 성소수자 가족공동체를 위한 제도적, 사회적 변화요구에 앞장서는 가구넷과 함께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성소수자 가족공동체 당사자 연재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8번째 이야기는 마음 가는대로 서로 함께하다 보니 어느덧 13년차가 된 게이 커플, '경태&범석'의 이야기입니다!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그가 이미 모닝커피를 끓이고 있다. 토스트와 잘 어울리는 그윽한 커피맛이 정신을 깨운다. 아침을 먹으며 오늘의 일정을 서로 공유한다. 점심 때는 으레 밥은 챙겨먹었는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저녁 즈음에는 몇시쯤 각자 집에 들어가는지 확인하게 된다. 서로가 별다른 약속이 없는 날이면 누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식탁에는 술상이 차려진다. 이게 식사용인지 안주용인지 모를 음식을 그가 뚝딱 만들어 내놓으면, 나는 뭇반찬과 소박한 술잔을 셋팅한다. 반주 하나에 이야기 하나, 그렇게 같이 먹고 같이 자는 게 반복되는 나날들.
최근 동거를 시작하고 나서, 특별할 것 없지만 하나하나 소중하게 박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권태로움에 대한 우려도, 못보던 모습 발견에 실망할 것 같은 두려움도 아직은 기우였다. 그렇게 그와 내가 알게 모르게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야말로 자연스럽게 가족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표가 아닐까 생각하는 최근 일상이다.
이번에 만난 경태와 범석 커플도 그랬다. 지지고 볶는 사이 어느새 13년의 세월을 엮어낸 힘이 인터뷰 중간중간 배어나와, 거침없는 한 편의 커플 연대기가 펼쳐졌다. 커뮤니티 활동은 요즘 뜸하지만 오래된 경험으로 잔뼈가 굵은 경태, 그리고 다양한 꿈을 직접 실천에 옮기면서 하루하루에 만족하는 범석을 그들의 집, 스위트 홈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논문 마무리 중이라 형이랑 같이 뭘 계획해서 놀 틈은 없어요. 이번 여름에 졸업하거든요. 거기에 집중하고 있죠. | 경태
큰 스케줄은 어쨌든 얘가 대학원 다 마무리돼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때쯤 전 일 그만 둬야 되겠네요. 요즘 일하기가 싫어서... 자칭 프리터(freeter)죠. [웃음] 원래도 보통 계획 잡아서 같이 뭘 하진 않아요. | 범석
일단 가볍게 봄맞이 근황토크로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더없이 평안하게 느껴지는 답변이 두 사람의 오랜 관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매년 여름이면 범석의 친구가 있는 부산여행을 꼭 가고, 일주일에 두 번은 의무적으로 술을 마시며 밤을 새기도 한다는 둘만의 습관이 그래서 더 정감이 갔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과연 어땠을까?
2005년부터 만났는데, 처음엔 뭐 번개였죠. 예전엔 스마트폰이나 어플이 없어서 이반시티 파워데이팅으로. 그냥 편한 차림으로 신림에서 택시로 2만원 주고 집 근처까지 찾아갔어요. 하룻밤 인연이었을 두 사람이 대화하다 보니까 둘 다 구미 출신이고, 중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것까지 알고나니 운명을 별로 안 믿는데도 참 재밌었어요. 심지어 저는 구미에서 얘네 동생들이나 부모님도 다 봤었으니 말 다했죠. [웃음] 사실 혼자 영화보러 가는걸 좋아했었는데,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라 관련해서 얘기할 사람이 없잖아요. 얘랑은 그게 통해서 불같이 연애했죠 바로. | 범석
데이트하면 보통 영화를 많이 봤어요. 제가 영화 관련 전공이기도 하고, 형도 영화를 좋아해서요. 처음 만났을 때도 영화 얘기를 되게 많이 했어요. 그것도 남들이 안 볼 것 같은 인디영화나 고전영화들을 많이 알아서 서로 통했죠. 영화가 저희를 연결해준 큰 통로 중 하나였어요. 형은 대학로에서 연극하다가 그만두고 바텐더 일을 했는데, 예술 쪽 일을 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관심이 많더라구요. | 경태
그러다보니 사귀자마자 동거도 하고 서로의 삶의 영역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경험도 누리게 됐다는 두 사람의 추억거리가 참 찰지게 느껴졌다. 더 나아가 남들이 잘 모르는 영화들을 둘이서만 공유한다는 느낌으로 연애했다니, 두말이 필요 없는 사이로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리라.
