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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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소를 공유하고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히 피난처를 확보하고 거기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새로운 공통의 삶의 형태가 등장할 것이며 그 삶의 형태 속에서 인간은 체제의 원료로 동원되기를, 동시에 체제의 쓰레기로 내버려지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 무대가 구현하는 삶-이야기이다.
심보선,시인 (99%를 위한 주거 중)
이십여 년 전으로 기억을 돌려보자.
1995년의 어느 봄날, 나는 처음 친구사이 사무실을 방문했다. 국내 '유일'의 게이 단체라는 이름에 비해 누추하기 짝이 없던 자취방 같은 곳에 젊은 남자들이 복닥거리며 앉아 있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얼마나 심각한 회의를 하고 있었는지 몰라도 그네들은 누군가의 방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고, 나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곧장 방 한구석에 구겨져야 했다. 그전까지 게이빠 등에서 주로 보던 가족적이고 끈적거리기까지 하던 환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날 친구사이 사무실에 있던 이들 중 절반은 나 같은 신입이었고 오래된 회원이라고 해봤자 겨우 일 년차가 최고였을 테니, 분위기가 어색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나 싶다. 아무튼 그렇게 몇 시간 땀 냄새를 참으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기분이 좋을 순 없었다. 두 번 다시 친구사이를 찾는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친구도, 애인도 없던 지역 출신의 이십대 게이가 갈 수 있는 곳이 그다지 많진 않았다. 몇 달이 지났을까, 나는 다시 친구사이를 찾고 있었고, 그로부터 이십여 년 동안 친구사이 사무실은 직장만큼이나 자주 들락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 곳에서 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풍성한 인간관계를 경험했고 다양한 활동과 고민 속에서 새로운 가치들을 배우면서 때로는 날카로운 아픔을 때로는 벅찬 감동을 누려왔다.
▲연남동 기사식당 골목에 있던 친구사이 첫 사무실 현재 모습.
굴레방 다리를 끼고 있던 한적했던 주변은 맛집들과 카페들이 있는 번화가로 변했다.
1. 연남동, 소녀시절
1994년 초, 친구사이가 설립될 당시엔 사무실이 없었다. 듣기엔 화곡동 어느 회원의 집을 임시 사무실로 썼다 한다. 그러다가 그해 9월 마침내 친구사이는 마포구 연남동 기사식당 골목에 첫 사무실을 얻게 된다.
홍대입구역 주변이 지금처럼 화려하지 않았던 시절, 한적한 주택가를 따라 굴레방다리를 통과하면 보이던 붉은 벽돌 건물 2층에 친구사이 사무실이 있었다. 연남동 사무실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방 하나와 거기에 딸린 좁은 다용도실 하나가 전부였다. 사무집기래야 책상과 책장 하나씩, 그리고, 앉은뱅이 책상하나가 전부였고 방에는 열 명 정도 둘러앉으면 꽉 차서 보통 두 겹으로 돌려 앉기는 기본, 세 겹 네 겹 씩 둘러싸기도 해서 가운데에 정말 손바닥만한 공간만 남긴 채 벌집 모양으로 둘러앉기도 했다. 한 명이 일어나서 화장실에라도 갈라치면 정말 주위 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연남동 시절의 사무실 입구 현재 모습
정기모임이 있던 날이면 사진속의 복도와 계단은 신발가게 처럼 알록달록한 신발들로 가득 차곤 했다.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면(그때는 월례회의라고 했다) 방안에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지금의 이태원 클럽 앞에 사람들이 늘어서 있듯 수십 명의 게이들이 건물 앞에 서서 담배를 피거나 잡담을 하는 광경을 연출하곤 했었다. 하도 떠들어서 동네 주택가에서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초라했던 사무실도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건 아니었다. 회원들이 십시일반 사비를 털고 일부 독지가나 해외의 동성애자 교포단체에서 후원까지 받아서, 어렵사리 마련했다. 초창기의 친구사이 회원들은 독립하지 않은 청년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알바를 하던 대학생들이나 갓 직장생활을 시작한 직장 초년생들이 그나마 사무실의 재정을 보살펴야 하는 책임까지 떠안고 있었다. 당시 직장에 다니던 회원 중 한 명은 친구사이 사무실을 마련하느라 월급의 상당부분을 밀어 넣고는 점심 값이 없어서 매일 점심시간이면 직장동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컵라면을 사먹었다는, 눈물겨운 일화도 있다.
