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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간 사이의 터울 #7 : 게이 커뮤니티 운동 약사, 1995~2000
2015-12-31 오전 06: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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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2월 
시간 사이의 터울 #7 : 게이 커뮤니티 운동 약사, 1995~2000
 
 
친구사이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이자, '커뮤니티 단체'라고도 불립니다. 헌데 이 '게이인권운동'이 무언지, 혹은 '(게이)커뮤니티'가 무엇인지는 사실 머릿속에서 언뜻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바로 잘 떠오르지 않는 모호한 길 한가운데를 친구사이가 여태 걸어온 셈이기도 합니다. 하여 이 글은 그 모호함 속으로 한번 본격적으로 뛰어들고자 합니다. 특히 '게이인권운동'과 '게이 커뮤니티'의 정의와 논쟁이 안팎으로 가장 활발하게 벌어졌던 1995-2000년, 그 당시 동성애자인권운동의 맥락 속으로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자료로는 이 시기에 발간된 『친구사이 소식지』 2호(1994.3)~32호(2001.3)를 비롯, 친구사이에서 소장하고 있는 타 단체들의 소식지, 즉 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의 『끼리끼리 소식지』 1호(1994.12)~5호(1995.11), 레즈비언을 위한 정보지 『또다른세상』 1호(1996.봄)~4호(1997.봄),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현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소식지 『Dyke』 1호(1998.3)~5호(1998.12), 하이텔 동성애자모임 '또하나의사랑' 소식지 『열린마음』 1호(1995.12)~2호(1996.2), 『또하나의사랑』 3호(1996.4)~10호(1998.10), 그외 기타 모임들의 발간물 및 친구사이에서 발행한 문건, 스크랩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당시의 생생한 시대적 맥락을 전하기 위해 인용문을 가급적 많이 넣었고, 이에 글이 다소 길어졌습니다. 당시의 맥락이 궁금하신 분은 인용문 위주로, 글의 요지를 간취하고 싶으신 분은 본문 위주로 읽어나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인권운동과 하위문화의 이분법
 
 
1) 동성애자인권운동의 태동
 
국내 첫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인 초동회가 해체되고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끼리끼리'가 탄생한 1994년을 흔히 한국 동성애자인권운동의 원년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더 올라가면 50-60년대에도 동성애자들은 존재했고, 그들이 즐겨 드나드는 업소 또한 존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존재했던 동성애자들의 문화와, 인권운동이 만들어진 후의 문화 사이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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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 기자회견 자료」, 1995.6.26, 1쪽.
 
 
 
동성애는 숨어있고 은폐되어있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기존의 언론매체를 통해 표현되고 제시된 동성애자의 삶의 현실에 대해 분노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간 국내의 모든 매체들은 동성애자들이 자신과 성적 지향성을 함께 하는 이들과의 교류를 위해 만들어낸 동성애자의 공동체를 패덕과 난행의 공간으로 호도하고 모멸하여왔다. 하지만 이는 온갖 비난과 모욕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했던 많은 동성애자들을 금치산자로 모는 짓에 다름아니며,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많은 동성애자들을 자기혐오와 절망으로 몰고가는 부도덕한 행위이다. [...] 우리 역시 비일상적이고 상업화된 동성애자 공동체의 문화를 우려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문제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긍지와 용기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우리들이 보다 자유롭고 건강하게 친교와 상호지원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도록 도움을 받는 것이다. 결국 동성애자에게 강요된 은폐와 침묵을 벗어던질 수 있도록, 동성애를 새로운 삶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문제인 것이다. 

-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 발족 선언문」, 1995.6.26, 1-2쪽. (강조-인용자, 이하 동일)

 

 
 
1995년 6월 26일 동성애자인권운동 단체의 연대체로 출발한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동인협)의 발족 선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동성애자'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말과 범주를 만들고, 그곳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어떤 운동적 이상을 투영하려 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위에서 보듯이 기존에 있던 동성애자 공동체의 문화가 '비일상적이고 상업화'된 형태이며, 따라서 동성애자들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낼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언론들이 벌인, '동성연애 르뽀'식의 무분별한 보도에 맞선 대응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상업고등학교 강당. 남녀 재학생 840여명이 호기심 가득찬 눈초리로 자못 '색다른' 강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에이즈 환자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김모씨(23)가 공개증언을 하러 나오기 때문이다. [...] 
고2때 친구집에서 밤늦게까지 시험공부를 하다 호기심이 일어나 동성애를 시작한 뒤 여러 차례 경험을 거치고 나서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심정이었지요. 순간의 쾌락이 다시 돌이키지 못할 종말을 불렀어요.' [...] '어차피 죽을 목숨, 나같은 불행을 겪는 사람이 하나라도 없었으면 하는 바람 뿐입니다'
현재 에이즈연맹 자원봉사자로 활동중인 김씨는 학생들에게 '한순간 잘못된 호기심이 평생의 멍에가 된다'고 강조하고 '성에 대해서는 스승이나 선배를 통해 올바르게 배우고 충동을 억제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며 말을 맺었다. 
- 「'부끄러운 과거 밝힙니다' 에이즈 20대 숙연한 고백」, 『경향신문』 1995.5.2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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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친구사이)은 현재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임시사무실을 두고 미국·일본·대만·홍콩 등 외국 동성애 인권단체들과도 접촉을 갖는가 하면 '게이문화'를 양성화하고 이론적인 무장을 위해 회원들 간 스터디그룹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이즈연맹 권관우 본부장(41)은 '이들이 인권을 내세우며 동성애문화를 확산시킬 경우 부정적 파급효과가 우려된다'며 '정부는 동성애자들의 이러한 활동에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본부장은 또 '국내 동성연애자는 숫자마저 제대로 파악 안된 상태'라며 '에이즈와 동성애를 사회문제가 아닌 개인문제로 방치하면 국내에서도 '에이즈 감염 폭발현상'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 「동성연애자 권익주장, 비밀단체 은밀히 확산」, 『중앙일보』 1994.8.2., 22면.

 

 
 
일부 대학가 등에 동성연애자 모임이 결성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컴퓨터통신에 동성연애자들이 '또하나의사랑'이라는 동호회를 만들고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인권을 주장하고 나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 '동성연애자들은 마약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2대 적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도덕을 더럽게 오염시킬 수 있으므로 격리수용해야 한다'는 등 비판론이 압도적이지만 동성연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아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에 대해 한국에이즈연맹 권관우(43) 본부장은 '동성애문화가 무분별하게 확산될 경우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의 동조가 우려된다'면서 '적극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하다'고 몰했다.  

- 「동성연애 PC통신 진출 '물의'」, 『중앙일보』 1996.3.17., 23면.

 

 
 
이처럼 동성애자인권운동이 탄생할 즈음에는, 당시 존재했던 동성애자 문화에 대해, 위와 같이 따가운 사회적 시선이 도저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 생긴 인권운동단체들은 이미 존재하는 동성애자 문화에 대해 때로는 양가적이고, 때로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식지에서 이따금 그려지는 기존 동성애 문화에 대한 서술에는, 억압을 억압이라 부르지 못하고, 부당함을 부당함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적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상태는, 동성애에 대한 이 사회의 시선이 별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속한 사회가 별반 변하지 않을 거라는, '세상에 기대하지 않음'의 정서와 맞물린 것이기도 했습니다.
 
 

 

필자가 만나본 게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불편하다고 느낄지언정 부당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들에 대해 포기하고 있었다. [...] 그들 중 몇몇은 서로가 불행해질 것이 뻔한 결혼도 하고 철저히 자신의 성적 소망의 뿌리를 자르면서까지 이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삶은 철저히 버리고 주변의 것들에 의해 살아감을 감수하려고 하는 것이다. 

- 김준석, 「동성애억압과 동성애인권운동」, 『친구사이 소식지』 10, 1996.1., 5-6쪽.
 
 
 
 
요즘 제가 만나는 분들 중엔 억압을 억압으로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절대적으로 제 개인적인 시각에서요. 억압을 억압으로 느끼지 못하게 하는 사회는 얼마나 또 무섭습니까. 그렇다면 끝입니다. 그 억압은 천년만년 계속되겠죠.

- 댕기동자, 「'끼리끼리에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답장」, 『끼리끼리 소식지』 2, 1995.2.12., 1쪽.

 

 
 

 

"저는 게이들이 이 사회에서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동성애자들에 대한 억압에 대해, 한 인권운동가에게서 얘기를 듣던 어느 무지몽매한 이태원죽돌이의 변

- 「변기를 흔드는 손 : 한 달 동안 대동인의 안테나에 걸려든 말잔치」, 『Dyke』 1, 1998.3.14, 15면.

 

 
 
 
싸움이 없는 사회는 싸울 거리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양편이 힘의 우열 관계가 이미 결정나버린 사회일 뿐이다. 힘의 우열관계가 이미 결정나버린 것을 알고 이미 곱게 포기한 걸까?

- 윤선희(끼리끼리 학술부장), 「빈혈 환자의 선택」, 『또다른세상』 1, 1996, 30쪽.

 

 
 
하여 그들 중에는 여전히 침묵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지켜나가는 '인텔리 게이'들도 있었을 터고, 그들의 그런 '은둔'적 삶을 '섭섭해하지 않는' 또다른 게이들도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당시의 동성애자 문화에만 만족하지 않고 무언가 다른 '공동체'를 꿈꾸었던 이들의 목소리가, 운동가들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하나둘씩 새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침묵하는 인텔리 게이들이여. 계속 침묵하십시오. 당신들의 침묵이 나로선 전혀 야속하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의 상황으로선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마저도 듭니다. [...] 침묵하고 있어도 전혀 섭섭하지 않습니다. 이해합니다. 이반이 아닌 몽상적 혁명가는 비겁하다고 당신을 비난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 몽상가를 순진하다고 일축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소시민 이반들은 당신들이 은둔하여 숨죽이며 살아도 당신의 편입니다. 
- 「벽을 허물고」, 『또하나의 사랑』 3, 1996.4.13, 30쪽.

 

 
 

 

여러번 갈등을 겪고 나면 흔히 알려진 우리들만의 공간으로 발길을 옮기지만 가볍지만은 않다. 3000원이라는 금액을 지불하고 누군가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갖기도 하고, 때론 불만족스럽게 성욕을 간단히 해소할 수 있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인과 부딪혀야 하는 두려움도 있거니와, 비좁은 실내, 구성원들의 인성문제 때문에 유쾌하지만도 않다. 모두 동병상련의 친구요, 형님이요, 아버님일 수 있으련만 서로 불신, 무시, 시기, 질투하는 풍조가 그 좁은 공간의 공기를 혼탁하게 한다. 
우린 다른 집단보다는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런 열악한 동성애 문화 속에선 서로가 서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동반자 의식이 있어야 우리의 문화를 밝게 발전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공지학, 「1994.2.5. 13:27:13, 서울에서」, 『친구사이 소식지』 2, 1994.3., 22쪽.
 
 
 
이런 상황에서, 숨어살 수도 있는 것을 '굳이' 얼굴을 드러내는 커밍아웃을 하고, '굳이'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의 목소리를 내려던 당시의 동성애자인권운동은,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조건에 처해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가족에게 커밍아웃을 강행한 후, '민주화운동'보다는 쉬울 줄 알았던 동성애자인권운동에게서 크나큰 벽을 느꼈다는 대목이나, 안팎으로 적대적인 사회 상황 속에서 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이를 밀어붙이고자 했던 당시 활동가들의 서술은, 지나온 세월의 지난함을 새삼 되새기게 합니다.
 
 

 

친구사이의 회원에 가입하면서 난 민주화를 외치다 죽어간 선배들과 친구들에 비하면 그래도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편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이임이 부끄럽지 않고, 게이라서 회사에서 쫓겨나지 않고, 나의 사랑이 부도덕한 것이 되지 않고, 나의 욕망이 더러운 것이 아닐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느꼈던 그 일들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내 능력 밖의 일이라는 자괴감으로 시달려야 했다. 
- 김준석(친구사이 회장), 「Coming Out : 드러내기!! 그 지난한 고통」, 『친구사이 소식지』 13, 1996.9, 20쪽.
 