▲두 사람이 같이 본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말에,
범석은 <그녀에게>를, 경태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언급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13년차가 된 커플에게 장수의 비결을 당연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할 찰나, 스스로 이별했던 순간을 먼저 꺼내는 반전을 보여주는 두 사람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도 이번 인터뷰가 남다를 것임을 직감했다.
2009년도쯤에 1년 정도 헤어졌었어요. 환경영화제 할때쯤 헤어졌다가 여성영화제 할때쯤 다시 만났죠. [웃음] 그때 헤어지도록 도움(?)을 준 게 동인련(現 행성인)이었는데, 오해 탓에 사람들이 제 핸드폰 뺏으면서 헤어져야 한다고 그랬었거든요. 아무튼 저는 형이랑 경제적인 부분이 컸는데, 형은 저한테 좀 질렸었다고 하니까 헤어진 이유가 다르긴 해요. | 경태
그 뒤로도 이어진 (폭로전을 방불케 하는) 이별 이야기를 구구절절 실을까 하다가, 다분히 사적인 부분을 들춰내기보다는 두 사람이 지지고 볶는 과정 자체에 좀 더 귀를 기울여봤다.
얘는 집착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사랑관이 좀 달랐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났을 때 경태한테는 아직 정리가 덜 된 애인이 있더라구요. 소위 애인 없이 못 사는 친구였죠. 어쨌든 정리했다고는 하는데 이전 애인이랑 관계는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그게 계속 눈에 띄니까 좀 의심이 가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어요. 저는 헤어지면 끝인 거지 형-동생 사이로 지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았죠. | 범석
이처럼 서로가 생각하는 이별 사유도 다르고 주변 지지층도 다르지만, 어찌됐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는 말대로 재결합 후 더욱 가까워진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영화의 서막에 불과했다.
경태가 활동한 커뮤니티에서 있었던 이상한 소문까지 잘 견뎌내고 다시 경태 곁으로 돌아온 범석. 만나자마자 소문의 발상지인 커뮤니티를 같이 욕했으면서도 그 해 퀴어문화축제 때 단체 부스에서 범석이 칵테일을 만들어줬다는 얘기는 엉뚱한 매력을 자아냈다.
지금은 커뮤니티 사람들과 나름 친하긴 해도, 커뮤니티에서 활동하지는 않아요. 좀 늦게 데뷔했는데, 데뷔하기 전 일반 칵테일바에서 일할땐 어쩌다가 남자 단골이 많았어요. 그러면 밖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면 가끔 썸씽도 생겼더랬죠. 사실 그때는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어요. 퀴어문화축제 때 칵테일 만든 것도 평소에 할 기회가 없으니까 좋아서 만든 거예요. 그때 결국 다 팔았죠. [웃음] | 범석
그와 반대로 경태는 일찍 커뮤니티에 발을 붙여 상근활동까지 했으니, 할 말은 다한 셈이다.
