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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람 사이의 터울 #9 : 기독교도와 동성애자가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
2014-10-31 오전 10: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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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0월 
 

 

성소수자이면서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당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 한다는 것은, 어쩌면 성소수자인 기독교인은 본인이 성소수자라는 것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인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또 하나의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차별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 연대(차세기연) 회원 인터뷰 : 첫 만남 그 느낌_ 레송님", <차세기연 웹진 물꼬기 1호>, 2014.9.3.  http://equalchrist.blog.me/220112464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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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성애자들은 자신을 밀어내는 기독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나는 동성애자 가톨릭 교도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통틀어 기독교라고 하므로 기독교도라고 해도 좋겠다. 내가 동성애자이면서 기독교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할 때마다 뜨악한 반응에 부딪친다. 한쪽에서는 신을 믿는다는 사람이 어찌 감히 참람된 짓에 몸을 담그고도 신앙인을 자처하느냐고 닦아세우고, 한쪽에서는 성소수자를 제대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교회와 신 안에 머물면서 무슨 비위로 신앙을 논하느냐고 따져묻는다. 
 
먼저 이 질문부터 답해야겠다. 21세기 개명천지에 왜 종교를 믿는가? 무신론자들도 얼마든지 인생의 이상을 세우고 뜻을 좇아 살 수 있는 세상이 됐는데 왜 굳이 보수적인 교리에 목매고 종교를 통해 제 삶을 설명받으려 하는가? 그에 대한 내 답은 이러하다. 종교는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대단하느냐보다, 인간의 지성이 어떠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환기하고, 그 가운데 종종 자신을 잊는 사람들의 방황과 허무를 어루만지는 노하우를 기천년 동안 쌓아온 조직이다. 몇몇 앞서나가지 못하는 사회교리들에 갑갑할 때도 많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이 잘 손쓰지 못하는, 자신의 내밀하고 영적인 부분들이 쓰다듬기고 위로받는 그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에 몸을 담근다. 이런 느낌은 인간의 지성에 과도한 기대를 거는 근대의 구성물에게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감각이다. 물론 그런 부분이 반드시 기존 종교를 거쳐서 해소되리란 법은 없겠으나, 어쨌든 이러한 까닭으로 인해 21세기 개명천지에 종교가 아직 저리 죽지 않고 펄펄 살아있는 것일 게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종교의 교리가 동성애자를 배척하고 교회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 종교의 논리 안에서 동성애자들이 인정투쟁을 벌일 이유가 있으며, 그냥 그것을 대체할 동성애자만의 다른 문화적 구성물을 만드는 게 마땅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일리있는 지적이다. 사실 급증하고 있는 동성애자 커뮤니티들은 게이들에게 실질적인 '교회'의 역할을 한다. 게이들에게도 그들만의 진리가 있을 수 있고 올바른 삶이 있을 수 있음을 체감케 한다는 점에서. 그래도 기존의 종교 안에서 굳이 동성애자를 설명받으려 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영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노하우를 동성애자에게도 허여해 달라고 거칠게 묻는 과정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이성애자가 누리는 것들을 동성애자에게 허용해달라는 평등권의 싸움에서, 인간의 실존에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까지 그것을 요구하는 과정에 다름아니고, 그래서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전자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교회가 그네들의 교리를 통해 성소수자를 밀어내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잠시 '평범한' 이성애자 신앙인의 눈으로 접근해보기로 한다. 가령 그들은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자 양심고백'류에서 드러나는 동성애자들의 성 윤리가, 과연 동성애자들의 일부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신앙인'의 이름 아래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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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동성애자들의 공분을 샀던, 네이버 웹툰 <동성애자의 양심고백>. 
이 만화는 아래에서 언급한 것 이상으로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있으나, 여기서는 이에 대한 세세한 지적은 피하고자 한다.  
 