 
 
 
'게이'라는 말 하나로 난 모든 걸 잃어야 한다.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동민으로서, 학생으로서, 자식, 형으로서 나란 존재는 게이란 단어 앞에서 더 이상 나를 설명할 기회를 모두 박탈당하고 만다. 

- 충북대 동성애자 모임 '동일인', 『'동일인'을 아십니까?』(유인물), 1997.

 

 
 

 

친구사이 오준수 부회장은 "앞으로 어떤 반응이 올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의외로 조건이 좋아질 수도,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정말 지금으로선 전혀 전망을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성애 운동은 사업이 아니다. 꼭 시장성을 보고 이익이 있겠는지 계산하고 덤벼들 성질의 것이 아니다. 결과를 점치기 어려워도 우리는 나설 수밖에 없다"며 당위성을 강조한다. 

- 박광희(기자), 「동성애 공론화시대 눈앞에... - 대학가에 동성애 모임 공식발족.. 친구사이·끼리끼리 등도 공개활동」, 『주간한국』 1995.6.15., 65-66쪽.
 
 
 
 
2) 게이 하위문화와 게이 인권운동의 이분법
 
이와 같이 척박했던 당시 사회풍토 속에, 동성애자인권운동은 어렵사리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다져야 했습니다. 이에 따라 불가피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선택했던 전략 중 하나는, 바로 언론의 표적이 되던 '퇴폐적인' 동성애자 '하위문화'와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낼 동성애자 공동체는 기존의 것들과는 분리되어야 하며, 기존의 문화는 '심리적으로 고립된 탈-현실의 공간'이고, '도덕적 괴리감'을 조성하는 한편, 가라오케 등 일본에서 들어온 게이문화를 무분별히 추종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진단이 그것입니다.
 
 

 

말이 좋아 공동체이지 낙원동의 동성애자 문화는 자신의 문화권과 그 스스로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환경 사이에 그 어떤 종류의 관계망의 형성도 달가워하지 않는, 심리적으로 고립된 탈-현실의 공간이다. 애초에 그곳은 동성애적 쾌락의 교환 조건 형성을 목적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그러니 낙원동의 동성애자들은 자신과 타인간의 관계를 육체적 끌림을 통한 긴장과 동성애적 쾌락의 교환 가능한 사이 이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한국에서의 동성애자들의 삶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내적 불안감을 발산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 음성적으로 형성된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는 이들에게 도덕적인 괴리감만 안겨줄 뿐이다. 깜깜한 극장에서, 술집에서 혹은 싸우나에서 어떠한 인간적인 교류없이 곧바로 자신의 파트너를 찾기 위한 탐색과정에 익숙해지고, 그 떳떳하지 못한 탐색에서 이들은 참담한 절망감을 맛봐야 한다. 탐색 끝에 운이 좋아 파트너를 만난다 하더라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도덕적인 괴리감 때문에 그 관계를 지속하는 데에도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 김준석(친구사이), 「한국의 게이 - 이성애 제도 속에서 강요당하는 이성애적 삶」, 『끼리끼리 소식지』 3, 1995.5.22., 9-10쪽.
 
 
 

 

비록 지금은 대부분의 한국 동성애자들이 하지도 못하는 일본말로 가라오케 노래를 목이 찢어져라 부르는 것을 '진보적'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OCCUR와 같은 동성애 인권운동가를 존중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직도 국내의 대부분의 동성애자가 일본의 포르노와 동성애 성행위 밀집소 방문 음담패설을 '진보적인 기행문'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한국 내 단체도 OCCUR를 능가하게 되어, 한국인의 단결심과 긍지를 세계동성애 사회에서도 발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오늘도 우리들의 인권을 위해 열심히 뛰어본다. 
- 장진석, 「세계 동성애 인권운동의 현황 : 일본 「OCCUR」 편 / 기모노, 가라오케, 그리고 동성애 인권」, 『친구사이 소식지』 3, 1994.4., 1면.
 
 
 
나아가 당시의 초창기 동성애자인권운동가들은, 새롭게 태어날 공동체의 새로운 동성애자 주체가 '도덕적'이고, '순결하고 고상한' '참사랑'을 나누는 존재였으면 하는 바람을 내놓습니다. 이렇게 동성애자들의 '도덕성'을 강조하는 운동전략은 물론, 당시 동성애자들에게 쏟아지던 낙인에 대한 적극적인 부인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야기될 '거꾸로 뒤집힌' 형태의 낙인까지는 미처 방비할 수 없었던 셈입니다.
 
 

 

어느 나라,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Gay의 사우나문화가 팽배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까지 용납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Gay문화의 주인공은 바로 Gay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정당한 몫을 찾으려면, 우리의 정당한 목소리를 높이려면 우리 스스로 동성애의 성도덕성 회복에 한 층 더 앞서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피나는 절제와 노력이 따라야 하므로 많은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제 생각은 언제까지나 우리가 그런 컴컴한 휴게실에서 우리 스스로 안주해버리고 자학의 길을 되풀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 「Q&A」, 『친구사이 소식지』 8, 1995.2., 3쪽. 
 
 
 

 

오늘 우리나라의 게이 커뮤니티는 과연 혼란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다양하지만 다분히 실험적인 환경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 놓여있는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을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몸을 허락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사랑을 점검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여기 그대의 사랑을 뒤돌아 볼 점검표가 있습니다. 그대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진실하고 고귀한 사랑의 그대 앞에 섰을 때 그대는 어떻게 그 사랑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
왜 수많은 게이들이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가 수없이 파트너를 바꾸며 종말을 맺게 되는 것일까요? '사랑'이 달라졌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사랑'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것은 많은 게이들이 '참사랑'의 개념을 모른 채 '사랑'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 최용덕, 「SPECIAL REPORT, 사랑과 섹스 - 깊고 신성한 사랑」, 『친구사이 소식지』 13, 1996.9., 11쪽.
 
 
 

 

동성간의 사랑이라고 해서 이성간의 사랑처럼 순결하고 고상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더욱이 일반인들과 다른 차원에서 그것도 가려진 세계(?) 속에서 사랑을 해야될 입장이라면 오히려 이성간의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사랑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 우리 게이들의 현실이다. [...]

게이도 이 사회의 떳떳한 한 인간이고 열심히 살며 정열적으로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각자 스스로가 느낄 때 식성 운운하며 인스턴트(?) 사랑을 즐기는 일은 우리 곁에서 멀어질 것이다.
- 「「식성(?) 운운하는 인스턴트 사랑은 이젠 『아듀』」 - 완전한 사랑은 정신+육체임을 인식」, 『친구사이 소식지』 3, 1994.4., 2면.
 
 
 
 
3) '대안적 공동체' 만들기
 
이렇게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동성애자'를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퍽 과잉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에 대해 한 가지 더 변호를 해보자면, 특히 남성동성애자의 경우 앞서 보았듯 인권운동의 태동이 곧 HIV/AIDS의 확산과 그 시기를 같이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가령 친구사이 소식지에 실린 단체의 소개를 보면, 아예 '에이즈 예방'을 단체의 중요한 근간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친구사이는 이 HIV/AIDS가 동성애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성생활의 난잡함'과 결부된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는 HIV/AIDS와 동성애를 분리하려는 당시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한편, 이 과정에서 HIV/AIDS와 문란함의 낙인을 분리해내지는 못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친구사이'는 에이즈 예방을 위한 국내 단체와 협력하고 있는 동성애 남성들의 모임으로서 아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친구사이 소식지』 2, 1994.3., 3쪽.
 
 
 

 

더 이상 AIDS를 동성애와 무조건 결부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AIDS는 성생활의 난잡함과 관계있는 것이지 성적지향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 '동성연애자들은 난잡하다'는 얼토당토않는 가설을 내세우고 그 증거(?)로 극장을 예로 들고 있다. 그렇다면, 창녀촌·안마시술소·터키탕이 이성애의 대표적인 모습인가? [...]
어떤 한 사람의 생활이 그 집단을 대표한다고 보기 전에 그 집단을 먼저 직시한 후 그 한 사람의 생활을 평가하라.
- 「독자의 난」, 『친구사이 소식지』 6, 1994.10., 3쪽.
 
 
 
이후 친구사이 소식지는 단체 소개에서 '에이즈 예방'이라는 문구를 빼고 '보다 건전한', 혹은 '보다 건강한' 동성애 문화를 위한다는 구절을 싣습니다. 여기서 '건전함', '건강함'이란 어떤 것을 의미했을까요? 사실 건전하고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은 그 자체로 더없이 순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가령 서울대 동성애자 모임인 '마음003'의 행사자료집에서는, '건강한 이반 문화'를 동성애자의 성정체성이 우회되지 않은 채 직면되는, 그리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한 문화라 규정합니다. 만약 이 정의대로라면, 여기서의 '건전함'과 '건강함'은 현재에도 퍽 유의미한 것이 됩니다. 
 
 

 

'친구사이'는 보다 건전한 동성애 문화를 위한 남성들의 모임으로서 [...]
- 『친구사이 소식지』 3, 1994.4., 1쪽.
 

 

 

 

 

친구사이는 보다 건강한 동성애문화를 위한 남성들의 모임으로서 동성애자 인권보호, 상담전화운영, 문화행사 및 소식지 발간, 친목도모, 에이즈 예방 및 퇴치운동 등의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 『친구사이 소식지』 9, 1995.8., 1쪽.
 
 
 

 

건강한 이반 문화란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문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성애자들의 문화를 그저 흉내내기만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완벽한 모방이라 해도 이반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포기하는 것이며 이반 문화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건강하고 자생적인 문화를 갖지 못한 집단이야말로 어느 사회에서건 동정의 대상일 뿐 희망찬 지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파리는 불타고 있다 - 건강하고 주체적인 이반 문화의 정립을 위한 물음들」, 『마음003 : 서울대학교 대동제 이반문화제 자료집』, 1996, 9쪽.

 

 
 
나아가 친구사이에서는, 1999년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좌 중 한 꼭지에서 '동성애 하위문화, 우리의 문화'에 대해 다루고, 기존의 '동성애 하위문화'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그와 구별되는 형태로 만들어갈 '우리의 문화'에 대해 구체적으로 전망하였습니다. 그 전망의 내용을 조금 길지만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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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일, 『친구사이 세번째 강좌 : 동성애 하위 문화, 우리의 문화』, 1999.7.18., 1쪽.
 
 

 

90년대 종로와 이태원으로 크게 대표되는 한국 동성애자들의 공간은 아직까지 만남의 기능밖에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서 특정한 삶의 형식들이 결집된 공동체community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곳들은 은폐되고 가려진 채 성애적 표현만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동성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또 그러한 공동체가 왜 필요한 걸까요?

- 이희일, 『친구사이 세번째 강좌 : 동성애 하위 문화, 우리의 문화』, 1999.7.18., 1쪽.

 

 
 

 

이태원 디스코 바에서는 그곳의 공간 크기만큼의 자유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곳에서 아무리 자유롭게 웃고 떠들고 이야기하고 사랑한들, 바깥에서 자기 표현의 자유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자, 이제 우리의 젊은 K씨는 이태원에서 즐기고 집으로 툴툴 돌아갑니다. 이제부터 그는 일주일 동안 변장된 삶을 살아가야겠지요. 평범한 아들, 순종적인 회사원, 그럴싸한 동료로서의 존재. 게이로서의 흔적은 몽땅 이태원 디스코바에 남겨놓고 왔습니다. 혹간 게이 연인과 친구들로부터의 전화 연락이 그 흔적을 때때로 상기시켜주곤 합니다. 자신의 속내와 본연의 모습은 어디로 갔을까요? 이태원에 가서 만 원만 지불하면 도로 되찾는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또는 컴퓨터를 켜고 통신방에 들어가면 다시 되찾을 수 있다고 억지를 피우지 맙시다, K씨.
두말할 나위도 없이, 동성애자로서의 자기 표현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선 우선 인권운동의 신장과 대안적 공동체가 존재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지만, 우선 여기서는 대안적 공동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대안적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요건들 중 중요한 뼈대만 간추려 봅시다.
1. 지역적 근린성 : 이것은 삶의 터전의 동일성을 의미합니다. 동성애자 거주지의 밀집화, 생활세계의 공유화. 이제 젊은 K씨의 집은 게이들이 집단적으로 모여사는 동네에 있습니다.[...]
2. 공통적인 유대감 : [...] 이성애자들에게 혐오를 사거나, 일상적으로 호모포비아적인 위협을 당하거나, 자기 표현의 자유를 방해당하는 것은 이곳에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곳의 똘똘 뭉친 집단적 연대감은 강력한 힘이지요. [...]
3. 대안적인 가족 모델 : 이성애 가족은 한 개인의 탄생-성장-性-늙음-죽음의 연대기를 적절하게 규율하는 정교한 시스템입니다.하지만 생식과 결혼제도에서 완연히 분리된 K씨는 자신의 삶을 안배하고 조율할 수 있는 새로운 가족 모델을 필요로 합니다.