처음엔 라이코스(예전 웹포털 사이트) 이반모임 ‘우사반(우정사랑이반)’에 나가서 단체번개도 경험했었어요. 그러다 홍석천 씨 커밍아웃 뉴스를 보고는 아무 생각 없이 가서 도와줘야겠다는 마음에 달려갔죠. 처음 한 게 숭실대에서 전단지 배포하는 일이었는데, 자연스러운 커밍아웃이었어요. 군복무 전후 2000년도쯤에는 동인련(現 행성인) 상근활동도 했고요. | 경태
주위에서 한번쯤은 봤을 법한, ‘공식 연애경험은 없는 게이’와 ‘애인 없이 못사는 게이’의 만남이 결국 이렇게 오랫동안 금슬을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결국엔 당사자들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결합한 계기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저는 바로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제가 범석형에게 느꼈던 부족한 부분을 이번엔 그 사람이 저를 보며 얘기하는 거예요. 결국엔 차였고, 형이 바로 생각나서 제가 먼저 전화했죠. 말없이 다시 와줘서 고마웠어요. 생각해보면 경제적인 것만 빼고는 인생관을 비롯해서 여러가지가 제일 잘 맞는 관계였던 거죠. 경제 부분도 저는 돈을 많이 버는 삶을 원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형도 마찬가지라서요. 그게 되게 중요한 것 같더라구요. 그리고 사실 저희가 헤어진 상황이었긴 한데 연락은 계속 하고 있었으니 뭐... 헤어지고 얼마 안됐을 때는 술 먹고 형이랑 통화하면서 종로 길바닥에서 막 울고 그랬죠. [웃음] | 경태
그 당시 누나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했었는데, 가끔 얘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나오면 생각이 나면서, 술 한잔 한 김에 전화하고 그랬죠. 그런 기억들은 남는 거니까요. 어쨌든 몇 달 지나니까 저도 슬슬 정리가 되면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메일을 보냈는데, 내 의도와는 다르게(?) 얘가 다시 연락을 해서 만나게 됐죠. 그 후 대화를 많이 했는데, 경태의 오픈 릴레이션십 같은 개념을 내가 좀 더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겠다는 말도 덧붙였어요. | 범석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없으니 알게 된다는 말을 절감하면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한뼘 더 성장해 있었다. 경태는 범석의 진솔한 마음을 알게 되고, 범석도 좀 더 오픈 마인드로 경태의 마음을 들어준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그냥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게 아쉬웠던 걸까. 빵빵 터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한발 더 이어진다.
그러고나서 1년 뒤에 형이 다시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래서 저도 쿨하게 알겠다고 했는데, 그냥 잠깐 지나가는 바람이었던 거라 정식으로 헤어진 것도 아니예요. 마지막으로 형이 고기 사주던 게 기억나네요. [웃음] | 경태
알면 알수록 두 사람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두드러지는 관계라는 느낌은 뭘까. 심지어 대화할 때도 한 사람은 감정에 충실해 얘기하는 걸 좋아하고 다른 한 사람은 토를 달며 논리적으로 따지는 걸 즐긴다고 하니 서로 의사소통이 될까 싶으면서도,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석처럼 서로 이끌리는 관계라는 게 참 신기하다. 하긴 사람들은 보통 자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매력을 지닌 사람에게 끌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돌고 돌아 구관이 명관이라는 걸 몸소 증명하며 서로 맞춰가는 것도 배우게 된 커플. 부부싸움 후 한 쪽은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뎌 별일 없었다는 듯 나오고, 또 한 쪽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차이가 있음에도 지금껏 잘 지내는 걸 보면, 싸우는 것보다 화해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잠자리까지도 서로 수면 패턴이 달라 따로 잔다니, 그것도 이 커플이 서로 사랑하는 한 방식이리라.)
형이 의외로 잔소리가 좀 심해요. “너는 공부하는 머리 밖에 없냐”고 그러고. [웃음] 행주로 어디 닦는 거부터 외출할 때 시간 맞추는 것까지 서로 달라서 참 그렇죠. 저도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하면 빠른 편이긴 하거든요. 그래도 형이 워낙 빨리 뭘 하는 편이라 저도 어느새 그렇게 되더라구요. 같이 살다보니까 성격도 닮게 됐어요. | 경태
서로 싸울 때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감정적으로도 충실한 편이에요. 그래서 가끔은 물건도 던지고 하는데 저는 그래도 버릴 물건 던지는 반면에 얘는 언젠가 멀쩡한 선풍기를 던져서 못 써먹은 적도 있어요. [웃음] | 범석
같이 살다보면 좋든 싫든 서로의 다양한 모습들과 마주하게 된다. 몸에 밴 습관에서부터 가사분담, 경제생활, 취미활동, 거기에 원가족과의 관계 등이 얽히고 섥혀 함께 새로운 가족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두 사람 또한 그 과정을 오랫동안 겪어왔고, 또 겪고 있다. 이처럼 현재진행형인 가족의 탄생 가운데에서, 좀 더 내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다.