 
 
물론 그런 부분이 동성애자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고, 또 그 '일부'가 마치 전체인양 오도되는 것은 매우 문제가 있지만, 동성애자들의 현실 가운데 저런 모습이 어쨌든 '일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이성애자들에겐 때로 낯선 윤리일 수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런 동성애 문화의 '음지적 형태'가 동성애 '자체'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에서 배태되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고 WHO에서 발표한 시점이 겨우 1990년이다. 병이 아닌 걸 병이라고 손가락질 해왔으니, 긴 세월 동성애자들은 자연히 음지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동안 동성애자들의 '존재증명'을 넘어 동성애자들 스스로 생각하는 '바른' 삶이 무언지 따위가 논쟁될 여유는 당연히 적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동성애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논쟁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동성애자들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던 '사회'의 문제에 가깝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보기에 동성애자들의 성 윤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면, '동성애' 자체의 교정이 아니라 동성애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을 교정하는 것에서 그 실마리가 찾아져야 옳다. 
 
더불어 어떤 쾌락이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 그것을 제어할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쾌락을 무작정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낫고 질좋은 쾌락의 '대안'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또한 어떤 쾌락이건 사람은 그것을 겪는 가운데 자신을 보전할 윤리의 기준선을 어느 순간에는 찾게 마련이다. 사람은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는 유약한 존재이기 이전에, 그 쾌락을 자기 삶에서 분별있게 운용할 힘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정한 쾌락을 덮어놓고 까지 않으면서, 삶 속에서 게이 스스로 분별의 감수성을 키우도록 돕는 일은, 다름아닌 게이인권운동 단체들이 음으로 양으로 지난 20년간 해왔던 일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근본적으로는 바르게 살고 싶어하고,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도록 애쓰고 싶어한다. 종교가 부여한 교조 이전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보고자 하는 순정한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고, 여기서 제각기 '바른 삶'에 대한 감각이 나온다. 동성애자이므로 애초에 올바르게 살기 틀렸다-가 아니라, 동성애자임에도 올바른 삶이 가능하고, 그것이 어떤 특정한 형태의 윤리로 성취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제대로 상상되기 시작했다. "여기 동성애자가 있다"는 존재 증명을 넘어, 동성애자의 삶에 어떤 올바른 윤리가 축적될 수 있느냐 하는, 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이제야 비로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고작 20년이 좀 넘는 세월 동안, 병리가 아닌 동성애자의 삶의 윤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쟁되고 이해될 '절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동성애자들의 삶의 모델을 만들어나가고, 그 안에서 윤리의 층위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동성애자들 스스로도 아직 완전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고, 이는 앞으로 이 시대가 축적하고 성취해나가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교회의 강고한 입장은, 그런 윤리의 구축에 소요되는 절대 시간의 부족으로 인한 '시차'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교회의 역사란, 그렇게 절대악처럼 여겨왔던 세상의 어떤 문화적 속성을 보편의 틀 안으로 천천히 품어오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에서 제사가 전면 허용된 것도 겨우 19세기 후반의 일이었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변화를 재촉하는 사람들과 더디게 확신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 시대의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모두, 후대에 유산으로 물려주게 될 어떤 고통스런 축적의 시간을 몸소 겪고 사는 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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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성애자 신앙인은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러나 사람의 인생은 짧고, 축적의 시간은 길다.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이 이해될 먼 미래를 사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런 반목이 이어지는 현재를 살고 있다. 이런 제한된 조건 가운데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마땅할까. 여기서 이 문제를 모두 떠안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아래에서는 둘 사이의 상호 이해를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는 실마리를 이야기해보고 싶다. 
 
