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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람 사이의 터울 #6 : 인간적인 후일담
2014-07-25 오후 15:2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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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7월 
 
 
사람 사이의 터울 #6 : 인간적인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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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화
 
맑고 깨끗하고, 때 타지 않은 것들을 보면 불경한 마음이 든다. 내가 나서서 더럽히고 싶은 게 아니라, 나 아니더라도 언젠가 저들이 세상을 치르며 저 순정함을 잃고 말 것이 머리에 훤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젠가 누군가에겐 손을 타게 될 것이므로, 더럽힐 주체가 나이어도 크게는 상관이 없는 게 된다. 그렇게 영문을 모르는 꽃띠와 세월을 넘은 아저씨와의 계약이 성사된다. 
 
게이, 라는 게 무언지 몸을 통해 먼저 알아갈 무렵 내가 만난 많은 아저씨들이 있었다. 내가 특별히 중년 취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무슨 번듯한 연애보다는 그냥 너와 나의 몸이 궁금했고, 세상이 전반적으로 가르쳐주지 않는 이 동성연/애의 정체가 괴롭도록 의문스러웠다. 그런 내 상태를 위무하는 데엔 또래보다 손윗사람이 적합했다. 그들에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이들과 만난지 30분 만에 알몸 앞에 서로 동등해지는 듯한 느낌이 나는 좋았다. 나는 그때 나이를 동경했고, 나이를 농단했고, 나이를 이용했다. 내가 가진 무신경은, 아저씨들이 내 몸을 만질 메리트와 교환될 수 있었다. 그렇게 영악한 뉴페와 세월 앞에 백치인 늙은이와의 계약이 성립되었다. 
 
1990년대 말에 이 바닥에 눈을 뜬 초짜 게이의 특장이라면 그런 것이었다. 나는 여느 영화관이나 게이바나 찜방이나 터미널 화장실이 아니라 채팅으로 만난 아저씨들을 통해 이 바닥을 처음 접했다. 1:1의 익명성과 간편함은 곧 한번 섹스하고 버려질 관계가 끝도 없이 양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시절 나에게 게이는 크리넥스처럼 한번 국부를 닦고 버려지는, 그래야 마땅할 휴지조각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게이씬의 범주 안에서 나는 내가 가진 불안함을 연료로 하는 도락의 장소들을 자꾸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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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말이 안되는 환경이라고 해도, 그곳에 오래 머무르게 되면 자연히 요령머리가 생긴다. 덜 상처받는 방법, 덜 귀찮은 방법. 순정함을 지키는 것보다 순정함을 겹겹이 지워내는 것이 어릴 땐 더 재밌다. 그것들을 지우고 난 세상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게이가 많이 드나드는 일반 사우나 통로에 써있는 “동성연애 변태 사절” 문구를 마음에 거리낌 없이 지나칠 수 있게 되었다. 익명으로 몸과만 얽히는 그 속에서의 관계가 차라리 사해평등적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말이지만, 낯선 이들의 몸매를 만질락말락하며 몇십 분을 들여 상대가 ‘만져질’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는 그 모든 기벽들이, 적어도 그 때는 스스로 ‘인간답고 싶’기 위해 노력한 결과들이었다. 그곳에 누워있던 일군의 게이들이 벗은 몸을 뒤틀며 누구에게 만져지길 밤새도록 기다린 까닭은, 그들도 잠시나마 ‘사람’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보다 더 인간다울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게 한이 되었기는 했지만. 
 