- 이희일, 『친구사이 세번째 강좌 : 동성애 하위 문화, 우리의 문화』, 1999.7.18., 10쪽.

 

 
 
위 글에서 드러나는 점들은 다음와 같습니다. 첫째, '동성애 하위문화'를 분석하면서 이는 '특정한 삶의 형식들이 결집된' 공동체라 할 수 없고, 이에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자가 아닌 후자의 공동체를 가리켜 '커뮤니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 글에서 서술된 '커뮤니티'로 기능할 '대안적 공동체'는, 한마디로 술집에만 드나드는 주말 게이가 아닌, 주장과 낮에도 게이임을 말할 수 있는, 나아가 동류들이 모여 게이로서의 인생을 함께 꿈꿀 수 있는 이들이 머물 터전을 일컫습니다. 셋째,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이태원으로 특정된 '하위문화'에서의 경험을 '그곳 공간 크기만큼의 자유'일 뿐이라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종태원'은 '커뮤니티'가 아니고, '우리'는 새로운 우리의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이 말 속에 적용된 '커뮤니티'의 용법은 퍽 흥미롭습니다. 더불어 보다 게이의 존재조건에 즉한 공동체를 꾸려나가자는 '대안적 공동체'의 이상은, 오늘의 친구사이에서도 '친구사이의 가치' 속 한 꼭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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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듯, '건강함'과 '건전함'에 대한 욕망은 그 자체로 나쁠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위의 글 가운데서는 현재에도 차용될 수 있을 가치들이 더러 있습니다. 동성애자의 '각성된' 성정체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주문은 당시에도, 또 현재에도 퍽 유의미한 목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었을 '건강하지 않음'의 낙인은, 앞에서 보았듯이 별개로 성찰되었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곧, '종태원'의 동성애 문화와 동성애자인권단체의 문화를 지나치게 분리해서 보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에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수준으로 쏟아지던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낙인의 맥락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2. 친목과 인권운동의 이분법
 
 
1) '업소'와 '인권운동단체'의 관계
 
그러나 '종태원'의 '업소'와 '인권운동단체'는 초창기부터 이미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가령 인권운동단체와 후원인으로서의 관계가 그것인데, 이태원의 바 '지퍼'가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동성애자인권운동 연대체 동인협은 결성 1주년 기념식을 이태원 게이 디스코텍 '파슈'에서 개최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곳은 1994년 2월 개업 후 『친구사이 소식지』에 광고를 싣기도 했습니다.
 
 

 

출판국에서는 대동인(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의 후원인으로 가입해 계신 지퍼의 두 사장님께서 제기한 이태원 등지의 바와 인권운동단체간의 협력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자 한다. 그 두분이 사용하신 "사회로의 환원"이 우리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에게도 중요한 부분이고, 전체 게이 커뮤니티의 질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 「Interview : 지퍼의 김사장님」, 『Dyke』 1, 1998.3.14,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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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사이 소식지』 2, 1994.3., 16쪽.
 
 
 
헌데 이들의 관계가 원만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동 행사 때 어떤 운동가들은 왜 하필 행사장을 '나이트'로 했느냐며 항의를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는 동성애자 문화를 담지할 공적 공간이 부족한 현실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을 터이고, 동성애자 유흥 문화가 오늘날의 '클럽'이 아닌 '나이트'에 머물러 있었던 현실의 반영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이런 '나이트'들은 동성애자인권운동 단체의 행사장으로 사용됩니다. 
 
 

 

1996년 6월 22일,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이하 동인협)의 제1주년 기념식이 이태원의 '파슈'에서 개최되었다. [...]
주최측의 얘기로는 거의 500여명에 가까운 남여동성애자들이 모였다고 한다. 
- 「한마음 한뜻으로 : 제1주년 기념 한국동성애자 인권운동 협의회 기념식」, 『친구사이 소식지』 12, 1996.6., 8쪽.
 
 
 

 

96년 6월 22일 동인협의 1주년 기념행사가 이태원에 있는 파슈에서 열렸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뜻깊고, 고무적인 행사가 이태원이라는 공간, 더욱이 나이트라는 공간에서 열린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불만을 표시했었다. 물론 장소라는 것이 그날 행사의 성격을 좌우하기도 하지만 대외적인 시선을 차지한다면 그 장소는 그리 크게 잘못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했던 것은 어떠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이러저러한 발언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느냐가 아닌, 다양한 존재의 방식들이 공유되고 소통될 수 있는 문화적 토대가 우리에게 존재하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 정혜등(또다른세상 기자), 「동인협 1주년 행사를 보고... 축제의 미학」, 『또다른세상』 2, 1996, 44쪽.

 

 
 

 

11월 23일 토요일, 끼리끼리가 탄생한지 2주년을 기념하고 전국에 흩어져 있는 레즈비언들이 한자리에 모여 레즈비언의 자긍심을 확인하는 축제가 이태원 '파슈2'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번 행사는 끼리끼리만의 자체 행사라기보다 끼리끼리가 마련하는 모든 레즈비언들의 잔치라고 할 수 있다. 
- 전해성(끼리끼리 회장), 「끼리끼리&동인협&타단체 소식」, 『또다른세상』 3, 1996, 54쪽.
 
 
 
 
이윽고 1996년 들어 이태원에 '스파르타쿠스'라는 '클럽'이 생기는데, 이는 현재의 '펄스'와 유사한, 바와 플로어가 분리된 서양식 클럽의 형태를 띤 최초의 게이클럽이었습니다. 이 클럽은 몇몇 동성애자인권운동 단체를 후원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헌데 이 클럽 근방에서 소식지를 배포하던 친구사이 회원들과 클럽측이 갈등을 빚은 일이 주목됩니다. 클럽측의 주장은, 동성애자가 드나드는 클럽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럽고, 클럽의 손님들도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곤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각 동성애자인권운동 단체들은 이 클럽에 대한 불매운동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이태원 '업소'와 '인권운동단체'의 입장이 당시에 어떻게 서로 달랐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지난 7월 19일 밤 11시경 이태원 S 업소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친구사이 소식지를 배포하려던 친구사이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회원들과 이를 저지하는 업소 주인과의 마찰이 그것이다. 그동안 별 문제없이 진행되던 소식지 배포를 막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소식지를 길거리에 함부로 버려 어지럽힌다', '이웃에서 동성애자들이 주말만 되면 이곳에 몰린다고 말이 많다', '단속이 심해서 경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다' 등 결국은 한창 잘나가는 영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방해요소는 다 제거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일단은 그 자리에서 언성을 높여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자리를 접고 물러서긴 했지만 그동안 아군이라고 믿었던 업소의 실망스런 처사에 느낀 배신감과 억울함은 삭히기 힘들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뒤늦게 도착한 다른 회원들은 힘빠진 회원들을 뒤로한 채 신이 나서 언제나처럼 그곳에 들어갔다.[...]
 
나름대로 동성애단체들에 후원을 하고 있다고 공공연히 알려진 업소에서 행한 이번 처사에는 그간의 '협조'가 상술을 감춘 기만적인 작태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
이제 더이상 이태원 문화를 찬양하기만 할 수는 없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모든 이반의 놀이문화를 독점하려 들고, 건강한 이반문화의 배급을 위해 노력하는 동성애단체들의 행보를 가로막는 업소는 마땅히 철퇴를 가해야 할 것이다.

- 「(읽어주세요)'그들은 우리의 적인가 동지인가!'」, 작성 연도 미상(1998~2000년 추정).

 

 
 

 

소식지의 발간과 배포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 동성애가 사회적인 이슈로 드러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동성애자들은 소식지에 반감을 표시했고, 이로 인해 많은 게이·레즈비언 바가 소식지 비치를 거부하기도 했다. 이태원의 '스파르타쿠스'라는 가장 큰 게이바에서 '친구사이'의 소식지 비치를 거부해서 대학교 동아리 등을 중심으로 불매운동이 펼쳐지기도 했었다.
 
전재우(친구사이) : 고맙다, 수고한다, 뭐 이런 분들도 있었고. 손으로 이렇게 돈 찔러주는 사람도 있었고, 실제로. 그리고 영업 방해하지 말고 나가라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손님들, 왜냐하면 숨어살던 시절에는, 어쨌든 알려지면, 이중생활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알려지는 거 자체를 극도로 싫어하시니까. 손님들 많을 때는 영업 방해 된다고, 손님들 중에 반감 표시하는 분이 있으면 사장 입장에서는 바로 좀 나갔으면 좋겠다, 내지는 손님 없을 때 갔다가 다시 오너라. 지금도 그런 반응들은 있어요.

- 박지훈, 「한국 퀴어 미디어의 역사와 발전」, 『한국 사회 미디어와 소수자 문화정치』,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330-331쪽.

 

 
 
 
2) 1997년의 정세
 
이렇게 동성애자 유흥업소와 인권운동단체가 서로 어색한 밀월을 유지하던 가운데, 한국 사회는 1997년을 맞게 됩니다. 1997년은 한국 사회의 측면에서나 동성애자인권운동의 측면에서나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해였는데, 이에 따라 각 운동 단체의 지향 또한 변화된 정세에 발맞춰 재조정되기도 하였습니다.
 
먼저 1996년 1월 26일, 신한국당(현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새벽에 국회에 잠입하여, 정리해고를 법제화하는 내용을 포함한 노동관계법 개정안과 안기부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킵니다. 이에 전년도에 결성되었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1999.11.23. 합법노조 전환)은 총파업을 결의하였고, 이듬해 초까지 파업 투쟁을 강행하였습니다. 여기에 동인협은 1997년 1월 14일부터 3월 11일까지 파업투쟁에 동참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동성애자 단체의 이름으로 다른 이슈의 집회에 참석한 첫번째 사례였습니다. 당시 각 단체의 동성애자들은 파업투쟁 참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술회했습니다.
 
 

 

[나도 한마디] 뒷풀이 자리에서 만난 집회 참가자들의 뒷 이야기
윤 : 명동에서 무지개 깃발을 처음 봤을 때 온 몸에 닭살이 돋고 소름이 쫙 끼쳤다. 그렇게까지 무지개깃발이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한 : 오늘의 집회는 내 삶의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것 같다.
훈 : 쌍용자동차 노조의 노동자가 '동성애자 연대투쟁, 노동악법 철폐하자'는 구호를 외쳐주었다. 정말 용기가 솟았다. 
석 : 극장에서 소식지 돌릴 때보다 반응이 좋았다. 전경방패에 붙어있던 핑크 트라이앵글이 인상적이었다. [...]
안 : 우리만 나설 게 아니라 동성애자 내부로 확산시켜야 할 것 같다. 
수 : 투쟁은 축제이다. 신나게 웃고 떠들며 투쟁한 것이 자랑스럽다. 
용 : 기자들이 사진찍으러 올 때 꿋꿋하게 버티던 모습이 좋았다. 
나 : 대열속의 동성애자들에게 우리도 활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대외적으로 우리를 보여주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호 : 나가기 전엔 이게 무슨 필요가 있나 생각했다. '동성애자다'라는 쑥덕임도 있었지만 '동성애자도 나왔구나' 라는 말에는 기분이 좋았다.