이 친구가 지금까지 그래도 나름 시간을 나눠서 여러 일을 하고 있는데, 보기에는 여유로워보이는 데다가 까페에서 일하니 어디든 가까이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게 좋은 거예요. 제 직장 근처로 와서 일할 수도 있고.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이 되게 많고, 밥도 최소 하루 한두 끼는 같이 먹어요. 출퇴근 외의 시간에는 서로 거의 붙어 있더라구요. | 범석
보통은 집에서 볼 얼굴 밖에서도 계속 보는 게 좀 그럴 법도 한데, 소소한 일상도 그렇게 공유하면서 ‘같이 밥을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커플을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도 그러고 싶다는 부러움을 느끼게 된다. (공교롭게도 인터뷰어들 또한 연인과 동거 중이어서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가사분담 또한 본인이 잘 하거나 원하는 걸 하면서 이뤄 나간다는 게 동성 커플의 묘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요리를 잘 해서 요리를 주로 하고, 저는 그러면 설거지하는 식이죠. 청소, 빨래도 제가 하고요. 생활비는 제가 관리하면서 공과금은 반반 부담해요. 주로 저희는 먹는 데 쓰는 것 같아요. | 경태
그러나 현실은 미혼남성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30대 후반과 40대 초반을 맞이한 둘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혼이나 만혼이 요즘 유행이라지만 내 자식만은 평범한 길을 갔으면 하는 게 대부분 부모님의 마음이고, 그래도 평생 한번쯤은 결혼해서 애도 낳고 아빠 노릇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대부분인 것이다. 오죽하면 경태 어머님은 지금 경태가 (친한 형이라고만 알고 계신) 범석과 사는 게 못마땅해서 경태에게 “너가 돈을 벌면 나가서 혼자 살아라”라고 말씀하실까.
엄마가 요즘 <미운 우리 새끼> 같은 프로그램도 보시면서 그냥 차라리 혼자 살라고 말씀하세요. 눈치가 빠르셔서 제 성 정체성/성적지향을 눈치채신 것 같은데, 혼자 살면 성 정체성 같은 걸 알기 힘든데 남자랑 살면 보이니까 그게 싫으신 거죠. 예전에 집에 한 번 오셨을 때는 난리였어요. 집에 있는 거 다 치우느라고. 언젠가는 엄마 몰래 이사했다가 남자랑 같이 산다는 걸 아시고는 분노하셨어요. [웃음] 그래서 부리나케 본가에 내려갔는데 벽에 붙어있던 제 사진이 다 없어졌더라구요. 거기에다 대신 손자 사진을 붙여 놓으신 거죠. 저랑 거리를 둔다는 느낌? 저에 대한 애착이 제일 강했던 분이거든요. 남동생은 양아치 같아서 마음대로 못했으니까, 제가 딸 노릇 했던 거죠. 동생은 그래도 저에 대해 알고 있어서 지지해주고 한번 애인이랑 같이 오라고 하더라구요. 부모님한테는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했고요. | 경태
그 사건 이후로 한 달에 한번씩은 꼭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을 뵌다는 경태의 말을 들으면서, 비록 원가족이 원하는 바대로 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더불어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멋져보였다. 게다가 집에 가면 한 명씩 돌아가면서 부모님과 동생 말을 다 들어주고 온다고 하니, 비록 박쥐 같은 존재일지라도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채감 등이 겹쳐 부여된 역할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반면 범석은 애초부터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해서 좀 더 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단다. 무엇보다 원가족의 지지와 이해가 있기에 원하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입이 간지러워서 웬만하면 다 얘기해요. 오픈을 안 하면 대화할 때 계속 감춰야 하잖아요. 얘랑 사귀면서 말을 안할 수 없는 순간이 몇 번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되게 막 고민하고 긴장하면서 말했는데, 그래서 극적인 상황을 기대했는데, 반응이 좀 시큰둥했어요.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하는데, 저는 사실 가족들한테 커밍아웃은 안 해도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해요. 오히려 하고 나니까 서먹해진다는 느낌이 좀 들었거든요. 아 참, 막내 형도 아직 결혼을 안 해서 혹시나 하고 의심하고 있어요. [웃음] | 범석
공동체에 대한 고민 또한 성소수자로 살면서 빼놓을 수 없는 ‘핫 이슈’일 것이다. 커뮤니티가 주는 소속감과 안정감, 공동체 생활을 통해 얻는 자긍심과 위로가 우리에게 든든한 빽이 되고 비빌 언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두 사람은 더 신중하게 된다는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경태는 영화 <위켄즈>도 2번이나 보면서 공동체에 대한 로망을 꿈꿨다는 풍문이다.)