그렇게 “굴러먹었다”는 말의 실질적인 내용을 겪어갈 동안 나는 전반적으로 나와 타인에게 무던해졌다. 모르는 아저씨의 팔을 붙들다 이 호모새끼연하면서 사갈시되는 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게이섹슈얼리티를 공개된 장 속에서 어떻게 착근시켜야 할지 아무 대책이 없는 사회도 뭐까짓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스스로 무슨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자꾸 불투명해져만 가는 내 자신도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이해가 안되는데 다른 무언가를 이해 안된다고 닦아세울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은 나와 세상 모두를 불투명하게, 모호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희한한 말이지만, 그 때는 그런 눈가림이 내가 그나마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부연 세상을 나는 그런 식으로라도 창조해내고 싶었다. 그런 것이 곧 20대 초반 때 내가 겪은, 이제 뭘 좀 아는 것 같은 “사회화”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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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품화
 
 
벗은 몸으로 남자들을 오가는, “사람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그 때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보다 예민하지만, 또 무엇보다 둔감하기도 하니까. 지금에 와선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는 것들을 그 때의 나는 잘도 버티고 살았던 것이 분명했다. 괴롭다는 걸 가끔은 크게 알았지만 대개는 몰랐다. 앞서 말했듯이, 오래 머무르다 보면 요령머리들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그러는 동안 요령을 집대성해놓은 듯한 게이 매칭 어플이 나왔다. 정확한 수치와 사진을 통해 초면의 상대에 대한 정보를 경제적이고 집약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게이씬은 보다 유비쿼터스해졌다. 특정 장소나 특정 구역에서만 접할 수 있던 남자의 몸들이 잠드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각에 손바닥 위를 둥둥 떠다녔다. 그렇게 규모의 경제가 달성되었으므로 어플 속 남성들은 급격히 상품화됐다. 조심스런 문자가 차단으로 응답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사진을 먼저 공개하고 차단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사진을 믿고 만난 자리에 다른 사진이 앉아있던 일은 양손으로 다 못 센다. 하지만 그 중 태반이 가짜란 걸 알면서도 당장 눈앞에 떠다니는 얼굴과 몸들을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어쨌든 전의 환경보단 ‘쾌적’했기 때문이다. 연중 공기청정기와 BGM을 틀어주는 대형 마트의 내부처럼. 그곳에서 딴 물건을 고르는 것도, 그러면서 그 물건 중의 하나가 돼보는 것도 어쨌든 짐짓 쿨하고 ‘쾌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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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중에 나도 몇 명의 사람을 만났다. 이전과 같은 익명의 남자가 아니라, 눈코입이 붙어있고 말을 할 줄 아는 사람. 그 사람들과 이따금 연애란 걸 해보고도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런 인간관계를 배워본 적이 없었으니까. 좋아하는 감정만으로 연애를 할 수 있다는 소리는 내게 흡사 단군신화처럼 들렸다. 나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스스로 인간다워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한 아이를 만났다. 내가 순정함을 겹겹이 지우면서 내가 순정할 때 만났던 아저씨들의 바로 그 모습을 닮아갈 동안, 내가 그렇게 되기 전의 모습과 가장 많이 닮은, 나보다 몸집이 커다랗던 갓 스물의 초짜 게이를.
 
우리는 뚝딱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손을 잡고 섹스를 하고, 밥을 먹고 산보를 하고. 좋아함의 수명을 가늠할 실력이 없었던 나는 한 달 후 결별을 통보했다. 소싯적 내게 굳은 얼굴로 그만 만나자고 했던 아저씨들의 표정을 지어가며. 헤어지던 길에 그는 내게 안겨 한참을 울었고, 나는 그 아이의 덜미 너머로 건물 벽들이 푸르게 젖어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순정을 몇 번이고 지워낸 자리에 남은 뭉툭한 자국이 속으로 말했다. 이런 것에 너도 점점 익숙해질 거라고. 그런 게 내가 겪은 이 바닥의 법칙 같은 거라고. 그리고 나는 이내 내게 친숙한 사회와 시장으로 돌아왔다. 
 