- 「동성애자들이 노동법 투쟁에 나선 이유는?」, 『친구사이 소식지』 14, 1997.2., 32-33쪽. 

 

 
 
또한 6월 28일 동인협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동성애 차별적 내용에 반대하여, 종로3가 파고다공원 앞에서 집회 및 거리 선전전을 벌였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로 동성애자들이 주축이 된 집회였습니다. 이는 한국 정치·사회운동에서 동성애자인권운동이 엄연한 한 갈래로 존재한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사건이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동성애자 스스로 자신의 얼굴과 정체를 드러내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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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적 커밍아웃 시작되다!」 ,『친구사이 소식지』 15, 1997.8., 1쪽.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를 비롯, 여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끼리끼리, 하이텔동성애자모임 또하나의 사랑, 대학동성애자모임연합회, 주한외국인 여성동성애자모임 사포 등이 가입된 동인협을 중심으로 기타 컴퓨터 통신 동성애자 모임, 153전화사서함 동성애자 모임, 전국 각 지역의 동성애자 모임, 크리스챤 동성애자 모임, 퀴어영화제 사무국, 3,40대 동성애자모임 등의 회원 200여명이 참가하여, 현 교과서 내용의 동성애자 차별 현황 발표, 문화공연(여성주의 가수 안혜경씨 공연, 모노드라마 등), 성명서 낭독, 거리 촛불 행진 등을 가졌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가진 대규모의 동성애자 자체의 집회인 만큼 매스컴의 취재도 많았으며, 선뜻 집회의 대오에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주위를 서성이며 집회를 끝까지 지켜본 이반들도 상당수 있었다.

- 「집단적 커밍아웃 시작되다!」 ,『친구사이 소식지』 15, 1997.8., 1쪽.

 

 
 
더불어 7월 11일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 수입금지 조처에 따라, 28일 동인협과 서울퀴어영화제 준비위원회에서는 7월 28일 공연윤리위원회의 동성애 영화 상영금지를 규탄하는 침묵 연좌시위를 대학로 동숭시네마텍 앞에서 개최했고, 11월까지 시민들을 대상으로 서명운동을 개진했습니다. 또한 11월 2일에는 이후 동성애자인권연대로 재편된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대동인, 현 행성인)이 정식 출범하여, 동성애자인권운동의 큰 축으로 거듭났습니다. 나아가 이듬해 1월 7일 KBS '뉴스 파노라마'에서 종로 라이온스 사우나를 취재하여 동성애를 HIV/AIDS의 원흉으로 지목하는 보도를 하자, 1월 16일 대동인과 동인협은 "왜곡된 언론보도와 에이즈 정책에 대항하는 범동성애자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 22일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26일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을 항의방문하는 한편 31일 서울대에서 결의대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선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어 헌정 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달성하였습니다. 대선에 앞서 각 대통령 후보들은 동성애 문제에 대해 일정한 정견을 피력했는데, 언급의 경중을 떠나 이 또한 이전과는 달라진 동성애와 동성애자인권운동의 입지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회창 후보는 동성애가 일반인들에게 정상적인 것으로 비치지 않는 현실에서 이들의 사회운동화를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고 김대중 후보는 동성애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지만 동성애자들의 활동도 인권보장의 한 부분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답변했으며, 이인제 후보는 자연의 섭리를 생각할 때 솔직히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 권영길 후보는 한국 사회가 동성애 운동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사회적 여건을 갖추었고 당국 역시 이러한 조류에 발맞추어야 한다고 답변했다. 

- 「최초의 정권교체.. 한국 이반들의 21세기는?」, 『친구사이 소식지』 18, 1998.1., 2쪽.

 

 
 
 
3) 친구사이의 노선 전환 : 친목에서 인권운동으로
 
이렇게 안팎으로 급변하는 정세에 발맞춰, 친구사이를 비롯한 동성애자인권운동 단체들은 활동노선을 보다 선명하게, 즉 '투쟁적으로' 가져갈 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또한 이의 배경에는, 각 단체들이 과연 '인권운동단체였던 적이 있는가', '혹은 '인권운동이란 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고민이 자리해있었습니다. 단체의 발족을 통해 동성애자들이 무언가 좀더 당당하고 마음편히 지낼 수 있는 친목의 터전은 제공되는 것 같은데, 그것과 더불어 당시 제기되었던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반응, 동성애 관련 정치적 움직임에 동참하는 일과는 일정한 괴리가 감지되었던 셈입니다. 또 여기에는 이미 성장하고 있던 동성애자 유흥문화가 동성애자들의 '사랑방'과 '쉼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으며, 각 단체들이 그것을 따라가긴 힘들겠다는 열패감도 함께 묻어있었습니다. 
 
 

 

친구사이는 과연 단 한 순간이라도 인권운동단체였던 적이 있었는가? 그저 초보 동성애자들이 게이커뮤니티로 들어가는 입구, 혹은 말그대로 쉼터였을 뿐이었던가? [...]
애초에 동성애자인권운동은 가리워진 길이 아니라, 신기루였다. 도대체 어느 누가 이 애매모호하고 난처한 길에 자신을 헌신하려 하겠는가? [...] 몇 번의 계절이 바뀌는 동안 우리는 자꾸 초라해지기만 했고, 믿고 맡기고 따를 수 있는 집단적 자아를 만들어 내는 데 실패했다. 그래, 고립된 혼자가 아니라 존재의 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의 공동체. [...]
더이상 이반들은 친구사이라는 터미널을 거치지 않고도 곧장 종로로 이태원으로 향한다. 

- 「97년 서울, 그리고... 우리의 자화상」, 『친구사이 소식지』 17, 1997.12., 2쪽.

 

 
 

 

레스보스가 생기기 전에는 같은 레즈비언을 만나기 위해서는 끼리끼리로 와야 했다. [...] 그러나 지금은 최소한 레스보스라는 레즈비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이 생겼다. 수요의 증가로 인해 앞으로 다양한 레즈비언들의 문화공간이 생길 전망이다. 
그렇게 놓고 봤을 때 끼리끼리는 '한국 여성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방향설정과 성격의 구분이 시급하다 할 수 있겠다. 

- 전해성(끼리끼리 회장),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다양성」, 『또다른세상』 3, 1996, 14쪽.

 

 
 

 

'또하나의사랑'이 인권모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권 모임이라면 현재 인권과 관련된 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 홍민우(ELLUL),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또하나의 사랑」, 『또하나의 사랑』 10, 1998.10., 18쪽.

 

 
 
따라서 1997년 친구사이는 단체의 노선을 '친목'에서 '사회개혁', '인권운동', '투쟁', 나아가 '혁명'으로 선회하게 됩니다. 즉 '거품'을 빼고 '가지'를 쳐서, '일'을 집중적으로 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안에서부터 추동된 것일 뿐 아니라 밖으로부터도 요구되었던 것이고, 친구사이 뿐만 아니라 끼리끼리도 같은 시기 비슷한 노선 전환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고민을 담은 언급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원들을 위한 친목 위주의 활동과 사회개혁 단체로서의 활동이라는 그 모호한 경계의 지점에서 친구사이는 한동안 혼란과 정체감(停滯感)을 보였고 더욱이 모임활동의 주체자들이 이후 발족한 대학모임의 구성원들로 역량이 집결되자 그 정체감이 더 크게 표출되었다. 

- 이해솔, 「한국 동성애자 인권모임의 생성 과정과 활동 그리고 전망」, 『또다른세상』 1, 1996, 14쪽. 

 

 
 

 

지철 :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친구사이의 문제점은 인권과 친목의 병합인 것 같습니다. 즉 무리하게 「인권과 「친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친목에서 과감하게 탈피하고 인권 쪽으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여러 동성애 단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친목은 통신이나 153 등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잘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153 또한 우리 친구사이에서 만든 것이기에, 친목을 153으로 돌린다고 해서 우리 친구사이가 「친목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일을 (집중적으로)할 수 있는 체계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번 정관 개정을 통해서 이런 체계로 바꾸기를 바랍니다.
- 친구사이, 『회칙개정과 97년 인권운동의 활동 목표를 위한 토론』, 1997.5.24., 1쪽.
 
 
 

 

진석 : 여태까지 우리가 해왔던 일들, 불쌍하고 외롭고 쓸쓸한 게이들이 모일 수 있는 사랑방을 제공해주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투쟁'의 모습을 보입시다. 이제는 그만 모여서 비디오나 보거나 탁상공론만 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뜁시다. [...] 이제는 우리 사이에 있는 거품을 빼버리고, 직접 뛸 사람들만 모입시다. 다른 사람들은 통신이나 153 등 다른 커뮤니티로 가고, 일을 하고 발로 뛸 사람들이 모입시다. 이제 친구사이가 거품을 빼고 가지를 쳤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혁명을 위한 단체'로 탈바꿈하기로 합시다.

- 친구사이, 『회칙개정과 97년 인권운동의 활동 목표를 위한 토론』, 1997.5.24., 8쪽.

 

 
 

 

친구사이는 이반의 인권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바로 여러분의 조직입니다. 친구사이는 예전의 사랑방 형태에서 벗어나 차근차근 인권운동사무실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습니다. 
- 『친구사이 소식지』 15, 1997.8., 1쪽.
 
 
 
 

 

1. 친목단체에서 인권운동 단체로 발돋움하는 '끼리끼리'
'끼리끼리'는 레즈비언 인권운동단체로서의 위상을 바로잡고자 지난 97년 1월부터 석달간에 걸쳐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4월부터 정상운영에 들어갔다. 

- 전해성(끼리끼리 회장), 「끼리끼리&동인협&타단체 소식」, 『또다른세상』 4, 1997, 60쪽.

 

 
 
그러나 같은 시기 하이텔 동성애자 모임 '또하나의사랑'은, 앞의 분위기와는 달리 '인권'과 '친목'의 병행을 유지해나간 점이 주목됩니다. 이처럼 초창기 동성애자 단체에게 이 '인권이냐 친목이냐'의 고민은 꽤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래의 글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는' 것만이 인권운동이 아니며, 온라인을 주축으로 결집한 모임이었던 만큼 게시판 활동이나 오프라인 모임 등 일상적인 활동들 또한 인권운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당시는, '인권운동'의 범주에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이 포함되는지를 놓고 전방위적인 실천과 모색이 행해지던 때였습니다.
 
 
 
모임 초반에 논란이 있었던 '인권'이냐 '친목'이냐 하는 모임의 방향성 문제는 인권과 친목을 병행하는 선에서 적절히 잘 배합하고 있다. 이 운영방침은 모임 개설시부터 현재까지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해가고 있다. 
흔히 '인권'이라 하면 머리에 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서거나, 언론 매체 등에 모습을 드러내며 활동을 하는 것만이 인권운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동안 왜곡되어 왔던 동성애자들의 모습을 게시판의 글이나 OFF-LINE 모임, 소식지 등을 통해서 일반인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동성애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부각시키는 것이 가장 큰 인권운동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동안 사회 여건상 은밀하고 폐쇄된 곳에서 일대일 만남이 주를 이뤘던 성지향적인 동성애자들의 커뮤니티에 반기를 들고, 동성애자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친목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여건 마련에도 또사모는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 DDOLOVE(전 대표시삽), 「개설 1주년 특집 : 내가 느끼는 또사모」, 『또하나의 사랑』 7, 1997.2, 11쪽.