2. 성수동, 으스름 달빛 아래.
연남동 사무실이 3년차에 접어들면서 공간 부족을 이유로 이전 문제가 의제로 제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게이들이 주로 모이는 종로나 이태원도 아니고 서울 중심가도 아니며 월세가 딱히 저렴하지도 않은 곳에 있을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들도 있었다. 그리고 사무실에 상근하던 회원이 사무실을 거주공간으로 겸하면서 사무실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다가 당시 몇몇 회원들이 내민 뚝섬역근처(성수동) 사무실 카드가 저렴한 월세 덕분에 각광을 받았고 사무실 이전이 일사천리로 결정되기에 이른다. 1997년 4월의 일이다.
▲예전 성수동 사무실 가는 길 - 좌측으로 보이는 복덕방 지하가 친구사이 사무실이었다.
성수동 사무실은 복덕방 지하에 있던 작은 공장으로 쓰던 공간이었는데 도배를 새로 하고 가운데에 간이벽을 설치해서 회의실도 만들 수 있었다. 그 회의실에서 탑골공원 앞 집회를 위한 논의도 하고, 한국동성애자단체연합회를 결성하기 위한 다른 단체들과의 연대회의 등도 진행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성수동 사무실은 그다지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지하라서 늘 습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고 어두웠다. 사무실 밖을 나서도 골목길을 지나면 바로 천변 주차장이라 으스스하기도 했다.
게다가 넓어져서 좋았던 것은 잠시였고 pc통신 모임, 전화사서함 모임, 기타 동호회들과 대학생 모임들이 많아지면서 친구사이 방문객은 계속 줄어들어갔다. 사랑방 역할보다 운동단체로서의 성격이 부각되면서였는지 혹은 대부분 게이들의 놀이공간이 이태원, 종로였던 탓인지 회원들도 늘지 않았고 재정적인 어려움은 지속되었다.
▲사무실로 사용했던 성수동의 공간은 소규모 금속공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하지만 97년도에 친구사이가 이사오면서 붙였던 화장실 문의 안내문구는 지금도 남아 있다.
3. 302호, 낙원동 블루스
결국 성수동 시절은 일 년도 되지 않아 위기를 맞이했고, 1998년 천정남 현 고문이 대표(당시에는 회장이라 했다.)로 선출된 후 변두리에서 신세한탄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게이들의 메카인 종로로 입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드디어 그해 5월 24일 낙원동 163번지, 신아산빌딩 302호로 둥지를 옮기게 되었다.
▲신아산 빌딩이 있던 골목. 몇개 있던 게이바들은 점점 모텔로 변하고 있다.
신아산 빌딩은 여관건물을 개조한 곳으로 위치에 비해서는 월세가 정말 쌌다. 크기는 여관방 두 개 합쳐놓은 크기로 크진 않았지만 게이바들이 밀집해 있는 공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서 회원들의 데이트 장소와 놀이 공간, 그리고 일하는 공간이 합쳐진, 뭔가 현장 사무실 같은 느낌이 강했다.
낙원동 입성과 함께 친구사이는 한동안 종로 일대 커뮤니티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면서 부흥기를 거쳤다. 종로3가역이 코앞에 있어 교통도 편리했고, 이반 업소가 가까이 있어서 어울려 다니기에도 좋았다. 회원들의 놀이문화 역시 그 전에는 종로파 이태원파 나뉘곤 했는데 자연스레 종로문화가 주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 같은 가족적인 분위기 형성, 소모임 등의 성장도 다 이때부터 이루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30대 중반 이상의 회원들 대부분이 신아산 시절 전후로 데뷔를 하거나 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이다.
신아산빌딩에서 8년을 복닥거리면서 회원들 간의 크고 작은 스캔들도 많이 겪었다. 비단 사람들 간의 이야기 뿐었이랴, 신아산 사무실에는 고양이가 산 적 있었고, 비둘기들이 둥지를 틀었던 적 있으며 심지어는 귀신이 같이 살았다는 풍문도 있었다.
▲뒷편의 검은색 모텔이 친구사이가 있던 자리다.
이후 본격적인 인터넷 시대가 시작되면서 커뮤니티 단체로서의 친구사이는 상대적인 침체기를 겪었고, 한때 친구사이는 사무실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회원 수가 줄어들어 사무실 폐쇄의 목소리가 돌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3년 무렵부터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서 커뮤니티에 기반을 둔 인권단체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고 대중 활동을 벌이면서 회원 수는 늘기 시작했다.
