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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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10
: 마이 페어 웨딩
- 나에게 쓰는 편지
(닉네임. 중기)에게
26년. ‘내가 남자를 좋아하나?’라는 생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내 스스로를 게이라고 정체화하기까지 걸린 세월이야. 겁이 많고 걱정이 많아서, 어쩌면 용기가 부족해서 아니, 무식해서. 일찌감치 했어야 할 고민을 미뤘고 그렇게 내가 게이임을 인정하기까지 오래도 걸렸네. 그리고 외면했던 내 모습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지 이제 겨우 10개월째. 아직 무언가 제대로 된 연애는 못해봤지만 친구사이라는 커뮤니티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고, 나도 이젠 행복한 게이라이프를 꿈꾸고 있어. 뭐 거창하고 대단한 거 말고,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거. 아 이거 거창하고 대단한 것일 수도.
난 영화를 꽤 좋아하고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빼고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퀴어영화를 보면 집중을 잘 못하는 편이야.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그런 내가 세 번이나 본 퀴어영화가 있어. 바로 <마이 페어 웨딩>이야.
이 영화는 2015년 6월에 개봉했지만 2013년 9월 있었던 ‘핫’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어. 김조광수 감독(광수)과 그의 파트너 김승환(승환) 커플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영화는 그들이 겪는 한국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결혼식 전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이 결혼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연대해서 함께 결혼식을 만들어 나가. 그리고 많은 사람의 축복 앞에서 결혼식을 끝내. 영화의 주인공들에 대해서는, 그리고 이들의 ‘당연한 결혼식’에 대해서는 이 에세이를 읽고 있을 독자들이 훨씬 잘 알고 있을 거야. 나는 작년 여름 친구사이 첫 모임에 나오던 날, 서울시청에서 열렸던 ‘프라이드 페어’에서 김조광수 감독님을 만나 수줍게 싸인을 받은 게 전부니까.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 가슴이 떨렸어. 많은 카메라 앞에서 열린 주인공들의 첫 결혼식 기자회견의 모습에서는 같이 긴장했고, 9년 연애를 하면서도 여전히 상대방의 모르는, 혹은 익숙한 모습 앞에서 사소한 다툼을 이어갈 때 조마조마했고, 승환이 고향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결혼식, 남편 얘기를 나눌 때 부러워서 떨렸어. 그리고 승환의 누나가 동생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릴 때 그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슬퍼서 떨렸고, 무엇보다 주인공들 서로가 서로를 정말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음에 보는 내내 설레서 떨렸어.
이 떨림 가득한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난 서로 준비한 ‘부부생활 십계명’을 중간점검?하는 장면을 꼽고 싶어. “얼굴에 나이의 그림이 그려지는 것을 아름답게 지켜보겠습니다.”, “첫눈에 반한 그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우리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겠습니다.”처럼 거창하고 화려한 말은 아니지만 상대를 향한 애정 가득한 약속들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사랑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하고 사랑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게 돼. ‘사랑’에 정답이 있지는 않겠지만, 저런 사랑이라면 참 행복하겠다는 생각도.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영화가 이 두 커플의 사랑으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는 거야. 이들의 결혼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함께 준비해 온 사람들, 그리고 결혼식 당일 광통교를 가득 채운 많은 시민들의 ‘사랑’이 영화의 여백을 가득 채워. 물론 이들의 결혼은 국가로부터 ‘거절’ 당했고, 이 커플은 ‘거절’을 ‘거절하는’ 싸움을 계속하겠지. 아마 지난해 미국에서 법제화된 ‘동성결혼’이 한국에 자리 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몰라. 그래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커플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결혼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갈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보고 나면 항상 드는 생각이 있어. 내가 내 진짜 모습을 더 빨리 사랑해주고 인정해줬으면 어땠을까. 나도 2013년 9월 광통교 위에서 저 결혼식을 직접 보고, 축하해 주고 있었다면 2016년의 나는 조금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들은 항상 지난 세월의 내 모습을 원망스럽게 만들어. 이런 류의 후회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 분명한 건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는 조금은 달라졌으니까.
영화 초반부에 나왔던 결혼식 총연출을 맡았던 감독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동성애자들의 사랑이 그 얼마나 로맨틱한가.” 26년을 내 진짜 모습을 외면하며 살던 나도 내 삶으로 증명하고 싶어. 동성애자들의 사랑도, 이성애자들의 사랑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우리도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꾸고 싶어. 함께.
p.s. ‘나 자신에게 쓰는 편지’로 글의 컨셉을 잡았다. 원래 의도는 올해 결혼식을 올릴 누나에게 이 영화를 강력추천하는 편지로 쓰려고 했으나, 아직 커밍아웃도 안 한 내가 누나에게 쓸 말을 정리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하긴 제대로 된 사랑도 못해본 동생이 ‘결혼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사랑도 존재한다.’라고 소개하는 꼴이 웃기기는 하겠다. 어쨌든 누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난 사랑을 찾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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