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를 걷습니다. 창덕궁과 종묘를 이웃하여, 전제 군주 시절의 위엄을 비웃는 듯 소일하는 노인들 사이로, 게이들이 제 옷깃을 거두는 종로 3가를 걷습니다. 이 곳의 계절은 격에 맞지 않는 고색창연함으로 가득합니다. 늦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 이 곳을 드나드는 베테랑과 뜨내기들도, 저마다 제 자리를 비우고 새 사람을 맞습니다.
밤이면 유독 밝아지는 종로의 거리를 낮에 거니는 것은 무슨 영문일까요. 꼭 먼 나라의 요정집을 들르는 것 같습니다. 어깨가 다닥 붙은 한옥처마들 가운데 불 꺼진 술집들이 버즘처럼 피어있는 곳, 매일마다 이곳에 야시장이 섰었다는 전설이 천일야화처럼 거듭 씌어지는 곳. 새벽동이 밝아오면 멀리 깔리던 는개 사이로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지던 포차의 거리들이 생각납니다.
종로를 찾은 사람도 많지만, 종로에서 사라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그들을 그리워할 새도 없이, 새 엉덩이와 새 입술을 가진 뉴페들이 흘러들어옵니다. 거듭 갱신되는 젊음의 ‘물’ 사이로, 종로의 낮거리는 참 기이하게 늙어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거리의 낙담을 어느새 닮아버린 몇몇 언니들의 공들여 늙은 얼굴이 떠오릅니다.
종로에는 게이들이 존재합니다. 매일밤 불켜지는 포차의 백열등과 훈남들, 그곳에서 아무 약속없이 아는 친구를 만날 때의 반가움과 당혹스러움, 숨막히는 일반 코스프레 끝에 허덕이며 도달한 ‘동류’와의 술자리, 그들과 나누는 은밀한 위안과 쾌감,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떤 의미라도 찾아 분투하는 몇몇 운동 단체들과, 그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또다른 자신의 일상을 개척해가는 건실한 게이들.
하지만 종로에는 게이들이 부재합니다. 동류와 만났다는 즐거움은, 동류와 만났다는 이유로 더 큰 혐오로 빠지기도 쉽습니다. 여기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를 아는 척하지 말라는, 우리는 여기 이곳에서만 서로 동류일 뿐이라는. 남자를 찾아 모여드는 부나방들 중에 적잖은 이는, 이곳 외 다른 곳에서 끝내 자신을 들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이곳은 제 욕망이 넘치다 못해 들르는 휴게소와도 같고, 공교롭게도 이곳엔 그런 휴게소의 기능에 값하는 여러 업소들 또한 더러 존재합니다. 그러다보면 여기서 만나고 웃고 떠들던 관계들이 일거에 농담같이 여겨지거나, 마치 없었던 일처럼 취급되기도 합니다. 꺼내보이지 말아야할 것을 꺼내보이는 공간의 팔자란 그런 것이겠지요. 하여 종로3가의 낮거리에는 역설적으로, 게이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게이들은 종로에 존재하지만 또한 부재하고, 존재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부재하기를 원합니다.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은, 그렇게 반투명으로 애매하게 취급당하는 처지를 견디기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낮도깨비같은 판에 내 삶을 기대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돌아서면 사라질 것만 같은 이 공간에 기대어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의 삶은 본래 한 치 앞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반의 반 치 앞의 미래가 큰 걱정없이 행복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중요합니다. 설령 오늘이 힘들더라도, 이러한 오늘이 내내 반복되지는 않으리라는, 조만간엔 또 좋은 날이 오고 말리라는, 아무 뜻도 없는 기대 말입니다. 아무 근거없는 그런 기대들은 의외로 사람이 당장 숨을 쉬고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소중한 느낌이고, 그것은 또 의외로 아주 구체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지탱됩니다.
그리고 도무지 반 치 앞도 그려지지 않는 삶이 끝없이 반복되리라 여겨질 때, 사람은 문득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게이로서 어떤 인생을 꾸려야 할지 어렴풋한 실마리도 잡히지 않는 경험은 늘 가혹합니다. 더구나 이곳에서 만났던 관계들이 누군가에게, 또 스스로에게 마치 없었던 것처럼 취급당해본 사람은, 이제껏 살아온 인생과 목숨도 그처럼 없었던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아무 기대가 없어지고, 삶이 여기서 더 이상 나아지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 때, 사람은 제 삶을 이만 제 손으로 거두고 싶다는 충동 속에 자신을 몰아넣기도 합니다.
가령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합시다, 분별없는 환대와 분별없는 적대 속에 자기를 팔고 다니는 것이, 오래 전부터 밑도 끝도 없었음에도 딱히 그걸 그만둘 수는 없었고, 무엇이 문제고 어디부터가 잘못인지 알 수도 없었던 사람 말입니다. 이따금 어금니 물고 견디던 그 힘들은 너무도 사소한 일에 무너져내리고, 그러고도 태연히 이어지던 일상들이 맨살 쓸리듯 끝날 줄 모르던 한 사람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렇게 어떤 게이가 모처럼 열린 제 마음을 결연히 거두고, 다시금 제 성정체성을 유폐시킬 저 일상의 첨탑으로 향하기 위해 이 곳을 떠나가던 무렵, 그 빈자리를 태연히 메꿀, 새로이 상처받을 이들의 고운 얼굴이, 오래 늙은 종로의 골목들 사이사이로 영문도 모른 채 매일밤 반짝이고 또 반짝이고는 했던 것입니다.