 

 
 
 
4) 친목이 필요한 인권운동, 인권운동이 필요한 친목
 
한편 당시의 동성애자인권운동을 놓고 사뭇 다른 진단을 펴는 시각도 주목됩니다. 당시까지의 운동이 대중적 저변 위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몇몇 진보적인 운동가, 일명 '스타 운동가'에 의해 추동된 측면이 있고, 이것이 곧 그 운동의 한계가 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는 앞서 보았던 바 기존의 동성애자 문화를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인권운동단체 문화로부터 분리하는 전략과도 맞물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발맞춰 1998년 7월 기존의 동인협은 보다 다양한 동성애자 단체가 포함된 협의체인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한동협)로 확대 재편되기에 이릅니다. 또한 1997년에 노선 전환을 강행한 친구사이는, 운동적 목표에 따른 소기의 성과와 더불어 회원수가 급감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동성애 운동의 본격적인 시작은 대중적인 동성애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동성애 사회를 이미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필요성을 인식해서 동성애자 인권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몇몇 젊은 동성애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그 출발점을 기존의 동성애자 문화와의 차별화로 시작한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동성애자 인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과 기존 동성애자 사회와의 간격과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초기의 동성애자 인권운동은 몇몇 단체와 대학을 중심으로 한 몇몇 스타(?) 운동가들의 역량과 지명도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이것이 초기에는 운동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나중에는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한계를 보이는 데 큰 일조를 한 것도 사실이다. 서너 명에게 의지하는 스타 시스템은 그 스타들이 빠져나갈 때 여지없이 무너진다. 이런 스타 시스템은 경험의 축적 및 사람 키우기를 어렵게 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동성애자 인권단체들이 인력난에 허덕이고 프로그램의 빈곤을 느끼는 이유도 결국 몇몇의 인권운동가에 모든 것을 의지하는 구조 때문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 홍민우(ELLUL),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또하나의 사랑」, 『또하나의 사랑』 10, 1998.10., 16-17쪽.

 

 
 

 

지난 1997년 친구사이는 정치, 경제의 판도가 뒤바뀐 한국사회만큼이나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우선 성수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기 즈음하여 그간의 활동성과를 비판하고 현 정세를 분석하여, 사랑방보다는 동성애운동단체로서 무게중심을 확실하게 옮기게 되었습니다. 쉼터로서의 기능은 새로 생긴 단체들이 구체적으로 해결해 주어 많은 동성애자들의 욕구를 해소해 주었지만, 상대적으로 친구사이로서는 활동할 수 있는 회원수가 급감하는 안타까움도 있었습니다. 
- 『친구사이 소식지』 18, 1998.1., 2쪽.
 
 
 
이에 따라, 1998년 들어서는 종전과는 반대로 친구사이가 동성애자 대중, 즉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이해를 반영하지 못하고 소수의 인자들로만 운동을 꾸려나간다는 비판이 안팎으로 제기됩니다. 하여 친구사이는 1998년 6월 13일 낙원동 신아산빌딩으로 사무실을 이전했는데, 이를 통해 친구사이 사무실이 처음으로 종로에 들어왔으며, 이후 친구사이는 현재까지 종로에 사무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무실 이전 당시 친구사이는 '특정한 사회집단에 토대를 둔 단체라면 자신의 존재 근거 가까이에 있어야 마땅하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동성애자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친구사이 활동노선의 재수정을 암시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친구사이는 동성애자 대중의 이해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였고, 또한 동성애자 대중을 투쟁의 대열로 끌어들이는 데에 실패했다. 친구사이의 활동은 대부분 소수의 인자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현재도 그러하고 있다. 모든 운동이란, 그 주체들의 능동적인 참여, 또는 적어도 문제의식의 공유가 있지 않은 한 절대 성장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사이는 그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다. 물론, 문제는 친구사이에만 있다기보다는 동성애자 커뮤니티 전반에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요하게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상업적 성격과, 역량의 부족, 아울러 무조건적인 다원주의의 주장 등이 그 요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커뮤니티 중심으로 본 1950년대 이후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역사」, 『Dyke』 1, 1998.3.14,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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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사이 낙원동 사무실 입주식 초대장, 1998.6.3.
 
 

 

사랑방 형태로 운영되던 연남동 사무실은 항상 사람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지만 '운동' 단체로서 친구사이의 운영에는 부적당한 면이 많았습니다. 사람은 많지만 '일하는' 사람은 적고, 얘기하고 놀기 좋은 '방'이긴 하지만 일하는 '사무실'은 아니라는 거였습니다. 커뮤니티가 분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친구)사이가 떠맡았던 쉘터로서의 역할 - 처음 커뮤니티에 커밍아웃하는 사람들이 이 동네 나름의 룰을 익히고 적응해나가는 학교로서의 그 기능 - 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뚝섬으로 이전할 때쯤 이미 커뮤니티는 다양한 형태의 놀이공간과 만남의 기회를 제공할 정도로 분화되어 있었고 이제 친구사이는 '인권운동'에 전념하자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뚝섬으로 이전하면서 우리는 이제는 정말 일하는 친구사이로, 인권운동다운 사업을 벌이는 친구사이로 거듭나자고 다짐했습니다.
 
거의 일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는 그 판단이 옳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명백하고 합의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항상 사무실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줄었다고 일이 예전만 못한 것은 아닙니다. 비교해보면 뚝섬 이전 후에도 친구사이는 이전에 진행되어오던 사업을 무리없이 진행해 왔고, 몇번의 공개적인 집회를 통해 활동영역을 확장시키는 발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사람들이 확연히 줄어든 것은 극복해야 할 문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가보고는 싶지만 사무실이 너무 멀고 외져서 발길이 가지 않는다"고. 그래서 저희는 지리적으로도 좀더 오기 편하고, 심리적으로도 발길을 옮기기 쉬운 곳으로 이전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종로로 옮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나은 판단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특정한 사회집단에 토대를 둔 단체라면 당연히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의 존재 근거 가까이에,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본에 충실하려 합니다. 우리가 이반으로 삶을 살아가는 몇 안되는 공간, 종로에서 다시 출발합니다. 극장이 끝난 후에, 빠에 오시다가, 혹은 종로에 일이 있어 왔다가, 그 어느 경우에라도 잠시 들러서 쉬었다 가십시오. 극장에서는, 빠에서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나누실 수 있을 겁니다. 

- 「친구사이, 종로로 사무실 이전!」, 『친구사이 소식지』 21, 1998.6., 1쪽.

 

 
 
이러한 활동방향의 재수정은, 인권운동단체가 가져야 할 대중단체로서의 '존립기반'과 '자생력'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인권운동을 하려해도 구성원들의 친목 없이는 불가능'하며, 나아가 기존의 동성애자 문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귀기울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운동적' 견지에서도 필요하다는 교훈을 남긴 셈입니다.
 
 

 

작년 한 해 친구사이는 대중단체로서의 존립기반과 위상에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해이다. 2001년도는 새로운 각오와 의지로 대중운동 단체로서의 자생력을 확보하고 인권운동 단체로서의 중장기적 비젼을 세우는 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친구사이, 『2001년 9기 친구사이 운영위 사업목표, 사업방향, 연간계획』, 2001, 1쪽.
 
 
 

 

문 : 끼리끼리가 추구하는 목적은? 좀 이분화하는진 모르겠지만, 끼리끼리는 인권과 친목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까?
답 : 추구하는 방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친목을 우선시합니다. 인권운동을 하려 해도 구성원들의 친목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레즈로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인권도 중요하지만 그 전단계로서 회원들간에, 혹은 다른 레즈들 간에 친목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는 기초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친목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레즈, 회원들간의 결속력을 다지는 여러 프로그램들을 가지려 합니다. 

- 「집중탐구 : 「끼리끼리」 회장 전해성씨와의 인터뷰」, 『또하나의 사랑』 6, 1996.8., 38쪽.

 

 
 
 
이처럼 '친목'과 '인권운동'은 결국 둘다 필요한 것이었고, 그렇기에 이러한 시행착오들은 '친목'과 '인권운동'의 두 방향을 서로 어떻게 배합할 것인가를 놓고 벌인 치열한 고민의 흔적에 다름아닙니다. 따라서 이는 운동의 뚜렷한 방향성과, 운동의 대중적 자생력 중 어느 하나가 전적으로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일 수 없습니다. 가령 앞에서 보았듯 '인권운동'을 위해서는 '친목'이 필수적이지만, 동성애자들이 모여서 노는 '친목'만으로 '인권'이 신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위에 최소한의 방향 설정, 친목을 넘어서는 '아주 작은 일' 또한 중요함을 위 사건은 함께 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 실현'의 일부가 되어야 마땅하고, 그리 되어야 활동의 자생력이 담보될 수 있기도 합니다. 
 
 

 

회원간의 친목, 회원들의 자긍심과 정체성 확립도 [...] 인권운동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춘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을 것이다. [...] 인권운동을 너무 어렵게, 혹은 부담스럽게 생각하지는 말자.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얼굴 드러낼 부담도 없는 아주 작은 일부터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변화가 올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작은 노력을 대다수가 하찮게 생각한다는 데 있다.

- 홍민우(ELLUL),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또하나의 사랑」, 『또하나의 사랑』 10, 1998.10., 18쪽.

 

 
 

 

한 가지 덧붙이자면 커뮤니티에는 친구사이에 대한 약간의 오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친구사이는 몸바쳐 일하는 활동가들만의 집단이라는 얘기입니다. 사무실에 오는 모두가 공개적인 커밍아웃을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인권운동에 바쳐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운동이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실현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느끼는 만큼의 의무를 스스로에게 강제하면 되는 것입니다.
- 「친구사이, 종로로 사무실 이전!」, 『친구사이 소식지』 21, 1998.6., 1쪽.
 
 
 
끝으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위의 글들에서 언급되는 '커뮤니티'의 용법이, 1장에서와는 달리 인권운동단체 안팎에 현존하는 동성애자 단체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인권운동단체가 활동할 수 있는 대중적 저변, 그것을 '커뮤니티'라 부른 셈입니다. 이렇게 '커뮤니티 단체', 혹은 '커뮤니티 운동'이라는 말 속 '커뮤니티'의 정의는, '우리'가 새로 만들어가야 할 커뮤니티와, 이미 존재하는 현실로서 동성애자들의 공동체, 이 둘을 다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친구사이의 비전'에 등장하는 '커뮤니티'의 용법 또한, 기본적으로 후자를 가리키는 가운데 전자에 대해서도 함께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렇듯 '커뮤니티'를 둘러싸고 벌여온 단체의 활동과 고민은, 현재의 친구사이에서도 일정한 형태로 면면히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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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커뮤니티, 하나의 '사회'라는 상상
 
 
'커뮤니티'를 놓고 이렇게 서로 다른 정의들이 오가는 모습은 일견 복잡하고 정리가 안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론 저 범주 자체가 좀 허황된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이 점에 대해 더 파고들기 전에, 이 장에서는 먼저 '커뮤니티', 즉 인권운동단체와 동성애자 대중들이 그 '커뮤니티'란 말을 둘러싸고 어떤 고민들을 겪어왔는지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것이 곧 '커뮤니티'란 말이 가지는 효용과 가치를 반쯤 드러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우리' 안의 다양성
 
먼저 인권운동단체 내부의 사례를 보겠습니다. 앞서 몇몇 운동가들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급변하는 정세 속에 포부가 큰 운동가라면 흔히 더디 가는 시대의 흐름을 자신의 힘으로 앞당기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됩니다. 느린 한 발짝 대신 앞서 세 걸음을 딛어줄 동료들이 목마른 때도 있게 되지요. 이렇게 사회와 단체의 변화 속도가 운동가 자신의 비전과 맞지 않을때, 단체 내에서 보다 뚜렷하고 선명한 노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분란이 자연스레 발생하게 됩니다. 
 

 

나는 당신이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걸 봤습니다.
참기 힘든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당신은 흥분돼있었고 분노해있었습니다.
당신은 레즈비언들이 헤테로(Hetero) 남성처럼 돼가는 걸 못참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레즈비언들이 부치·팸을 구분하여 성역할의 고정을 두는 것을 못참겠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레즈비언들이 지금의 모순을 깨지 못하고 이성애주의를 그대로 답습해가고 있는 걸 못참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런 것들을 잘못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삼삼오오 모여 히히낙낙하고 있는 레즈비언들의 모습을 정말 못참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죠. 그런 것들을 부추기는 지금의 커뮤니티가 싫다. 그곳에 내가 있는 게 싫다. 정말 오고 싶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이제는 안 올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내가 본 당신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 
그리고 나는 당신의 그 분노가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에게 못내 섭섭함과 아쉬움이 듭니다. 
레즈비언들이 이제 막 자신의 고통을 인식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정체성을 자각하게 됐고, 또 그로부터 공동체를 형성한 건 불과 1~2년의 일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몇 백년도 넘게 강제적인 이성애주의의 삶을 강요당해왔고 그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산다는 건 엄두도 못낼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기 위해 더 이성애적인 삶을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10년, 100년, 1000년도 넘게 이어온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그 고통과 억압의 시대를 지나 나를 드러내고, 우리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작업들은 지금부터 시작되고 있는 일입니다.
또 다른 세상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나는 우리의 커뮤니티에서 보여지는 여러가지 실망과 좌절과 울분과 분노를 견뎌낼 수 있습니다. [...] 
나는 당신의 울분과 분노가 그 변혁의 밑거름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해솔(또다른세상 편집부장),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 『또다른세상』 3, 1996, 3쪽.