사람만 보고는 공동체에서 버틸 수가 없잖아요.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지향점 같은 게 저의 그것과 동일해야 하는 건데 쉽지 않더라구요. 사실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주변을 맴도는 성소수자들이 더 많잖아요. 요즘은 단지 성적 지향이 맞는 사람들보다는 직업적인 환경이 유사한 사람들과 있는 게 더 편해요. 같이 돈 없고 같이 공부하고. [웃음] 또래 게이들은 다 직장 생활하고 있어서 저와 라이프스타일도 다르고 경제적인 차이도 있으니까요. 제가 공부하는 분야는 예술 쪽이라 대학원 면접 볼때부터 커밍아웃했어요. | 경태
저 같은 경우는 사람 많은 걸 별로 안 좋아해서요. 막상 나가면 좋은 사람도 많고 하던데, 꾸준하게 해야 되고 사람 많은 데에서 마음 맞춰서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 범석
어느덧 창창한 시절을 함께 하며 같이 나이 먹고 있는 게 자연스러워진 두 사람. 비슷해서, 비슷하지 않아서 알게 모르게 쌓인 케미와 연륜이야말로 둘의 관계를 끈끈히 엮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그들이 세우고 있는 앞으로의 계획 또한 궁금했는데, 답변 역시 범상치 않았다.
전 없어요. 노년을 위해서 적금을 붓는다든지 보험을 든다든지 하는 개념이 아직 없어요. 그냥 오늘 행복하면 돼요. 내일 걱정은 내일하면 되는 거고. | 범석
저도 그닥 없는데, 부모님이 오히려 더 걱정하세요. 공부하고나서 돈을 벌어야 할텐데 말이죠. 어쩌면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어서 경제 부담이 그렇게 크진 않은 것 같아요. 게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지 않나, 아니었으면 다른 꿈을 꾸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요. | 경태
그저 현재 상황이 나쁘지 않다면 만족하고, 어렵지 않다면 거절보다는 신뢰하는 두 사람의 수더분함이 인터뷰 섭외에서부터 진행까지 뚝뚝 묻어났다. 덕분에 드러내서 활동하지는 않지만 삶과 관계 자체로 다양한 성소수자 가족/공동체 중 한 이야기를 풍성하게 들려주고 있는 이들에게, 결혼과 입양 등 동거 너머의 실천에 대한 생각도 물어보았다.
전 이성애자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결혼 같은 건 생각 없어요. 뭔가 그런 약속을 한다는 게 저한테는 되게 짐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얘는 관심도 많고 하니까 존중하긴 해요. 인터넷 같은 기사에 그런 이슈가 나오면 서로 얘기도 하고요. 저는 그냥 개인이자 게이일 뿐이에요. | 범석
결혼식 같은 의례의식을 별로 안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요 저희가. 형이 좀 개인적이라 제가 옆에서 막 그래도 밖으로 끌어내려는 상황이죠. 반려동물은 가끔 생각은 하는데 잘 못 키울 것 같아요. 형을 애완동물처럼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르죠. [웃음] | 경태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스스로 스트레스 받는 걸 못 견뎌하는 범석과, 그 스트레스를 받아주면서 ‘게이 커뮤니티의 폭탄을 안고 산다’며 푸념하지만 항상 곁에 있는 경태의 삶을 마주하는 동안, 그래도 서로 밀고 당기며 부대끼기에 조화를 이루고 오래 가는 게 아닌가 하는 확고한 믿음을 느낄 수 있었다.