회원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공간의 부족이 다시 이야기되었고, 일부 회원들이 주축이 되어 돈을 모으면서 한 번 더 사무실 이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2005년 도입한 CMS제도가 재정 안정에 큰 도움을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친구사이는 드디어 지금의 자리인 피카디리 극장 옆 묘동빌딩으로 사무실을 옮기기에 이른다. 늘 골목 안이나 외진 곳에만 있던 사무실이 대로변, 지하철역 입구 바로 앞으로 온다는 것 만해도 너무나 가슴 설레던 사건이었다.
4. 묘하게 끌리는, 묘동빌딩
처음 이전했을 2006년 당시의 묘동 사무실은 지금의 절반정도 크기(현재 사무공간+교태전)였다. 지금의 사정전 공간은 해피이반이라는 이반포탈업체의 사무실이었다. 해피이반 운영진이 친구사이 회원 출신이라 가깝게 지내면서 도움을 주고 받는 일이 많았는데 아쉽게 해피이반은 지금 없어진 회사가 되었다.
지금 치킨 집이 있는 1층 자리는 당시엔 삼겹살과 와인을 파는 고기집이었고 밥도 깔끔하게 나오곤 해서 이전 초기엔 거기서 주로 저녁을 해결하기도 했었다. 처음엔 사장님이랑 종업원들과도 꽤 친했었다. 하지만 언젠가 에어콘 실외기를 옥상에 설치하다가 사장님이 무리한 요구를 해서 대립한 적이 있었고 이후 식당으로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그 고깃집은 문을 닫았다.
한편 상근자 체제가 정비되고 회원이 늘어나면서 사무공간과 커뮤니티 공간이 분리될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친구사이 소모임으로 출발한 지보이스의 규모가 커지면서 연습 공간 부족 역시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지보이스는 이프보이(해피이반의 후신)이 나간 빈 사무실에(현 사정전) 건물주 몰래 들어가서 사용하기도 했었다. 결국 치열한 고민과 논의 끝에 사무실을 확장하기로 결정했고 여러 회원들이 십시일반 돈과 아이디어를 모아서 공사를 시작했다. 거울을 설치하고 벽공사를 새로 했으며, 창고도 만들었다. 인테리어와 조명도 시간을 두고 조금씩 정비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사무실이다.
▲2006년 5월, 현재의 묘동 사무실로 이사하던 날.
집이 좋은 이유는 그 장소가 의식주를 제공해주는 공간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집에 들어가는 길목의 낯익은 풍경, 대문의 색깔과 벽지나 천장의 느낌, 채광의 정도나 방향, 가구의 냄새, 익숙한 소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공간을 같이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교감이 나를 위로하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교감은 내가 그곳을 ‘집’이라고 이름 붙이고 의미를 주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일일 것이다.
친구사이 사무실도 그런 공간이다. 누군가의 업무 공간, 탐색과 학습의 공간, 상담의 공간, 회의와 모임의 공간인 친구사이는, 동시에 그들 중 누구에게나 커뮤니티와 소통 하는 창구이자 위로와 재충전의 ‘집’이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래서 나는, 우울할 때도 기분이 좋을 때도 친구사이 사무실과 만난다.
(사족 : 사무실 이전사를 정리하면서 든 생각)
친구사이 사무실 이전사는, 장애물을 만날수록 작은 눈덩이들이 조금씩 보태지면서 커져가는 눈사람 만들기와도 비슷했던 것 같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공간과 일을 줄이기보다는 사업을 더 늘리고 그렇게 늘어난 사업에 사람들과 자원이 붙게 되면서, 결국 늘어난 자원이 자연스레 공간을 넓혀 왔으니까.
지난 달 정기모임 토론회는 사무실이 비좁아서 옥상공간을 활용해서 열었다.
어쩌면 조만간 또 눈사람 만들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오지 않을까하는 기분 좋은 설렘을 가져본다.
<친구사이 20년史 톺아보기> 연재 순서
#01 성소수자 인권운동, 문을 열다 - 1994~1997 친구사이 발족 및 초기 활동
#02 당연한 권리를 위한 운동 - 2007~ 차별금지법 투쟁, 아이다호 캠페인
#03 자긍심의 절정을 보여주다 - 2000~ 퀴어문화축제
친구사이 운영위원 / 코러스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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