 

 
 
또는 반대의 고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의 인권 증진을 목표로 한 단체 안에서, 정작 여느 동성애자들이 소외를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럴 때 단체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동성애자끼리 모여서 뭔가를 도모하고 싶었지만, 실은 모인 이들이 '동성애자'라는 점 외에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이에 단체는 자신들이 표방하고자 한 '동성애자'들의 다양한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리라는 악무한의 낙담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당장 단체 내의 회원들조차, 동성애자인 나 개인의 욕구를 제대로 읽어주지 못한다는 회의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섣부른 기대와 약간의 공명심 그리고 호기심을 갖고 처음 사무실을 방문했었고, 예상 밖의 냉랭한 분위기와 개인적 사정을 빌미로 두어번의 어색한 방문을 끝낸 후... [...]
심지어 개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친구사이에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까지 되더군요. [...] 어느 정도 자기 주관을 갖고 뭔가 일을 해보자고 의욕적으로 찾는 사람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만큼 사람관리가 힘든 건지...
운동이 발전하게 되면 당연히 분화의 과정까지 밟는 거겠지만, 벌써 그 수준까지 다다른 건지...

- 「편지 : CYBER SPACE」, 『친구사이 소식지』 11, 1996.4., 12쪽.

 

 
 

 

"막상 와보니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에도 열이면 아홉 이렇게 대답한다. "실망했어요. 서로 연대하고 쉽게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고 각기 따로 노는 분위기예요. 소외된 기분이 들어요."
그렇다 처음엔 사회가 정상에서 분리시켜 놓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 레즈비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그러한 단체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기와 너무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레즈비언이라고 불리우는 것 외에는 같을 게 전혀 없는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
사실 끼리끼리는 모든 레즈비언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모든 욕구들을 수용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버렸다.
- 전해성(끼리끼리 회장),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다양성」, 『또다른세상』 3, 1996, 14쪽.
 
 
 

 

준식 : 그리고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아까 나왔던 「애인이 생기면 친구사이에 계속 나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솔직하게 「애인이 생기면 안 나올 수도 있어요?라고 물어본다면 저는 확실하게 이야기할 자신이 없습니다. 이것이 제 진정한 심정입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애착을 가지고 일을 했지만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과연 「친구사이가 동성애자에게 밝은 미래를 줄 수 있냐?라고 물어본다면 아직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친구사이, 『회칙개정과 97년 인권운동의 활동 목표를 위한 토론』, 1997.5.24., 4쪽.

 

 
 
따라서 단체 내부의 구성원, 나아가 동성애자 내의 다양성과 '우리' 안의 차이에 착목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됩니다. 애초에 대중 속에 활동가가 존재하기에, 대중의 다양성을 알고 인정해야 활동가도 활동도 그에 맞게 풍요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커뮤니티'의 다양성은 활동가 입장에서 일단 들어가서 보아야 하는 대상이고, 그에 대해 일정한 경외의 감각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다양성을 그저 추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살려나갈 운동의 초를 감지하는 것은 앞서 보았듯 중요하지만, 역으로 그 '한 발자욱 나아가고픈' 운동의 감각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스밀지를 아쉬운 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대중의 감각을 익히는 일은 움직일 수 없이 중요해지는 셈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활동가와 대중의 문화를 단순한 구분이 아니라 우열을 매겨 차등적으로 나누는 사고를 극복하고, 제각각의 가능성들에 귀를 열어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로 인권운동을 한다는 것. 모든 사람에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기 다른 다양한 모습으로 - 직장이나 학교 등 다양한 사회 환경 속에서 -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서는 이 '다양성'이 잘 인정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과 의견 차이가 있다면 설사 언성을 높이면서 의견조정을 하더라도 상호 차이를 인정하면 되는데, '나하고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나하고 같아지기'만을 원합니다. 우리 사이에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면 좀더 나은 모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친구사이, 『회칙개정과 97년 인권운동의 활동 목표를 위한 토론』, 1997.5.24., 4쪽.

 

 
 

 

원고를 작성하면서도 '레즈비언의 다양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살려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휘청여야 했다. 내가 고민한 만큼 과연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의도대로 살렸는가?
- 한비(또다른세상 기자), 「커뮤니티의 새내기」, 『또다른세상』 3, 1996, 17쪽.
 
 
 
 

 

침체되어 있는 레즈비언의 활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각각의 레즈비언들의 관심과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다양한 모임과 문화공간들이 필요하고 또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레즈비언들의 힘을 하나로 응집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레즈비언들이 레즈비언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레즈비언들이 현 사회를 비판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획일성이다. 이렇게 우리가 소수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우리는 우리 안의 다름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 지금까지 각자의 레즈비언들이 다른 모습을 갖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라는 것은 각자가 살아온 경험과 상황이 달랐고 공유할 수 있는 이렇다할 레즈비언 문화와 모델이 없었기 때문이다. [...]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초로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나아가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레즈비언 모델을 찾는 것이다. 레즈비언들이 레즈비언답게 살아갈 수 없게 하는 것은 커다랗게 보면 가부장제도와 이성애제도다. [...] 앞으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인식하는 것이며 이러한 가부장적이고도 이성애중심적인 제도를 답습하지 않는 레즈비언 모델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 전해성(끼리끼리 회장), 「레즈비언 커뮤니티의 다양성」, 『또다른세상』 3, 1996, 14쪽.
 
 
 

 

친구사이나 끼리끼리에 하고 싶은 말
: 두번째는 종로-낙원동 문화는 무지한 것이고 구세대적인 것, 우리의 문화는 세련되고 신세대적인 것이라는 너와 나의 구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깥에서 보기에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죠.  

- 정혜등(또다른세상 기자), 「인터뷰 둘 : 장진석(뉴욕 친구사이 대표)」, 『또다른세상』 2, 1996., 25쪽.

 

 
 
사실 초창기 동성애자인권운동 단체의 구성원은 주로 고학력자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운동에 대중적인 기반이 넓지 않았던 것과 맞물린 문제였습니다. 이에 '커뮤니티' 내부의 계층 편중에 대해 각 단체들의 경계가 따르기도 했습니다. 단체 안에서 일정하게 동의되는 가치가 자칫 특정 계층, 그것도 상위 계층에만 국한되는 것은 운동의 입장에서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이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실제로 그 운동단체들 속에 소위 '잘난' 동성애자들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배운 사람들의 선구적인 감각도 때론 중요하지만, 대중에 보다 뿌리박은 이들의 감각 또한 단체의 활동이 살아숨쉬게 만드는 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친구사이 회원들은 대개가 기존의 종로나 이태원 등의 하위문화에 지치고 새로운 게이문화를 접하고자 모임을 찾아온 사람들이 많으며 실제로 고급게이들의 모임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회원들 중 고학력자가 95%를 차지하고 있다. [...]

- 이해솔, 「한국 동성애자 인권모임의 생성 과정과 활동 그리고 전망」, 『또다른세상』 1, 1996, 14쪽.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원칙
4. 우리는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부에서의 성적 지향성에 의한 차별을 비롯한 계급적, 계층적, 문화적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한다. 
5. 우리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조직과 유지에 기여한다. 
- 「동인련 활동보고」, 『Dyke』 3, 1998.11.1., 5면.
 
 
 

 

동성애 커뮤니티를 가만히 잘 살펴보면 한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저런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섞여있다고는 하지만 공장 근로자나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을 만나기란 흔치 않다. 고졸 이하를 만나기도 어렵다. 과연 노동자들 중엔 동성애자가 없는 것일까? 설마 그런 일이 있겠는가. (...)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건 아직까진 저변 확대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동성애 문화에 대한 반성이다. 
- 「노동자들 중엔 동성애자가 없나? - 엘리트 중심의 동성애 사회」, 『친구사이 소식지』 28, 1999.5., 4-5쪽.
 
 
 

 

그는 특이한 존재였다. 누구처럼 내세울 만한 가방끈도 자랑할만한 깨끗한 도덕교과서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스스로 얘기했듯이 20대 초반부터 낙원동 뒷골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호모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초동회’ 시절부터 종로의 게이커뮤니티와 동성애자 인권운동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가 될 수 있었다. 친구사이가 우아떠는 게이들의 자족적인 집단이 아니라 우리문화의 일부인 종로와 함께 하려한다는 의지는 그의 존재로서 넉넉히 증명되곤 했다.
- 신윤동욱, “추모사 : 겨울 허수아비, 가을바람에 잠들다 - 친구사이 전 부회장, 오준수 님의 죽음에 부쳐”, 『오준수를 추모追慕함』, 2000.2.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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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준수를 추모追慕함』, 2000.2.11, 표지.
 
 
 
2) 사회의 본원적 축적
 
그렇다면 인권운동단체 바깥의 '커뮤니티'들은 어땠을까요. 글을 많이 남기지 않았기에 과거 분들의 구술이 아니고서는 접근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 가운데 비교적 '커뮤니티'의 당시 실상을 생생히 전하는 것으로 잡지 『보릿자루』를 들 수 있습니다. 
 
1998년 10월에 창간된 게이 무가정보지 『보릿자루』는, 당시 인권운동단체에 의해 '하위문화'로 규정된 극장, 게이바, 사우나, 클럽 등 업소에 대한 정보를 가감없이 다루고, 그곳을 이용한 게이들의 후기를 싣는 등 노골적인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 잡지에 대해 당시 인권운동단체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는데, 이 잡지의 편집장은 한 인터뷰에서 그런 문화에 대해 '숨길 것이 아니라 드러내놓고 함께 이야기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는 인권운동의 견지와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동성애자 문화를 '논쟁 가능한 형태'로 끌어올리고자 했던 시도였고, 따라서 이미 존재했던 '게이 커뮤니티'를 재발견하고 음미하는 가운데 결과적으로 '커뮤니티'에 대한 인식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 일이라 판단됩니다. 돌이켜보면 이 잡지는 당시 게이들의 생활상에 대해 가장 생생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전재우(친구사이) : 『보릿자루』는 재밌는 잡지였어요. [...] 서울 같으면 상관없는데 지방의 조그만 게이 바 같은 경우에는 『보릿자루』는 상당히 중요한 정보지 역할을 했다고 봐요. 그 사람이 온갖 게이바 광고를 다 싣고, 자기 책에다가. 모든 거의 대부분 게이 바들 광고들 다 싣고 그 다음에 PC통신 이런 데서 올라오는 글들 다 자기가 퍼다가 올리고.  

- 박지훈, 「한국 퀴어 미디어의 역사와 발전」, 『한국 사회 미디어와 소수자 문화정치』,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332쪽.

 

 
 

 

[...] 진짜 어려운 것은 다른 거예요. '한국 이반 인권 운동의 흐름을 가로막고 서서 안좋은 쪽으로 끌어가려고 한다. 저질 문화를 전파시키려고 한다. 그러면서 이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창간호에도 밝혔듯이 '욕을 먹을 것이다. 욕을 하려면 해라. 하지만 내가 이반으로서 지금 현재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그런 정보는 필요하다'라는 거죠. 
[...] 옛날에는 술집도 음란 문화라고 말했어요. 2년전만 해도 인권운동가의 입에서는 하류문화라고 말하고 토론할 때도 '과연 술집에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말하던 때도 있었어요. 그럴 당시에 내가 이런 정보를 줘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죠. [...]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방문할 때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집을 보길 원하기도 하지만 평소의 지저분한 모습도 보고 싶어하잖아요. 그 사람의 본질을 보고 싶은 거예요. 한국 이반 문화가 울타리 안에 있으면 아무리 인권운동가가 아름답게 꾸며 말을 해도 실제로는 다르거든요. 90% 이상은 흔히 음란문화 퇴폐, 저질문화라고 말하는 것이고 또 그런 것에 빠져 살아가고 있거든요. 그런 것을 무조건 숨길 것이 아니라 드러내고 함께 얘기하자는 거죠. 그걸 이야기하기 이전에는 그 숨어있는 이반들은 모르는 거예요. 뭘 알아야 이야길 하건 말건 하죠.

