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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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감상평]
버스타고 함께 떠나요. - 뮤지컬 <프리실라>
by 고래밥
고등학교 3학년 즈음일 것이다. 방송부하는 친구와 친해져 친구에게 ‘시나리오 한번 써 볼래?’ 라는 제안을 받아, 글재주도 없고 그저 문과라는 이유 하나로 고등학생들이 나가는 영화제에 출품할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있다. 대충 내용은 남학생 둘이 사귀다 부모 반대 때문에 함께 외국으로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작품이 어디에 나가거나 하진 못했다. 이유를 찾자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이해보다는 배척에 가까웠던 분위기에 있을 것이다. 글을 쓴지 십년이 지난 요즘,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인 인지가 늘어남을 느낀다. 방송이나 공연예술에서도 동성애코드가 인기를 얻기 위한 장치처럼 사용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던 중 <프리실라>라는 동성애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뮤지컬이 공연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공연을 접하게 되었다. 3인의 개성 강한 드렉퀸이 ‘프리실라’라는 버스를 타고 시드니에서 엘리스까지 2,876km의 거리를 여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친구와 떠나는 여행에서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똑같이 벌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옆에 여자친구 때문에 억지로 끌려온 남자의 욕지거리가 내 귀를 후벼 팠고, Go West를 외칠 때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울컥 나오기도 했다.
▲뮤지컬 <프리실라> 중 한 장면. ⓒ설앤컴퍼니
볼 것과 음악이 넘치는 화려한 쇼이지만, 분명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늙은 트랜스젠더 버나뎃과 게이지만 애 아빠가 된 틱, 넘치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아담까지 누군가에게는 보편적이지만, 누군가에는 특별한 이야기를 신나게 풀어내고 있었다. 과부사정은 홀아비가 잘 알 듯 호주의 게이나 한국의 게이나 삶의 비슷함은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내가 돌연변이 같이 느껴질 때가 있지만 함께하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다시 웃는 것처럼, 세 명의 주인공들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있었다.
버나뎃은 자신의 삶에서 온 몸으로 받아낸 상처를 치유해 온 경험을 틱과 아담에게 공유하고 그들을 보듬어 주는 역할을 했다. 호모포비아들에게 혐오와 차별을 받은 아담을 위로할 때, 겉으로는 퉁명스럽더라도 기다려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모습, 나이를 먹어도 설레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모습은 언니들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아담은 종로의 미래를 밝혀줄 끼순이들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예쁘고 귀여운지, 거침없는 행동들, 가끔 막말을 해서 그렇지 속은 여린 모습을 아담은 모두 벅차게 담아내고 있었다. 특히 아담을 연기한 그는 손끝과 발끝에서 에너지가 폭발하듯 온 극장을 가득 벅차게 만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애 아빠 틱. 결혼과 출산, 양육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과업의 압박이 은근히 시작되는 29살과 30살 사이에서 나는 ‘틱’이라는 캐릭터에 가장 흥미를 느꼈다. 게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이가 있다는 점, 그 아이가 아빠를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점, 뮤지컬을 보는 내내 흐뭇한 미소와 부러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노처녀들이 입버릇처럼 “남편 없어도, 내 아이 하나는 갖고 싶다.”라고 하는 말이 새삼 이해가 되는 요즘 ‘틱’은 내 기준에서는 성공한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주인공 모두 하나하나 사랑스럽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각각 다른 색을 지닌 세 명이 하나로 뭉쳐 더욱더 많은 색을 만들어 낸 뮤지컬, 우리 주변에서 분명 와글와글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들을 신나는 음악과 의상, 조명으로 풀어낸 뮤지컬, 150분이라는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던 뮤지컬이었다. 미운 오리 새끼도 미운 오리 새끼 한 마리만 더 있으면 살 수 있듯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셋이 모이면 뭐든 다 이겨낼 수 있고, 사랑도 찾아올 수 있다고 믿는 게이들에게 <프리실라> 뮤지컬을 자신 있게 추천한다.
당신이, 당신에게 닿기를. - 연극 <프라이드>
by 황이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것이 내게 프라이드를 느끼게 해요.”
