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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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퀴어자랑 #1] 충북 옥천 - 오픈리 시골게이 김호미
2015년을 맞이해 친구사이 소식지에서 새롭게 선보이는 코너 <전국퀴어자랑>. 일요일이면 일요일마다 어김없이 찾아오지도 않고, 송해 선생님도 없지만, 팔도 방방곡곡에 거주하고 있는 다양한 퀴어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의 세상사는 이야기를 신명나게 소개합니다. 그럼, 다 같이 외쳐보아요. 전~국! 퀴어자랑-
김호미 / 28세 충북 옥천에서 목장 운영 중
편집자 주 -
점심식사를 막 마친 1월의 어느 오후, 나는 생각했다.
‘서울엔 잠깐이나마 엉덩이 붙일만한 편한 자리도 없는 거 같아.’
순간 호미가 있는 충북 옥천에 놀러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11월의 정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따뜻한 머그잔을 들고 집 뒤편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특별할 것 없는 시골 동네, 저 멀리엔 수확이 끝난 논밭과 소나무 숲이 보이고, 뜨문뜨문 지나가는 차들의 행렬만 내 눈에 들어왔다. 탁 트인 자리인 탓에, 정오의 볕을 온 몸으로 받을 수 있었고, 너른 잔디밭은 내 몸을 뉘일 자리가 되기 충분했다. 얼마간의 휴식을 마친 뒤 나는 생각했다.
'휴식이란 이런 거지.'
<전국퀴어자랑>의 첫 번째 주인공은 충북 옥천에 사는 김호미다. 본명은 김종민이지만 스스로 김호미라 부른다. 내가 아는 게이 중에 취향이 가장 확고한 사람. ‘소고기’로 사람 홀리는 사람. 카톡으로 번개실패담을 굳이 공유하는 이상한 사람. 머리부터 발끝까지 묘한 매력을 풍기는 사람. 나는 이 게이가 만들어내는 말로 할 수 없는 미적 감수성 따위를 은근히 즐겼다. 한때 지보이스 단원이었던 호미. 사실 그보다, 미남인 아버지를 둔 아들로서 항상 친구사이 안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이. 오픈리 시골게이 김호미의 귀향 스토리와 꿈을 지금부터 들어보자.
#1. ‘서울이거나 서울이 아니거나’
대한민국 게이에게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바로 ‘서울에 살거나, 서울이 아닌 곳에 살거나.’그곳과 종태원(종로+이태원)과의 거리가, 그곳의 게이 인구, 그곳의 게이바 유무보다 훨씬 중요하다. 서울특별시, 인구 150만의 광역시, 그리고 인구 5만의 농촌에서 살아본 나의 경험으로 내린 결론이다.
2012년 12월, 서울에 거주하며 매일 종태원에 출근하던 나는 20년 만에 고향인 충북 옥천으로 내려왔다. 당시 나의 직업이었던 유학준비생이란 애매한 신분으로 굳이 서울에 머무를 필요가 없던 것도 사실이지만, 귀향이 내가 원한 선택만은 아니었다. 나는 이곳에서 공부를 계속하며 언젠가 옥천을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2. 카우보이가 되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소를 키우는 목장을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소를 접한 나는 목장일에 관심을 가져본 적도, 멋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귀향 반년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학 계획을 접고, 나는 스스로 목장에 들어갔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뿐, 어떠한 낭만이나 꿈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어느덧 자연스럽게 카우보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했다.
첫해는 뒤따라가기 바쁜 일 년이었다. 다음해는 첫해에 배운 것을 반복하며 개선점을 찾는데 주력했다. 이제 3년차인 ‘카우보이’는 다양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목장운영과 개체관리를 전산화한 덕분에 다양한 통계를 뽑고, 작업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 전산화에 무심하셨던 아버지도 이제는 내가 만든 프로그램 없이는 일을 못하신다. 아들과 함께 일 할 수 있어 행복하다 하신다. 개량과 번식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열심히 번식과 인공수정을 한 덕분에 올해엔 어느 해보다 많은 송아지가 태어날 예정이다. 친환경축산에 관심을 가져 곧 무항생제 인증과 HACCP(유해요소관리기준)인증을 받는다. 깨끗한 목장이 되길 바라기에 목장 가꾸기에도 열심이다. 작년엔 진입로에 장미를 심었고, 얼마 전엔 친구사이에서 알게 된 디자이너 박철희의 도움으로 피드빈(배합사료보관고)을 새로 설치했는데, 마음에 쏙 든다.
#3. 나의 꿈, 정원을 가꾸는 사람
나는 대학에서 조경을 전공했다. 10대 시절부터 나의 꿈은 정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정원을 더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준비했다. 목장은 정원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동일하다 생각한다. 목장에 들어올 땐 정원을 포기했지만, 지금은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까 고민한다. 냄새 나는 축사와 꽃이 피는 정원의 결합이 귀향 후 수정된 나의 꿈이다.
정원을 만드는 것. 먼 미래에야 실현 할 수 있는 꿈이지만, 귀향을 선택했기에 더 가까워진 나의 꿈이다. 장미를 심고, 새 피드빈을 설치하는 것도 정원 만들기의 과정이다. 매일 어떤 정원을 만들지 고민한다. 쓰레기가 가득 쌓여있던 빈터는 말끔히 청소해서 주차장을 만들고 있다. 올해에는 사용하지 않는 축사 구조물을 철거하고, 나무 울타리를 만들 것이다. 가을엔 그 아래에 수선화 구근을 잔뜩 심을 생각이다. 서울에선 꿈 꿀 수 없던 나의 꿈을 벌써 실현한것 같다. 한 십년 쯤 후의 나의 정원, 목장은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정말 근사한 정원 하나가 탄생하지 않을까?