- 「Interview : 『보릿자루』」, 『또하나의사랑』 14, 2000.4.,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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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릿자루』 8, 1999.8., 6쪽.
 
 

 

이반업소는 자주 갔는데 전 이제 안 가요. 생각이 좀 바뀌어서요. 같은 이반을 만난다는 것 그런 게 중요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이것도 사람을 알게 되구 알면서 맘에 들구 사랑도 하게 되는 건데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사랑하고 싶어서 그런 건데 넘 욕구적인 면만 많은 것 같아서 업소에는 나가기가 시러지던데용. [...] 
기본적으로 일반 남자라고 해서 아무 여자나 잡구 자려구 하거나하진 않잖아요. 우린 별종이야... 하는 거 라든가... 서로 원해서 온다는 것... 하지만 꼭 남창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전부 잠깐 알고 쉽게 잠자리를 하구 [...] 오히려 안좋은 면을 먼저 봐서 비판하며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 「21세/카페선호 : 업소가 없어져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보릿자루』 8, 1999.8., 9쪽.

 

 
 

 

한달 전부터 극장엘 나오게 됐는데 그동안 술집에 대해선 거의 정보가 없어서 못왔어요. 그리고 전 술을 못하거든요. 알아도 가기 힘들긴 했어요. 극장에서 알게 된 분한테 이반업소를 한군데도 모르니 좀 가르쳐 달라고 해서. 여길 찾아왔어요. 일반업소와 다른 점이라면 여기서는 이반이라고 끼떨어도 아무도 손가락질을 안해서 좋아요. 그리고 여기는 술 못마시는 저같은 사람이 와도 괜찮은 거 같아요. 음료수를 마셔도 되잖아요. 그런데 너무 이반업소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 힘들었어요. 단체도 많고 모임도 많고 업소도 많은 것 같은데 왜 다들 업소에 대한 정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 「31세/이태원/처음 : 극장에 오는 사람들은 아무 정보도 없어요」, 『보릿자루』 8, 1999.8., 10쪽.

 

 
     
하지만 이러한 '커뮤니티' 내의 움직임과 시도들이 충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999년 중엽, 『친구사이 소식지』엔 친구사이를 사칭한 게이들 간의 범죄가 횡행했다는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인권운동단체로서 친구사이가 당시까지 쌓아왔던 '얼마간의 신용'을 악용한 범죄였는데요. 이 웃지 못할 사건이 암시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친구사이의 이름이 이렇게 범죄에 활용될 정도로 '공신력'(?)을 가졌다는 것 이상으로, 그만큼 어느 한 단체의 영향력을 빌어 범죄가 가능했을 정도로 그 '게이 커뮤니티'의 내부가 충분히 다양하지 못한 채였음을 의미합니다. 
 
 

 

최근 이반 범죄 중에 '친구사이 회원 사칭'과 연관된 범죄들이 증가하고 있다. 차용증서까지 써가면서 수천만원을 강탈한 김모씨(52)도 친구사이 소식지를 갖고 다니면서 피해자에게 자신이 회원이라는 사실을 여러 번 강조했으며, 두 달 전 안양에서도 친구사이 회원이라고 사칭하고 다니면서 여러 명에게 수백만원을 빌렸다가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 물론 면밀히 확인한 바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은 친구사이 회원이 아니었다. [...]
그들은 막상 자신의 개인 신상이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오인된 두려움 때문에 친구사이를 기피하면서도 게이 단체로서의 친구사이 위상에 대해 얼마간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그 '얼마간의 신용'이 악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 「경계령! 친구사이 회원을 조심하라」, 『친구사이 소식지』 30, 1999.8., 1면.

 

 
 
이처럼 동성애자인권운동과 더불어 동성애자 '커뮤니티' 또한, 이른바 '사회'의 이름에 값하기 위한 본원적 축적의 시기를 함께 거치고 있었습니다. 동성애자인권단체 내에도 구성원들 간 다양성의 축적이 필요했듯이, 동성애자 '커뮤니티' 또한 이처럼 내부의 다양성이 더 담보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1994년 동성애자인권운동의 탄생과 함께, 그즈음 태동하여 1990년대 말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이태원 게이 문화는, 기존의 종로 게이 문화와 더불어 '게이 커뮤니티'가 안으로부터 다양해지는 데 큰 축을 담당했습니다. 이태원이 대두되기 전 인권운동에 몸담았던 이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아래의 글에서는, 이태원의 게이 문화를 두고 드디어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을 대중적으로 꿈꾸게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자신의 세대를 가리켜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자 '사회'가 더 이상 한 단체의 무엇으로 좌우될 수 없을 만큼, 이른바 '동성애자 대중'이란 말에 값하는 다양한 게이 문화의 축적이 그 당시 차근차근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 운동가는 '동성애자 대중'이 태동하는 바로 그 광경을 기대반, 걱정반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커밍아웃의 시대, 90년대 중반을 동성애자들이 최초로 커밍아웃의 시대로 인정한다면 그 시대가 남긴 최대의 유산(?)은 동성애자들이 이제 행복해지는 것을 대중적으로 꿈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참 많이도 두려워해야 하는 동성애자들이 이제 좀 덜 어렵게 행복을 꿈꾸게 되었다는 것–의문의 여지는 여전히 남지만–이 일차적 커밍아웃 시기가 최대한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고, 아직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바는 그것이다. 동성애 인권운동이라는 배경을 무의식에 깔고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동성애자들이 나타났다는 것, 지극히 사적인 수준에서 그리고 대단히 집단적으로 나타났다는 것.
 
이태원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종로라는 유서깊은 정거장을 지나야만 한다. 그래도 81번 버스는 달리고 우리는 지금 이태원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해 있다. 우리의 현재를 의심해보자.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고, 낭만적 사랑이라는 우리 시대 보편적 사랑의 모델 때문에 아파하는 오늘을 얘기하기 위해 이태원이라는 현실적 공간으로 들어가 보자. 지금보다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일상이, 게이들의 생활사가 민주화되기를 바라면서, 이태원이 행복으로 가는 비상구이기를 바라면서. 

- 「행복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연대 미상(1990년대 후반 추정).

 

 
  
 
3) 사회라는 상상 : 사회의 존재와 당위, 그리고 역동성
 
이처럼 게이 '커뮤니티'의 다소 혼동되는 용법과 정의는, 이른바 '사회'라는 말이 가지는 개념의 혼동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혼동되고 오독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곧, '커뮤니티'와 '사회' 개념의 중요한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게이 커뮤니티'와 '사회'를 비교해보면,
1. 게이 커뮤니티라는 말이 그렇듯이, 자기 주위의 집단만 사회인 것이 아니며, 사회는 어느 하나의 원리로 모두 연역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게이 커뮤니티란 말이 그렇듯이, '사회', 혹은 '대중'의 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본원적 축적이 필요합니다. 
3. 게이 커뮤니티라는 말이 그렇듯이, '사회'란 말에는 본래 존재와 당위가 뒤섞여 있습니다. 앞서의 사례들 속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게이 커뮤니티와, '현재 이미 그러한' 게이 커뮤니티가 섞여서 존재하듯 말입니다.
 
더불어 이러한 혼동과 중첩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본래 '사회'란 말이 갖는 역동성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이는 '커뮤니티' 뿐만 아니라 사회적 범주를 뜻하는 모든 말, 가령 '국민', '시민', '노동자', '민족', '민중' 등에도 모두 해당되는 것입니다. 가령, 
1. 그 말 모두 '마땅히 그래야 할' 규범과 '실제 존재의' 현실을 모두 포괄하고 있고,
2. 그 두 요소는 때로는 그 개념을 분열시키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분열과 합치의 동역학이 그 개념을 살아숨쉬도록 만듭니다. 
3. 따라서 이 범주 안에 속한 사람들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고도는 것이 꼭 개념 전체의 틀을 깨는 것만은 아닌 게 되고, 이 사회적 범주를 둘러싼 상상이 당장의 현실과 다르다고 해서 결코 소용없거나 허황된 것만은 아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커뮤니티'란 말 속에 깃든 사회적 실체와 운동적 당위가 당장 아귀에 안 맞는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순은 언젠가 박멸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시대와 국면에 따라 창발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사회적 에너지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1990년대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하려던 것은, 동성애자 '커뮤니티'를 이러한 '사회'의 위상으로 끌어올리려는 시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동성애자들의 존재와 관계는 이전까지의 1:1의 비밀스런 조우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이처럼 더 크고 역동적인 가능성에 내맡겨질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전까지 좀처럼 상상되지 못했던, '사회를 바꾸자'는 구호를 통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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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란 건 누군가를 위해서 혼자가 되는 일, 혼자서 가야 하는 일,
이젠 혼자가 되고 싶다, YOU! 너를 위하여...' 
(『친구사이 소식지』 7, 1994.12., 8쪽.)
 
 

 

사회의 가치관이나 제도는 상대적이고 문화적인 것이며 철저히 지배자적 관점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성에 관련된 온갖 종류의 태도나 규정 또한 시대에 따라, 사회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환상일 뿐이다. 

- 김준석, 「동성애억압과 동성애인권운동」, 『친구사이 소식지』 10, 1996.1., 6쪽.

 

 
 
흔히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 하고, 연애를 사회적 관계라 이르며, 동성애와 섹슈얼리티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닌 사회적인 것이라 부르는 연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리 1:1의 관계라도, 아무리 혼자 있을 그 시간 동안에라도, 우리의 연애에는, 우리의 삶에는 보다 믿음직한 관객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관객을 예비하기 위해, 내 살갗에 붙어있으되 사실과 규범이 뒤엉켜 무엇인지도 모르겠을 그 '사회'를 좋게 바꾸어나가는 노력과 기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다름아닌 우리가 당장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텅빈 객석 앞에서 그토록 열심히 연기하는 어릿광대 모양으로 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형이 마음편히 지낼 수 있을까. [...]
저 열심히 제 할 일 하고 부모님 속썩이지 않는 현철이가 되겠어요.
형도 늦게 시작하신 일 열심히 하시며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분이 되세요.
우리 죽을 때까지 형과 동생으로 행복하게 살아보자구요.
오랫만에 펜을 드니 좀 쑥스러운데요.
더구나 형만 보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본다니까요.
사랑해요.
 
1994.5.14.
형의 새끼가
 

- 「푸른편지 : to 형」, 『친구사이 소식지』 4, 1994.4.

 

 
 
 
 
4. 현재의 커뮤니티
 
 
너무 옛날 이야기만 한 감이 있으므로, 마지막 장에서는 현재의 '커뮤니티'와 친구사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004년 친구사이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서, 그간의 활동을 되짚고 미래를 전망하는 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친구사이의 활동은 이 10주년이라는 분기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의 활동 방향이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1) 운동의 문화적 전환
 
 

 

동성애자들의 긍정성 고취와 세력 확산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문화·예술이다. 첫 번째, 머리에 띠를 두르고 메가폰을 잡고 구호를 외치는 것보다 큰 저항 없이 저변 속으로 폭넓게 잠입할 수 있다. 일종의 "가늘고 길게" 전술인 셈이다. 두 번째, 상당수의 많은 동성애자들이 스스로 가장 잘 재주를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들이 남들보다 더 뛰어나게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다.

- 이주란(문화평론가), 「Straight Eye for Queer Guys」, 『친구사이 10주년 기념행사 : 두번째 토론회 "게이들에게 말한다"』, 2004.4.11., 8쪽.