정확하게 대본처럼 기억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제법 초반에 나온 대사인데, 커튼콜이 오르고 나서도 이 대사는 뇌리에 남았다. 1958년 영국, 동성애를 지독한 정신병이나 성도착증 정도로 여기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포비아를 양산하던 시절에, 남다른 성적지향에 대하여 홀로 고민하고 결국 그것을 몰래 숨기면서 살았던 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가 같은 지향을 가졌다고 믿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하는 말이다. 인권의 범주에까지 이야기를 가져갈 필요도 없이 누군가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사랑’한다는 확신만으로도 그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자존감도 없이 껍데기 같았던 그의 인생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는 우리 삼촌과 25년을 함께 살았어요. 25년이나. 그건 말이에요, 그건 역사가 있는 거라고요.
정말 열렬히 사랑했다는 증거인 거죠.”
이건 2014년의 어떤 날, 말 여기저기에 과격하게 욕을 섞어 마초처럼 얘기하는 어떤 이성애자(인 것처럼 보이는) 남성이 자신의 게이 친화적인 태도의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하는 말이다. 그는 규모가 꽤 큰 남성전문잡지사의 편집장인데, 그는 글 좀 쓴다는 게이에게 자신의 잡지에 ‘이성애자도 선망할만한 동성애자의 쿨한 성생활’ 같은 주제로 칼럼을 실어줄 것을 의뢰한다. 그러면서 오래 전 에이즈로 죽은 게이삼촌의 이야기를 꺼냈고, 그가 병상에 누워 마지막을 기다릴 때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던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한다.
25년을 함께 했지만 그 당시 편집장의 가족들은 삼촌의 최후에 그의 파트너가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편집장은 어린나이였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하게 한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렸고 그의 가족들은 완강했기에 그는 그렇게 생각만 해야 했다.
그에 이어, 편집장은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변했다고 말한다. ‘마초 같은 남자의 마초 같은 친구들조차 동성애적인 경험을 마치 무용담처럼 이야기한다. 더 이상 숨기고 무작정 금기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기획이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라고 글 좀 쓴다는 게이를 설득한다. 뭐 꼭 편집장이 내 스타일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뭐 그런 글을 쓰라고 하나' 싶었던 나도 설득 당했다. 말을 참 잘해.
▲연극 <프라이드> 의 관람권
“내가 뒤에서 응원할게요. 내 목소리가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연극표에, 전단지에, ‘Pride’ 라는 제목 옆에 작게 적혀있는 대사다. 아무래도 이런 것은 극의 핵심을 표현하기 마련인데, 과연 그런 것 같다. 극은 1958년과 2014년의 배경을 두고 같은 인물들의 다른 인생을 그린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고, 시대상에 따라 이 인물들의 인생은 분명 달랐겠지만, 이름, 생김새, 마음에 품은 꿈, 얽힌 관계까지 똑같은 이 사람들이 보여주는 두 시대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다른 분위기로 그려진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결국 극에서 두 시대를 크게 관통하는 것은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기 위해 스스로와 똑바로 대면해야한다는 울림이며, 극은 이러한 울림 아래 시대는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로 인해 사람들의 인생 또한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가운데에 마치 상징처럼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2014년의 런던 한복판을 장식한다.
게이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위에 언급한 대사와 그 취지로서의 맥을 같이하는 행사다. 퍼레이드 자체가 응원이다. 아직도 1958년의 그들처럼 고민하는 성소수자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속이지 않길 바라고, 그런 것을 할 수 있도록 응원하겠다는, ‘당신이 당신에게 닿기를 고대한다.’는 응원이다. 지금 이 곳에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이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으니 몰래 외로워하지 말고 ‘진짜 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어찌 보면 단순 게이코드 치정극처럼도 보이는 이 연극의 제목이 왜 프라이드였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연극 자체가 응원이다.
막이 내리고 그곳에 여운처럼 남은 것은 마치 이런 당부 같았다.
“간절하게 바랄게요. 당신이, 당신에게 닿기를.”
마치 프라이드 퍼레이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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