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학교 1학년의 설렘을 안으며 들었던 음악 감상법 첫 시간에, 교수님은 우리에게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음악가로 성공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겠다.”
놀라운 비법이 아닌가? 우리 모두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분의 위대한 입술에서 나오는 비법을 듣고자 모두 침묵하고 있던 그때,
“음악가로 성공하려면 두 가지의 요건 중 하나만 갖추면 된다. 하나는 유대인이 되는 것이고, 하나는 동성연애자(틀린 어휘이나 당시의 느낌을 살리고자 이 표현을 썼다.)가 되면 성공한다.”
귀를 의심할 수 밖에..유대인은 어차피 될 수 없으니 그렇다 쳐도, 동성연애자가 되라니. 일동은 모두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교수님은 2학기 초 불미스런 스캔들로 인하여 강제 퇴직 당하셨고 나중에 들은 풍문으로는 노래교실을 운영하며 지낸다니, 그분도 동성‘연’애자는 아니었구나 싶었다.
유대인 중에 성공한 음악가들은 꽤 많다. 우리가 ‘결혼 행진곡’의 작곡가 (원래는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에서 나오는 10번째 곡)로도 잘 알고 있는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부터 현대의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1942~현재/피아니스트, 지휘자)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클래식 장악력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반면 동성애자 중에서 성공한 음악인들을 찾자면, 스스로가 게이라고 밝혔던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작곡가, 지휘자)이나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작곡가, 지휘자)을 제외하고서는 손에 꼽을 지경이다.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왜 차이코프스키를 비롯한 작곡가들은 제외하느냐?"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그들 스스로가 "나 동성애자요."라고 밝힌 것은 아니었으며, 현재 밝혀지고 있는 부분도 후대의 음악학자들에 의해 그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을 뿐이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아직도 연구 진행형이다.)
처음 소식지팀에게 제의를 받았던 건 클래식 속에서 퀴어적인 면을 찾아내는 것이었지만, 솔직히 그걸 밝혀내기란 쉽지, 아니 아예 불가능하다. (차라리 음악분석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의 Symphony No. 4 in f minor 1악장의 첫 시작을 알리는 미친듯이 포효하는 강렬한 금관의 도입부와 오로지 현악의 피치카토(줄을 뜯어서 소리를 내는 테크닉)로만 연주하는 아기자기한 3악장을 두고 그 누가 차이코프스키가 T냐 B냐를 논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우리를 그렇게 혐오해 마지않는 기독교와 게이 작곡가들의 관계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이야기하고자 한다.
▲(좌)벤자민 브리튼 / (우)레너드 번스타인
자기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밝힌 작곡가들의 대부분은 현대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비중이 많다. 그러면 왜 소위 바로크 시대(1600~1750)부터 고전시대(1750~1827)를 거쳐 낭만시대(1808~1914)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커밍아웃한 작곡가는 왜 없었을까. 이는 당시 유럽사회에 뿌리깊게 내려박힌 기독교의 사상이 한몫하고 있다.
서기 392년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유일한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직후 수세기 동안 기독교가 음악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우리가 쓰고 있는 도,레,미,파,솔,라,시 의 계이름도 ‘성 요하네스 찬가’라는 기독교 음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그 영향력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으리라.
현대에도 그렇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동성애자를 보는 시각은 그렇게 곱지 않았다. 중세시대에 그 악명 높은 ‘마녀사냥’에서 과학자, 마술사들과 더불어 동성애자도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던 사실부터 해서, 현재까지도 계속 연구중이긴 하나, 우리가 동성애자로 알고 있는 몇몇 작곡가의 경우 장티푸스로 죽은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1828)가 매독으로 사망했다는 가설이나, 장티푸스로 죽은 차이코프스키가 러시아 정교회측의 사주를 받아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가설 등이 바로 당시 사회가 동성애자를 그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만한 게 장티푸스인가 보다.)
아이러닉하게도 동성애자라고 알고 있는 작곡가들의 대부분의 작품을 유심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기독교 음악 장르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몇몇 작품들은 작곡가 최고의 기량이 반영된 작품들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엄청난 천재성을 자랑하는 작품들도 있다. 슈베르트의 Deutsche Messe (독일미사)와 Mass in E flat major, (개인적으로는 그의 Mass in G Major를 좋아한다. 물론 지휘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포레(Gabriel Urbain Faure, 1845~1924)의 Requiem 같은 작품들이 그러한 작품들이다. 심지어 종교음악은 전혀 작곡하지 않았을 듯한 차이코프스키도 ‘천사의 찬송’을 비롯한 9개의 종교음악 소품을 남겼으며, 특히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에서 천사(보이 소프라노)가 노래하는 장면은 감동을 넘어, 소름끼치도록 아름답기 그지없다.
▲(좌)프란츠 슈베르트 / (우)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동성애자를 죄악시하는 기독교에서, 오히려 신을 찬미하고, 경배하는 음악을 남긴 이러한 작곡가들의 모습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마태복음 5장 45절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심이라. (마태 5:45)
동성애자들은 모두 죄인이며 악인이라는 당시 사회의 낙인 속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못하며 - 특히 파리 국립음악원 원장이었던 포레나,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교수이기도 했던 차이코프스키 같은 - 공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스캔들이 따라다니며 사회의 악인, 죄인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겨야만 했던 그들에게 모두에게 공평하며 정의로우신 하느님. 그들은 그러한 하느님을 기억하며, 그러한 하느님께 드리는 음악을 작곡하여 스스로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윌리엄 크리스티 (William Christie, 1944~현재/지휘자, 하프시코디스트)가 A life in music에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난 후, 연주했던 곡이 바로 샤르팡티에 (Marc-Antoine Charpentier, 1643~1704)의 Te Deum(주님을 찬양하라) 였다. 트럼펫과 팀파니의 위풍당당한 선율을 앞세우며, 마치 제왕의 풍모를 뽐내며 지휘하는 그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그를 기념했다. 모두에게 공평하며 정의로우신,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의 모습에 그 누가 감히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지_보이스 지휘자, 음악가/ 노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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