#4. 옥천 음식
귀향 후 나는 매일 건강해짐을 느낀다. 그것은 종로와 멀어지고, 목장일로 인해 주말, 연휴 없이 매일 규칙적인 삶을 살아야 함과 동시에, 건강한 향토 먹거리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식탁 뿐 아니라, 이곳의 식당들도 무척 다양한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한다. 그것도 서울과 비교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에.
대부분 자신의 집이나 건물(이라기엔 너무 간소한)에서 식당을 운영하기에, 집세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설이 허름하고 낡았는데, 그게 나름의 멋이기도 하다. 화장실은 미리 해결하고 가는 편이 좋은데, 불가피할 경우 야외에서 해결하기도 한다.
식자재는 가까운 거리에서 공급받거나, 직접 재배, 사육하는 경우도 많다. 매일 점심을 해결하는 목장 근처 식당 아주머니의 취미는 등산하며 나물 뜯기인데, 그녀의 반찬차림은 대부분 그 나물로 채워진다. 지난 가을엔 도토리를 많이 줍더니, 매일 묵 반찬이 나온다. 백숙집에서는 토종닭을 키우고, 민물생선집 남편은 대청호 어부다. 자주 가는 정육점 사장님도 자신의 목장을 운영한다. 쌈채소는 식당 옆 텃밭에서 키우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겨울엔 제공하지 않는다. 음식 값이 저렴해질 수밖에 없는, 식탁이 건강해 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5. 시골게이 라이프, 잭디에서 번개까지
사실 옥천에 내려오자마자 내가 한 행동은 잭디를 켜는 것이었다. 당시 솔로였던(물론 지금도 솔로이다) 나는 시골게이에 대한 막연한 환상으로 잭디창을 들여다봤는데, 맙소사 나 포함 오직 5명의 게이가 창에 뜨는 것이다. 그 중 2명은 18살의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생 한명과 자매급으로 친해졌는데, 그녀도 결국 졸업과 동시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갔다. 그렇게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얼마 후, 백인 한명이 잭디에 나타났다. 그는 캐나다에서 이곳 옥천으로 이주했는데, 동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했다. 가끔 만나 맥주도 한잔 하는 사이가 되었다. 왜 옥천을 선택했는지 물었더니, 시골이라 생활비는 저렴하지만, 기차역이 있어 서울과 가깝기 때문이라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역시 한 두 학기 이후 서울로 떠났다.
#6. haters
사람 사는 이곳에도 당연히 혐오와 차별은 존재한다. 나는 이 동네 게이에게 혐오의 시선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퀴어한 것들이 그녀의 눈에는 그리 불편했을까, 신원을 파악 할 수 없는 그녀가 나에게 보낸 잭디 메시지는 오픈게이에 대한 클로짓의 밑도 끝도 없는 불편함이었는가. 종로에서는 가끔이나마 난 년이라 찬사 받는 잭디 프로필 "오픈리 시골게이"가 이곳 게이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가. 동네 잭디자매에게 차별받는 존재, 바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이다.
#7. 평범한 가정을 꿈꾸는 남자
나는 지극히 이성애자적인 일(목장, 정원)과 가정(동성파트너)의 성공과 양립을 꿈꾸는 평범한 남자다. 동네 노총각형은 가끔 농담 삼아 같이 캄보디아에 각시 찾으러 가자는데, 처음엔 웃어 넘겼지만, 점점 그것 외에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을 절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결혼이 단순히 대를 잇는 번식의 목적 외에도 노동력의 확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가족경영으로 꾸려지는 농업 상황에서, 1인의 노동자 증가는 정말 절실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우리목장은 가족경영이 아니기에 국제결혼으로 노동자를 영입할 필요는 없다. 동성애자인 나에게도 참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나의 가정은 비행기 타면 갈 수 있는 캄보디아보다 더 멀리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8. 성당
나는 이곳 옥천에서 나의 삶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비록 이곳에 내려온 것은 적극적인 나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은 현재진행형이니 앞으로 ‘가정’도 진행하고 싶은 바람이다. 가정의 시작은 바로 ‘결혼’아니겠는가. 나의 결혼식은 나의 부모님이 만나고, 결혼한 곳. 우리 4남매가 세례를 받고, 유년시절을 보낸 곳. 나의 조부모님들의 장례식을 치룬 곳인 옥천의 자그마한 천주교성당에서 했으면 한다. 퀴어인 나의 삶의 무대도 우리가족의 무대와 같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우리가족 통과의례 필수코스인 이곳 성당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가끔씩 LGBT관련 뉴스들을 보면 대한민국보다 천주교에서 더 빠르게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그것은 안타까운 동시에 나에게는 기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조건은 정말 훌륭하지 않는가. 커밍아웃한 아들을 쿨하게 받아주는 가족이 있고, 평생 원하는 일을 할 직업도 있다. (아마도)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합법적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장소도 있다. 심지어 난 이쁘기까지 하다. 친구사이 고문이자 게이바 프렌즈 사장님 정남언니도 인정했다. 근데 남자가 없다. 이것이 단지 내가 서울이 아닌 곳에 사는 게이이기 때문인 것일까? 내가 동성결혼을 못하는 이유이다.
글, 사진 - 김호미, 오픈리 시골게이 http://instagram.com/homie_kim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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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몰랐던 호미의 면이 정말 많았네~~ 아 정말 멋지다!!! 재미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