몇 달이 지나고 그 아이가 어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따금 몇 마디도 나누었다. 그는 이 곳의 생리에 지친다는 말을 했다. 사진만 보곤 채팅 중에 차단하는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요?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거예요? 부들부들 떠는 그의 메세지를 보며 나는 소싯적 나만큼이나 거대했던 그 아이의 몸집을 생각했고, 그 속에서 느꼈던 갖가지 소외를 복기했고, 그것들 모두가 다른 것과 더불어 무던해져가던 세월을 떠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여긴 원래 그런 곳이라고. 그러니 자기 능력껏 자기 좋은 사람 찾아 만나면 되는 거라고. 그의 하소연은 이후에도 몇 번 반복됐고, 그 때마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 모호한 말로 되받았던 것 같다. 그리곤 어플 내 수다한 채팅창이 그랬듯, 그 아이의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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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년 남짓 되던 날, 그 아이의 카톡 프로필에 모친이 올린 부고가 떴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며칠 전 그의 SNS엔 인간관계에 얽힌 스트레스와 함께 안면마비 증상을 호소하는 포스팅이 있었다. 그 즉시 페이보릿 되어있던 그의 어플 프로필에 들어가보았다. 한 인간이자 하나의 상품이고자 했던 그의 필사적인 사진과 글귀가 그 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견딜 수 없어 그의 프로필을 블락했다. 장례식엔 차마 가지 못했다. 내가 떠들던 바대로, 그 모든 것들에 무던할 능력이 모자라서 사회진화론적으로 도태된 내 전 애인의 영정을 맨정신으로 도저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망자를 둘러싼 온갖 망집에 시달렸다. 내가 눈감고 조금만 더 오래 사귀었더라면 그 아이가 죽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아이가 게이 인간관계 문제로 그렇게 괴로워했을 때 내 지난 날을 떠올리며 조금 더 상냥하게 말했더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내 스스로도, 내 과거들을 그렇게 살갑게 대우해준 적이 없었다. 그건 그저 처음부터 그랬던 거였고 그런 줄로 알았고, 그냥 거기에 맞춰 살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 때 내가 생각했던 사람다움과 아름답게 상품화된 시장에서 적당히 살아남는 법 같은 요령들과, 이 정도면 되었지 하고 체념했던 세상의 소외, 그 모든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는 광경을 보았다. 내가 터무니없이 낮게 잡았던 인간다움의 기준과 세상에 대한 기대가, 그렇게 한 아이가 죽어가도록 방조한 힘의 일부가 된 것이었다. 
 
나는 그 일로 어딜 가서 울부짖은 적은 없다. 다만 끝도 없이 멍했을 뿐이다. 자신의 예민함을 제 손으로 닫은 이들은 다가오는 충격에도 무디게 반응한다. 그저 무딘 채로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오는 것이다. 다만 별안간 친구사이에 나가고, 비교적 긴 연애를 어렵게 시작하게 된 것은 모두 그 일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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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빚
 
 
맑고 깨끗하고, 때 타지 않은 것들을 보면 불경한 마음이 든다. 젊은 날 내가 깨끗했을 때 조금더 현명하게 살지 못했던 것이 참을 수 없이 후회스럽고 질투가 나기 때문이다. 또 어렸을 적에 내가 당장 인간답고 싶어서 안으로 무너뜨렸던 사람다움의 기준과, 당장 세상과 화해하고 싶어 이지러뜨렸던 세상에 대한 기대치에 대해, 이제는 애인과 한 집에 지낸 지 반 년이 된 지금에도 그 후유증에 조금씩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조용히 깨달을 때가 있다.
 
그래도 이따금 새로 찾은 행복들 속에서 문득 연하게 피어오르는 연약한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 예민함을 누구보다 닮았던 죽은 옛 애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사람이 누려도 좋을 행복 하나를 짓는 데에 얼마나 많은 세상이 필요한지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게 난 그 이후의 목숨을 빚지며 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 연약한 순정을 없었던 것처럼 짓까부르던 세월을 영원토록 복기하며 살라는 뜻으로 말이다. 돌이켜보면, 사는 게 다 빚이다. 
 
 
 
* 위의 사진들은 2006-2008년경 피쳐폰 카메라로 촬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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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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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14-07-29 오전 09:12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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