그런 낯도깨비 같은 신세를 면하고자 90년대 중반부터 몇몇 인권단체들이 이곳 종로에 터잡아 오갈 데 없는 게이들을 묶어주었고, 그보다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무지갯빛 깃발이 내걸린 소주방이며 게이바들이 종로에서, 혹은 신당에서, 혹은 을지로에서 제 삶의 근거를 찾는 게이들을 모을 등대가 되어주었습니다. 공중으로 휘발될 것만 같은 목숨을 땅으로 내리누르려 눈먼 술로 밤을 지새던 그 순간에도, 이곳 종로는 자기의 동류들과 알몸 이외의 방식으로 아쉽게나마 삶을 나눌 수 있는 터전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노력이 있어 지금의 종로는 게이들에게 다만 이내 사라지기만 할 공간이 아니라, 짐짓 정을 붙여가며 자기 삶을 비춰볼 공간으로 얼마간 자리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말마다 포차에 모여 끼를 떨고 술을 마시는 적잖은 게이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은, 그런 확신 없이는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럼에도 어떤 게이들은 여기가 끝내 낯선 곳이 되고 맙니다. 게이로서의 내 삶을 저런 동류와의 술자리만으로 온전히 대속할 수 있을까. 포차 거리에 즐비한 턱선 고운 꽃돌이들을 관상하는 것만으로 평생을 살 내 섹슈얼리티를 낙관할 수 있을까. 무엇에 제 인생을 기대본다고 했을 때 무언가 비어보이는 듯한 느낌을 사람들은 금방 알아챕니다. 이 정도로 나의 삶을 안심해도 될까. 이 정도로 내가 게이란 걸 안심해도 될까. 그들이 그런 확신을 못 가지는 까닭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 낯빛 좋고 몸 좋은 게이들 사이에서, 내가 어떻게 늙어갈지가 도무지 그려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언제까지고 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늙어갈 것입니다. 그간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게이로서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여전히 그리기 어려운 현실은, 기이하게도 종로가 지닌 젊음과 늙음의 편재(偏在)와 제법 닮아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사이로 필사적으로 늙어버린 종로 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게이로 늙어갈 저마다의 미래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누구나 젊고 싶어하지만, 이내 새로 때탈 아이들에 의해 매일밤 자리를 바꿔치는 '젊음'의 존재 - 혹은 부재 속에, 우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젊음을 너무 과신하다가 대책없는 늙음을 맞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인생을 어렴풋이 상상할 때 더 이상은 섹시하지 않아도 될 우리 노년의 생애를, 우리는 이제껏 기묘하게 방치해오지는 않았나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게이들이 여기에 존재한다고, 이것도 삶이라고, 이것도 사랑일 수 있다고, 우리도 인간일 수 있다고 외친지 어언 스무 해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하여 우리에겐 그 세월을 버틴 커뮤니티와, 그 세월을 지샌 종로라는 ‘공간’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쟁취해야 할 것은 바로, ‘시간’에 대한 대책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초년의 게이들 앞에 저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전범이 생기고, 노년의 게이들이 영원히 젊어야 한다는 주박(呪縛)이 아니고서도어떻게 구체적으로 삶을 꾸릴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적 축적이, 여기 우리 손으로 길러지고 채워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인생은 섹슈얼리티보다 크고, 삶은 사랑보다 유장합니다. 종로의 버즘핀 골목들 앞에 우리의 늙음이 부끄럽지 않을 수 있도록, 새로 커가는 기가 막힌 이쁜이 앞에 우리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허망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부디 우리의 삶이 좀더 오랫동안 의미가 있을 수 있도록, 우리가 보다 아름답게 늙어갈 수 있도록. 저와 여러분들이 마침내 시간을 이길 수 있기를 바라 봅니다.
요새 친구사이 몇 몇 회원들이 자살예방활동을 위한 준비모임을 하고 있는데 공부하다보니 나도 알게되었던 부분이 있어서 글 내용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이 글을 써 이해 바래
" 일부의 사람들 특히 언론보도에서 자살을 암시하거나 자살을 묘사할 때 낭만적이거나 문제해결의 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잘못 된 방식이래 특히 문학작품들이 이런 우를 범하는 경우도 많아서 사람들이 자살에 대해서 오해를 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기정 사실화 하고 있는 부분들도 있고 말이야
생각의 차이들이 있지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소수자들은 놀라운 융통성과 회복력"을 가진 존재들이란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할 거 같아
더불어 혹시라도 짐이 된다는 느낌과 어디에 뿌리를 박고 있는지 모르는 상처대때문에 혼자서 고민이 많은 분들은 " 친구사이 상담 게시판'에 글을 남겨 주시거나 곧 있을 정기모임에 나오셔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