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 말이면 친구사이는 워크샵을 갑니다. 워크샵을 소개할 때 사무국에서 꼭 강조하는 게 있지요. ‘엠티’가 아닌 ‘워크샵’이라구요. 무슨 까닭일까요?
워크샵은 보시다시피 엄청난 스케쥴을 자랑합니다. 정말로 저 게임과 강의와 토크쇼와 토론과 기타 행사들이 숨가쁘게 이어집니다. 심지어 밤새 술마시고 난 다음날 아침의 1시간 30분 가량의 토론도 지체없이 진행됩니다. 그러니 정말로 ‘워크샵’인 셈이지요. ‘엠티’처럼 너끈히 좀 쉬기도 하고 물구경도 할 염으로 따라나선 회원들은, 무려 버스 안에서 진행되는 6월 정기모임을 보고는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도 신입회원 소개, 소모임 동정 소개, 6월 중 활동 보고 등, 매번 정기모임 때 반복되는 절차는 차례차례 생략 없이 이어집니다.
2시간 가량 달려 목적지인 양평에 도착합니다. 기존의 커플들을 가차없이 끊어놓는 조 배정이 끝나고, 잠시 쉰 다음 족구장으로 모여 분위기를 돋우고자 몇 가지 조별 게임들을 합니다. 기억나는 것은 경험한 연애 횟수 순으로 줄세우기를 하는 게임이었는데요, 게임에 몰입한 몇몇 회원들이 자신들의 가공할(!) 연애 횟수를 커밍아웃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펜션 앞의 계곡에서 친구사이의 코팅된 로고 조각을 찾는 보물찾기 게임을 합니다. 상근자 낙타가 친히 꽁꽁 숨겨둔 보물찾기는, 실로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했습니다. 30분 가량 눈이 빠지게 계곡을 스캔한 몇몇 회원들은, 보물 숨긴 사람을 데려오라며 으르렁거렸습니다. 있는 돌이란 돌은 모조리 뒤집는 회원도 있었고, 몇몇 회원은 찾기를 포기하고 물놀이에 매진하기도 했습니다. 1시간 만에 매의 눈을 가진 회원들의 도움으로 모든 보물이 수거되었습니다.
잠시 쉰 후에 저녁 준비를 했습니다. 메뉴는 제육볶음과 된장찌개였습니다. 제육볶음 양념은 종로3가의 ‘풍년집’에서 도와주셨고, 배추김치는 ‘국수와지짐이’에서 협찬해주셨습니다. 저녁 준비 풍경이 여느 ‘엠티’와 또 달랐던 것은, 음식 준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주방이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겁니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협조 끝에 그럴싸한 저녁상이 차려지고, 허기진 상태였기에 음식들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때마침 쏟아지는 폭우로 흐려진 투명 천장 아래서의 식사는 퍽 운치가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첫번째 행사는 비폭력 대화의 의미와 요령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상담을 전공하시고 iSHAP에서 활동중이신 훈남 강사님의 강의가 2시간 가량 이어졌습니다. 조금은 닭살돋는 대화이기도 했지만, 평소에 각자가 대화를 통해 상처받았던 기억을 서로 나누는 과정에서 저마다 많은 공감과 치유를 받을 수 있었고, 말이 주는 상처를 한번쯤 되짚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각자의 욕망(!)을 강의에서 배운 ’관찰’, ‘느낌’, ‘욕구’, ‘부탁’의 4단계로 표현해보는 시간도 가졌지요. PPT의 서두에 소개되었던 아래의 글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의 후 곧바로 토크쇼가 가열차게 이어졌습니다. 바로 친구사이의 왕언니 갈라 회원의 순서였습니다. 핸드폰에 마이크를 댄 격조있는 음악이 흐르고, 대표님과 오늘의 주인공께서 착석하셨습니다. 버스 안에서 사전에 받은 질문을 추린 게이라이프 전반에 관한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4-50대의 게이의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를 비롯, 예전의 게이씬과 지금의 게이씬 사이의 변화, 연애 경험담에 관한 이야기 등, 솔직하고 노골적인 질문들을 뼈있고 노련하게 대답해가시는 모습이 멋있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으셨을 선배 게이가 전하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핑계로 할일을 미루지 말고, 각자의 커리어에서 뚜렷한 성취를 거둘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말씀이 특히 마음에 남았습니다.
