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1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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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즈 게임 #9
UNDERTALE

(주의: 이 글은 UNDERTALE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랜 옛날, 두 종족이 이 땅을 지배했다.
인간과 괴물.
어느날, 두 종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긴 싸움 끝에 승리한 것은 인간이었다.
인간은 괴물을 마법으로 지하에 봉인했다.
세월이 흐르고...
201X년 에봇 산
전설에 따르면 이 산에 오른 자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자, 오늘은 2015년 하반기를 훈훈하게 달궜던 인디게임인 UNDERTALE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
헉 뭐야... 고전 게임 아니야 이거? 완전 옛날 게임같이 생겼는데?


(좌: MOTHER 2(1994) / 우: UNDERTALE(2015))
첫 인상은 그렇지? (알 만한 사람들은 알 고전 게임인) MOTHER 시리즈에서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 아트 스타일도 그렇고, 현대와 판타지를 능청스럽게 섞어놓은 세계관도 그렇지. 게임 플레이 매커니즘도 그 당시 게임들의 것을 많이 가져오고 있고. 그 외에도 90년대 RPG 게임 황금기에 대한 향수가 게임 이곳저곳에 녹아있지. 하지만 이 게임의 가장 큰 특징은, 그 90년대 게임들을 호명하면서 동시에 해체하고 있다는 점이야.
엥?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일례를 들면, 90년대 RPG하면 거의 공통적으로 있었던 것이 반짝거리는 "세이브 포인트"지. 그 이전 게임에는 세이브의 개념 자체가 없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싱글 플레이 RPG에서는 자동저장 기능이 생겨나고, MMORPG에서는 플레이 내용이 실시간으로 서버에 반영되게 되어서, '세이브'의 의미 자체가 희박해졌지. 즉 '제한된 곳'에서 '세이브'하고 '로드'한다는 것은 실로 90년대 적인 감각인 거야. UNDERTALE에도 이 세이브포인트가 있는데, 여기서는 놀랍게도 이 내러티브 외적인, 시스템상의 기능을 스토리텔링의 중심 도구로 사용하고 있어.
그러니까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이야기의 일부라는 거지?
이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세이브를 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초능력이야. 괴물들이 사는 지하 왕국에 떨어진 인간 아이인 주인공이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지. 인간 아이에게는 괴물들에게는 없는 '의지(Determination)'가 있어. 계속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힘. 이것이 '세이브'라는 능력을 쓸 수 있게 만드는 힘이야. 이 능력으로 플레이어는 괴물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다시 시간을 되돌려서 모든 괴물들을 학살하기도 하지. 왜냐고? 할 수 있으니까. 게임이란 원래 주어진 공간 안에서, 규칙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놀이잖아? 플레이어에게는 게임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있고, 게임 안의 캐릭터들에게는 의지가 없어. 놀이를 위한 대상물이지. 결국 주인공 '인간 아이'가 가진 '의지'는 단순한 은유야. 플레이어가 게임을 깨고자 하는 의지와 주인공이 괴물들의 지하왕국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 하지만 이 게임이 흥미로운 이유는, '게임'과 '지하왕국'의 경계를 감정적으로 흐트러놓는다는 거야. 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인공'과 '플레이어'간의 경계도 흐릿해지지.

이런 목적으로 이 게임은 비디오게임 역사상 손꼽히게 흥미로운 캐릭터인 '플라위'를 등장시키는데, 이 인물... 아니 꽃은, 음... 말하자면 사이코패스 살인마야. 플라위는 주인공이 지하에 떨어지기 이전에, 주인공과 같은 '세이브' 능력을 가지고 있었어. 그 능력으로 플라위는 모두와 친구가 되었다가, 모두를 죽였다가, 다시 살려내기를 반복하다가는 결국 질려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야. 플라위는... 그러니까... 게이머지. 만약 게임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눈으로 플레이어를 바라본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플레이어는 재미를 위해 학살하고, 퀘스트를 하고, 친구를 만들고, 연애도 하고... 그러다가 게임이 질리면? 떠나버리지. 그러면 그 게임 속 세상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상상들이 UNDERTALE의 '지하 왕국'이라는 공간이 짜여진 배경이야. 플라위는 곧 '플레이어'의 거울상을 게임 속 공간에 '최종보스'로서 반영한 존재지. 그렇기에 플라위는 몹시 불쾌하고... 동시에 공감되는 캐릭터야.

자,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플라위와 같은 능력을 얻었어. 그러면 플레이어는 무엇을 할까? 다를 게 있나. 엔딩을 보고, 친구가 되어보기도 하고, 죽여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놀아야지. 당연히 '지하왕국'의 주민들은 그런 플레이어를 가만히 두지 않아.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끊임없이 건드리지. 때로는 게임의 난이도로, 때로는 감정으로, 때로는 강제종료(!)로.
특이하네. 해보고 싶...은데 이미 다 스포일러 당한 것 같아.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늦지 않았어! 그럼 그런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주제 이야기로 넘어가자. 이 게임은 90년대 게이밍에 대한 향수에서 출발한 내러티브를, 타자에 대한 인식, 선입견, 자신에 대한 통찰 등의 주제로 확장해 나가. 동시에 성적 지향과 젠더에 대해서 굉장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자신이 그 어떤 젠더나 성적 지향을 가졌더라도 주인공과 지하왕국의 괴물들에게 매끄럽게 이입할 수 있게 해줘. 예를 들면 주인공 캐릭터인 '인간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이 불확실해. 낮은 해상도의 그래픽을 젠더 포용적인 장치로 사용한 놀라운 발상이지. 스팀 토론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플레이어마다 주인공의 성을 다르게 보고 있더라구. 그러니까, 성을 모호하게 만들면서도, 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에 성공한 거지. 뭐 그 외에는, 지적하기 부끄러운 사항들. 캐릭터들이 성에 관계없이 어디에 종속되거나 주변부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펼친다는 점, 다양한 성적 지향이 등장한다는 점,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의식적으로 거부했다는 점점점... 뭔가 당연하고 언급하기 민망한 사실들이라 느껴지면서도, 이런 기획을 담은 게임들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라서 말이지.

게이로서 이 게임의 내러티브가 흥미로웠던 지점은... 지하왕국을 곧 '자신의 정체성, 내지는 내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야. 주인공은 어느날 지하왕국에 떨어져서, 바깥으로 빠져나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지.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괴물'들을 만나. 일견 혐오스러울 수 있는 그런 외양을 가진 괴물들을 주인공은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깊이 이해하고, 친구가 되며 지하세계를 나아가. 결말부에서 주인공에게 지하세계를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제시돼. '보스 몬스터'의 영혼이 있으면 지상 세계로 나갈 수 있다. 즉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약점을 죽여 없애고 나면... 인간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지. 하지만 게임의 결말은 그런 식으로는 나지 않아. 이 게임의 장르는 "아무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착한 RPG"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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