 

 
 
당시 행사에서 동성애자인권운동의 '문화적 전환'을 촉구하는 언급이 있었는데, 이 말대로 친구사이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문화운동의 방향으로 사업의 중심축을 옮겨가게 됩니다. 이전 10년의 활동이 주로 수려한 '글'의 생산과 정치행동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이후 10년의 활동은 보다 대중적인 저변을 넓힐 문화컨텐츠 제작과 캠페인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현재 활동 중인 친구사이의 소모임 '지_보이스'도 이러한 전환기 속에 2003년 창립되었습니다. 당시의 '코러스 소모임 제안서'를 보면, 앞에서 보았던 기존의 '게이 커뮤니티'와의 분리주의적 입장이 유지되면서, '대안적 공동체'를 겨냥한 취지로 모임이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지_보이스의 활동은 처음에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로맨스적 만남'이나 '기존 게이 커뮤니티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오마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예술성과 운동성을 닦아온 과정이었습니다. 이렇듯 '커뮤니티'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은 단체의 활동이 '벅찬' 형태로 진행되면서 창조적으로 극복되고 있던 셈입니다. 
 
 

 

한국의 공개적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최근 십 년 사이 인터넷의 발달 및 친구사이를 비롯한 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들의 성장에 힘입어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대부분 온라인 상에서의 규합에 치중되었고 오프라인에 있어서도 로맨스적 만남이나 기존 게이커뮤니티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답습하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친구사이 코러스 소모임 제안서』, 200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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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회 G_Voice 정기공연 '벅차게_콩그레츄레이션!' 포스터, 2010.10.16.
 
 
 
 
2) 운동문화와 놀이문화의 접합
 
 

 

- 운동권 게이? 클러버(clubber) 게이?
의문 : 무지개 퍼레이드 때 주말 밤마다 이태원 게이바와 게이클럽의 끼순이들은 왜 안보이나?
무지개 축제를 무척 사랑한다. 우리도 이런 잔치가 있다는 사실 - 모처럼 밖에다 크게 외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게 된 사실도 자랑스럽다.
무지개 초기 인력동원을 위해 이성애자 친구들을 퍼레이드나 파티에 몰고 다녔다. 그런데 마디그라나 리우 카니발을 기대하고 끌려나온 그들 대부분이 내뱉은 말은 "무슨 축제가 이래? 빨간 띠 두르고 조선소나 중공업회사 파업 현장에 있는 것 같아." 그 때 깨달은 사실이 죽어라 목청껏 핏대를 세우며 평등을 갈망하는 운동권 게이들이 있는 반면, 뒷짐 지고 남의 일 마냥 모르는 척 하는 자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지개 축제 - 남의 일 아니다. 퀘퀘하고 비릿한 곰팡이 냄새나는 이태원 클럽에서 엉덩이 흔들던 춤 솜씨를 이왕이면 훤한 대낮에 종로 길바닥에서 보여 달라.

- 이주란(문화평론가), 「Straight Eye for Queer Guys」, 『친구사이 10주년 기념행사 : 두번째 토론회 "게이들에게 말한다, 2004.4.11., 7쪽.

 

 
 
다음으로 2004년 당시까지 진행되었던 무지개 퍼레이드, 지금의 퀴어퍼레이드가 '축제'같다기 보단 '파업 현장'같다고 지적한 위의 언급이 주목됩니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이태원의 '끼순이'와 '클러버' 게이들이 퍼레이드에 나와주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칩니다. 이는 현재의 퀴어퍼레이드를 두고 '클럽 안에서나 벗고 설칠 것이지 왜 저잣거리에 나와서 저러느냐'고 공격하는 여론들에 비추어볼 때, 참으로 격세지감을 갖게 하는 대목입니다. 10년 전 사람들의 바람대로, 퀴어퍼레이드는 이제 '운동권'만의 행사가 아닌, 명실공히 '축제'의 외형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운동하는 사람과 노는 사람이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는, 이른바 '하위문화'가 사실은 '하위'문화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 위에 가능해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업소'와 '인권운동'의 벽이 점차 낮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아래의 인터뷰처럼 과거에서부터 타진되어오던 것이고, 현재에 와 비로소 일정한 형태로 성취되게 된 셈입니다.
 
 

 

- 동성애자를 상대로 하는 사업과 인권운동이 많은 부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나아가는 서구의 풍토를 보았을 때 지퍼의 최근 움직임은 나름대로 진보적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인 사업과 인권운동, 그리고 양자의 관계에 대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할 것으로 보십니까?
: 개인적인 사업이라는 말은 잘못되었다고 봐요. 저도 처음에는 이 사업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이반들의 놀이터이자 문화공간으로 보았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말해줄 것이고, 더욱 더 돈독해지리라고 봅니다. 지퍼는 바(bar)가 아녜요. 운영 자체가 하나의 인권운동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크게 보았으면 합니다.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는 것이 아니고.

- 「Interview : 지퍼의 김사장님」, 『Dyke』 1, 1998.3.14, 4면.

 

 
 
이렇게 퀴어퍼레이드에 차려입고 나갈 수 있는 클러버, 세월호와 노동운동 집회에서 노래할 수 있는 게이 합창단, 시청농성에 연좌할 수 있는 고고보이 크루, 자살예방 캠페인을 함께 꾸려나갈 수 있는 이태원 클럽이 존재하게 된 것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와 성소수자인권운동이 오늘에 와 달성하게 된 중요한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전의 '커뮤니티'와 운동이 축적해온 고민과 활동과 시행착오 위에 꽃핀 가능성들이기도 합니다. 친목과 운동이, 운동과 놀이가, 일상과 정치가 서로 대립되지 않고 맞붙을 수 있다는 상상이 비로소 조금씩 실현 가능해지게 된 것입니다. 
 
 
 
3) 사회에 대한 이어지는 상상
 
그렇다면 앞으로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성소수자인권운동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앞서 말했듯 '사회'의 범주에 대한 상상은 당장의 현실과 다르다고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사회'를 역동적이고 풍요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커뮤니티'의 전모와 향방을 몽상해보는 것은 생각보다 유의미한 작업이 됩니다.
 
1990년대 말 동성애자인권운동에서 '상상'했던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이상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성애자의 존재를 지우는 '이성애주의'를 넘어서, 동성애자의 삶의 양식이 당당히 인정되는 '사회'를 여는 것.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동성애자인권운동이 가진 이상은 '동성애자'는 물론이요, '사회'가 이렇게 변했으면 한다는 상상과 긴밀히 연관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이반(queer)들은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소수자를 죽음같은 침묵과 자기경멸로 몰아가는 사회적 낙인찍음을 거부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삶의 자긍심으로 바꿔냄으로써 그 시작을 열고자 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시대의 그릇된 성담론에 대한 전복으로써 이성애가 다른 성적 형태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신념이자 이성애만이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라고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그릇된 이성애주의를 민주적인 문화상대주의의 질서로 바꾸어내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남근주의적 질서체계의 해체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동성애자인권운동은 단지 동성애자만의 문제가 아니며 동성애자인권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는 보다 일진보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이정우, 「동성애자인권운동 - 그 불가능한 현실의 가능성에 대하여」, 『마음003 : 서울대학교 대동제 이반문화제 자료집』, 1996, 27쪽.

 

 
 
그러나 '커뮤니티'를 둘러싼 상상이 의외로 의미가 있다고는 하지만, 시대의 국면에 따라 그 상상이 구체적인 현실과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허황된 것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10년 전 한 활동가가 동성애자인권운동을 향해 아래와 같이 일갈했던 것처럼, 지금의 '우리'는 동성애자인권운동이 어떤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 현실과 조응하여 그 활동노선이 좀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1990년대 말의 그 때처럼 보다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동성애자의 인권 증진이 동성애자를 넘어 사회의 부면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넘어, '우리'는 '당신'들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할 차례가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지난 10년의 역사 속에서 미흡하지만 동성애자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인권단체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정도 상태에 머물러 있다. 동성애자들이 어떤 인권문제를 겪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단체들은 늘어났으나, 그것이 인권운동이 깨뜨리고자 하는 '질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동성애자 해방이 인간 해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한 상황이다. 여성운동의 도전이 기존 인권운동의 몰성적 인식에 대한 반성과 운동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반면, 동성애자인권운동의 도전이 기존 인권운동의 반성과 거듭남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셈이다.

- 배경내(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친구사이와 '인권운동'의 그만큼의 거리」, 『친구사이 10주년 기념행사 : 두번째 토론회 「게이들에게 말한다」, 2004.4.11., 4-5쪽.

 

 
 
 
4) 사회의 생성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친구사이는 왜 여태 망하지 않은 것일까요? 
 
친목과 인권운동의, 다 거머쥐기 불가능해보이는 '두 마리의 토끼'의 이중과제 속에, 인권단체가 아니고도 종태원의 부상으로 제가끔의 인생을 구가하는 게이들 앞에, 좀더 투쟁적인 운동방향을 갖고 싶어하는 운동가들의 갈급 앞에, 그 뜻도 잘 와닿지 않는 '인권운동'과 '커뮤니티 단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친구사이는 그 틈바구니 속을 어떻게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친목과 인권운동, 1:1의 섹스·연애의 즐거움과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욕망 그 사이를 몸소 앓았던 경험, 그 속에서 매 순간 자신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긴장, 그리고 그 긴장 속에서 매번 생성되고 있었던 '사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회'가 처한 모순은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그 모순과 긴장이 잘 사용될 수 있도록 보다 예민한 곳으로 처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또다른 '사회'가 생겨나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둥지틀고 살 수 있는 터전이 매번 마련되는 것입니다. 친구사이는 여기에 그런대로 성공해왔고, 그렇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과 모순은 운동단체 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또한 함께 겪고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에 둘은 오늘과 같은 형태로 동시에 자라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변하지 않고 마냥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 발전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인 것이다.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변화, 발전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잘못된 사회현실은 반드시 변화, 발전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확신하며, [...] 혼자만의 고민과 노력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현실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도 해방되는 것이다. 

- 천정남,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한다」, 『친구사이 소식지』 15, 1997.8., 2쪽.

 

 
 
앞으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인권운동과 놀이의 경계는 앞으로 더욱더 바람직하게 희미해질 것입니다. 이제 무엇을 새로이 운동의 과녁으로 삼아야 할까요? 더 세련될 것들은 더 세련되고, 노련해질 것들은 더 노련해질 필요가 있겠지요. 그리고 성소수자의 현실에 직면하는 눈은, 하위 계층을 향해 내려갈 것은 더 내려갈 필요가 있을 겁니다. 게이들의 여성혐오와 트랜스혐오, 날이 갈수록 성소수자 내부에서 벌어지는 계층간 격차, 그리고 비단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이성애자들도 함께 겪고 있는 이 '사회' 전반의 어려운 이슈들, 앞으로의 시대가 가리키게 될 현실의 극점과 거기서 다시금 태어나야 할 '사회'의 힘들은 '우리' 앞에 무궁무진하게 남아있습니다. 
 
친목과 인권운동을 내처 외따로 떼놓는다 해서 '사회'가 변하지 않듯이, 친목과 인권운동을 한데 뭉뚱그려놓는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 사이의 긴장을 예감하고, 그 긴장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앞에서 보았듯 실은 어렵고 지난했던 일입니다.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동성애자인권운동이 걸어온, 서로 상반된 가치 속에서의 긴장과 그 속에서 매번 생성된 '사회'들은 그냥 획득된 것이 아닙니다. 그처럼 지금 이 시대에는 이 시대가 앓고 있는 지점이 있을 것이고, 바로 그곳으로 나와, 또 '우리'의, 우리 '사회'의 긴장을 끌고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여 사실은 과거에 비해 지금부터가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골치아파질 지도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친구사이는, 또 '커뮤니티' '운동'은 앞으로도 잘 해나갈 것입니다. 그들은 도저히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모순과 긴장의 골을 넘어 여태껏 살아남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 이 글은 필자가 작성한 『친구사이 소식지』 47호 (2014.5.24)의 「게이 인권운동, 우리 안의 다양성」에 사용된 자료와 논지를 확장한 것입니다.
 
*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친구사이 담론팀(2014.8~2015.12)에 활동하면서 '커뮤니티'에 대한 논의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힙니다. 이 자리를 빌어 담론팀과 팀원들에게 각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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