연이은 스케쥴에 간혹 지친 기색의 회원도 있었지만, 잠깐의 휴식 시간 후에 친구사이의 가치와 비전을 소개하는 다음 행사가 지체없이 이어졌습니다. 현재의 친구사이 가치와 비전이 어떻게 정해졌고, 앞으로 수정될 방향이 어떤 것들인지에 대한 T/F팀장 박재경 회원의 발표가 있었고, 다음으로 지난 20년간의 친구사이의 활동을 축약해 살펴보고, 2-3년 사이에 회원수가 폭증한 데 비해 CMS 자동이체 후원이 올해 들어 감소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상근자 낙타 회원의 발표가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사이 홈페이지의 역대 접속자수와 가입자수, 기타 정보들을 통해, 새로운 인터넷 환경에 발맞춘 SNS 홍보의 중요성을 조리있게 설명한 웹 관리자 디오 회원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세 분 연사 모두 알찬 내용과 수려한 PPT 기술로 박수를 받았습니다.
4시간에 걸친 마라톤 행사가 끝나고 드디어 짝을 지어 펜션 주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는 달빛 데이트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대화의 주제는 친구사이의 활동이나, 이태원 문화에 대한 의견 등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평소에 마음에 들던 상대가 짝으로 정해질 경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모두들 2-3명씩 달빛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30분 가량 가졌습니다.
드디어 모두가 기다렸던 뒤풀이 시간입니다. 두부김치와 햄볶음, 소주와 맥주가 근사하게 차려지고, 건배 후에 모두들 놀라운 속도로 술을 마시기 시작합니다. 생각보다 늦게 시작하는 술자리인지라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취하게 됩니다. 중간에 생일을 맞은 회원들을 축하하는 깜짝 케잌 파티와, 왕언니 갈라 회원의 ‘낙원동 블루스’ 공연도 소소하게 이어집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쾌활하게, 회원들의 수다가 어우렁더우렁 이어지며 앙평의 밤은 깊어갑니다.
이튿날 아침은 늘상 숙취로 머리 한쪽이 끈적합니다. 라면과 수박으로 해장을 하고, 부은 눈으로 워크샵의 마지막 순서, “나와 친구사이”라는 제목의 토론 시간을 갖습니다. 보통 ‘엠티’ 같으면 늦잠으로 누워있어야 할 시각에, 회원들은 부은 눈을 이끌고 친구사이가 게이 공동체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무언가를 끄적입니다. 이윽고 취합된 바람들을 조별로 발표하며, 게이로서의 삶과 친구사이의 미래에 대해 각자의 상을 그려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비가 싹 그치고 초여름 볕이 청명한 아래에서 회원들 모두 익살스런 표정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종로로 돌아가는 버스를 탑니다. 버스 안에서 사람들은 예외없이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듭니다. 이렇게, 폭풍같았던 워크샵 일정이 마무리됩니다.
물론 이게 진짜 마무리는 아닐 지도 모릅니다. 끝나고 바로 종로에 남아 워크샵 뒷풀이(!)로 술을 먹는 회원들도 적지 않게, 아니 충격적으로 많이 존재한다는 것은 놀랄 일입니다. 대단한 사람들…
이제 왜 이 행사가 ‘엠티’가 아니라 ‘워크샵’인지, 눈치를 채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좀 과하다 싶게 빡빡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성심껏 놀고 참여해주는 회원들의 모습이 때론 아연하기도 하고, 때론 뿌듯하기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게이 문화권 아래에서 이런 환경 아래 사람을 만나고 함께 일하고 놀 수 있는 터전이 드물지 않느냐는 이야기에, 방금까지 술취해 떠들던 신입 회원이 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친구사이가 여태까지 어떻게 이어져왔는지를 조용히 드러내주는 방증 같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매번 워크샵 때마다 그들이 보여주는, 믿을 수 없이 강철같은 체력들과 함께 말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더는 혼자가 아닌 인간들 속에서 뿌리내리고 성장한다. 활기차게!
비폭력대화법 강의에서 처음 짚고 넘어간 그 글에 이 워크샵의 모든것이 축약되어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