신실한 기독교도라면, 기독교의 "원죄" 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 당연히 동·이성애자를 통틀어 - "원죄"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에서 "원죄" 교리를 주장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존재조건이 갖는 부정합의 모순과 슬픔이, 인간 상호간에 일어나는 정죄의 '분별'보다 훨씬 크고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다. 사람 사이에서 "죄"의 차등은 존재하지만, 그것보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죄"의 깊이가 신이 보시기에 더 크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이는 종교에서 바라보는 섹슈얼리티의 문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동성애자건 이성애자건, 사람의 섹슈얼리티는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것이다. 자신의 성을 알아가는 과정은 그리 즐거움으로만 도배된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걸 알아가는 과정에서, 일정한 류의 죄의식과 도덕적 혼란에 직면한다. 그런 과정들을 자신의 존재 조건 가운데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것에서 "원죄"의 착상이 나온다. 즉 원죄 개념의 핵심은 섹슈얼리티가 그 자체로 "죄"가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근본적으로 섹슈얼리티가 사람에게 얼마나 당혹스러운 문제인가를 풀어가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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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저는 제 부모님의 쾌락 중에 태어났습니다" 같은 명제는 사람에게 가장 외상적인 부분이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성, 그리고 자신을 태어나게 한 부모의 성을 한데 엮어 생각하기 어려워하고, 또한 자기가 어떻게 성을 알아오게 됐는지도 보통 반추하기 어려워한다. 그러니 어느 시대건, 성을 알아가는 것은 어떤 숨은 비의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다. 즉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원죄"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기보다 그것이 사람에게 참으로 건사하기 어려운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 부분에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사이의 '차이'보다, 그네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조건이 훨씬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렇듯 섹슈얼리티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존재의 부정합을 그야말로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통로다. 그런 모순 위에서 그것을 아우를 보다 큰 설명틀, 말하자면 신앙이 기거할 자리가 마련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성애자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동성애자의 섹슈얼리티를 정죄하는 순간, 그네들은 스스로의 섹슈얼리티를 뒤돌아보는 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즉 호모포비아 이성애자 기독교인에게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동성애자들을 공격하는 당신들의 섹슈얼리티는 그럼 '완전'한가? 거기엔 한점 균열도 모순도 없는가?"
 
당연한 얘기지만, 아무리 신앙의 이름으로 동성애자를 공격해본들, 그들의 섹슈얼리티는 조금도 '완전'해지지 않는다. 남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는 사이에, 정작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성찰하는 데 둔감해지게 되는 것이 과연 '신앙인'의 태도로서 바람직한 것인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이는 자칫 신앙이 존립할 수 있는 자신의 섹슈얼리티의 기반을, 다름아닌 '신앙'의 이름으로 소거하고 망각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니 동성애자들을 정죄하고 싶다면, 그 전에 먼저 신앙 안에서 자신의 섹슈얼리티부터 한번 되돌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과연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신께서 무슨 말씀을 건네고 계신지를 깊은 침묵 속에 묵상할 것을 권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섹슈얼리티 앞에 수줍은 존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섹슈얼리티는 물론 타인의 섹슈얼리티에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이성애자들에 비해 동성애자들이 일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조금 더' 당혹스러워하는 이들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 이상으로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성이 낯선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종교를 믿든 믿지 않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영적 속성을 일정하게 품고 사는 것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삶의 윤리가 완전하지 못한 것처럼 이성애자들의 삶의 윤리 또한 마찬가지로 온전하고 흠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서로를 '공평히' 이해하고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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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장소에서 마주치는 호모포비아 신앙인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확신에 찬 어조로 동성애자를 정죄하고, 또 그들 스스로 한 치의 의심 없이 자신을 확신하는 광경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에 잠긴다. 과연 그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과연 그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 앞에 얼마나 겸손하고 있는 걸까.
 
더불어 그런 생각도 든다. 그 분들이 그렇게 동성애자들을 혐오하는 이유가, 단순히 동성애자들의 어떤 섹슈얼리티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대로 직면해보지 못한 섹슈얼리티의 부분을 마치 동성애자들이 '논쟁 가능하도록' 꺼내놓는 것 같은 바로 그 부분 때문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즉 핵심은 남의 섹슈얼리티가 아니라 바로 그들 스스로의 섹슈얼리티였던 것은 아닐까, 그 분들이 동성애자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뭘 잘 알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는 커녕 자신의 섹슈얼리티조차 잘 모르거나 알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감히' 까발려 내놓는 듯한 동성애자들에게 그토록 학을 떼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게 되면, 그네들의 확신에 찬 표정이 잠시 측은해보이면서, 마음 한 켠으로 그 분들의 그런 눈먼 확신을 신께서 부디 어여삐 여겨 주시기를 어느새 간절히 소원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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