법적 보호나 권리에 대한 필요성도 둘 다 아직 피부로는 못 느끼고 있어요. 그게 다 경제적인 부분인데 그런 거에 대한 관념이 없어서요. 아직 파고들지 않아서 잘 안 보이는 거겠죠. | 경태
저는 아버지 돌아가시는 거 보고나서 중병 걸리면 치료 같은거 생각 말자고 친형들이랑은 합의 봤어요. 성소수자 커플들의 어려움은 공감 가는데 제 상황에 대입은 안 돼요. | 범석
저랑 아직 합의는 안 됐어요. 처음 듣는 얘긴데. [웃음] 건강하길 빌 뿐. 담배 술이 문제죠. | 경태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공간의 풍경
게이 커플의 일상을 서로 주고받다 보니 어느덧 어스름이 깔리며 이젠 둘만의 달콤한 주말 저녁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줄 순간이 찾아온 걸 느꼈다. 그래서 처음에 묻지 못한 물음, 장수의 비결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형이랑 힘겹게 헤어지고 나서 주변에 다 알렸는데, 결국엔 다시 합치면서 어찌보면 뒤통수 친 거잖아요. [웃음] 그 뒤로는 누구한테 연애 상담 안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정말 둘 사이의 관계는 둘 밖에 모르는구나라는 생각이 든 거죠. | 경태
연애상담까지는 아닌데 해 줄 수는 얘기는 딱 하나인 것 같아요. 싸울 때 그냥 다 오픈해서 싸우라고. 저흰 그렇게 해요. 욕을 하며 풀든, 뭘 때려부수든, 어떻게 결론이 나든 터뜨려야 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전에 바에서 일하면서 본 커플들 중에도 마냥 좋고 한 번도 안 싸운 애들 보면 결국 다 깨지더라구요. 두 사람의 관계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가끔 감정적인 폭발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범석
역시나 잘 싸우면서 잘 지내는,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비법이 진리임을 직접 들으니 새삼 와닿는다. 커뮤니티와 연은 이어가며, 또 나름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번 인터뷰에도 흔쾌히 응해준 두 사람에게, 마무리 단계에서 이번을 계기로 서로의 관계를 돌아볼 시간을 주었다.
커뮤니티 내에서도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연애도 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가끔은 부럽기도 해요. 성적인 이끌림 외에도 신념으로 묶일 수 있는 지점이 있으니까요. 그게 바람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통의 목표가 있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긴 해요. 저희는 그런게 없으니까. 대학원 내에도 커플이 많은데, 서로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이해해준다는 장점은 있겠지만 또 너무 많은 걸 공유한다는 게 안 좋을 수도 있겠죠.
형은 정말 자유롭게 살았고 저는 정말 정해진 대로 일탈 없이 자라온 사람이니까, 참 다르게 살았는데 인생관은 비슷하니 그게 신기하죠. 서로 싸우면서 맞춰간 게 아닐까 싶어요. 원가족에게는 상황에 따라 연기해야 하는데, 형한테는 그럴 필요 없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편한 사람이죠. | 경태
같은 직업군끼리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나서 사는 게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가족이고 커플이어도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그런 건 별로예요. 게이라는 정체성도 제 인생의 일부일 뿐이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죠.
그래도 이 친구랑은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알게 모르게 서로 자극이 됐나 봐요. 때로는 그게 어떤 이해의 척도가 될 때도 있어요. ‘아 얘는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럴 수밖에 없구나’하게 되는 거죠. 미우나 고우나 우린 서로 가족이라는 생각이에요. [웃음] | 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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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가장 긴 인터뷰였지만, 쉼 없이 달려온 걸 보면 참 유쾌한 시간이었다. “덕분에 힐링됐어요. 언제 같이 술 한 잔 해요.”라는 범석의 작별 인사 또한 따뜻하고 고마웠다. 말하기도 벅찬 국가의 반인권적 행태와 끊임없이 우리를 지우려는 이들의 차별‧혐오 속에서도, 다양한 존재들이 들고 일어나 꿋꿋이 버틴 채 더 많은 사랑을 외치며 나아갔으면 좋겠다.
<新 가족의 탄생> 연재 순서
#01 사랑에 차별이 있나요 – 레즈비언 부부 '낮잠과 유다' 이야기
#02 무지갯빛 마음이 모여 사는 곳 – '무지개집' 사람들 이야기
#03 별처럼 반짝이는 인연을 맺다 – 게이 부부 '플플달 제이&크리스' 이야기
#04 닮은 듯 다른, 믿음 안의 사랑 – 퀴어 커플 '도플+갱어' 이야기
#05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산다 – '성북마을무지개' 사람들 이야기
#06 15년의 사랑, 벅차게 Congratulation – 게이 커플 '승정&정남'의 이야기
#07 우리 관계를 반으로 자를 수 있나요 – 레즈비언 커플 '이경과 하나'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