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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간 사이의 터울 #5 : 운동도 예술도 아닌 어떤 해방감
2015-07-29 오전 02: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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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7월 
시간 사이의 터울 #5 : 운동도 예술도 아닌 어떤 해방감
- 게이코러스 '지_보이스'의 창작곡들
 
 
 
'지_보이스'는 친구사이의 소모임으로 2003년 창단된 게이코러스입니다. 앞서 무대에 섰던 여러 성소수자 음악단들이 있겠지만, 창단 이후 지속적인 공연과 녹음 활동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는 게이 합창단은 지_보이스가 한국 최초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_보이스는 2006년 제1회 정기공연을 시작으로, 2013년에는 창단 10주년을 맞아 대부분의 공연곡을 창작곡으로 채운 기념 공연을 갖기도 하였고, 2014년 제9회 정기공연 '밝힘'에 이어 올해도 제10회 정기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_보이스에 대해서는 이미 「게이 남성 합창단의 문화정치학」이라는 학위논문이 작성된 바 있고,1) 이 글에서 지_보이스의 노래와 공연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과 평가가 이미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여 여기서는 지_보이스가 손수 작사·작곡한 창작곡들에 보다 집중하여, 그 속에서 그리고 있는 게이들 삶의 면면을 좇아보고자 합니다. 더불어 '남성중창단'이라는 형식이 갖는 의미와 반향, 그리고 '운동'과 '예술' 사이에서 일견 애매하게 걸쳐있는 듯한 그들의 위상을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음반에 수록되었거나 공연에 올려진 적이 있는 지_보이스 역대 창작곡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2)
 
 
1. <벽장문을 열어>(2003) : 코러스보이 글, 몸 곡
2. <피스맨>(2007) : 가람 글, 코러스보이 곡
3. <교정의 추억>(2007) : 갈라·코러스보이 글, Norma 곡
4. <이웃집 소년>(2007) : Norma·코러스보이 글, Norma 곡
5. <종로의 기적>(2007) : 코러스보이 글,곡
6. <게이 데이>(2007) : 가람 글, Norma 곡
7. <코러스보이>(2008) : 동하 글, 코러스보이 곡
8. <G_Voice di Gloria>(2008) : Norma·코러스보이 글, Norma 곡
9. <낙원동 블루스>(2009) : 천정남 글, 코러스보이 곡
10. <발칙한 고백>(2009) : Norma·코러스보이 글, Norma 곡
11. <종로의 기적 2>(2009) : 가람 글, 가람·코러스보이 곡, Norma 편곡
12. <UP>(2009) : 코러스보이 글,곡
13. <해피게이크리스마스>(2009) : 코러스보이 글,곡
14. <환절기>(2009) : 천정남·재경·가람·티나·삼군·코러스보이 글, 코러스보이 곡
15. <쉽지 않아>(2010) : 샌더 글, 코러스보이 곡
16. <길녀의 추억>(2010) : 라이카 글, 코러스보이 곡
17. <북아현동 가는 길>(2010) : 가람·재경·코러스보이 글, 코러스보이 곡
18.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2010) : 재경 글, 코러스보이 곡
19. <브라보 마이 라이프>(2010) : 천정남 글, 코러스보이 곡, Norma 편곡
20. <Congratulations>(2010) : 천정남·인관 글, 코러스보이 곡
21. <길고양이의 노래>(2011) : 타리·코러스보이 글, 코러스보이 곡
22. <어디에나 있어>(2011) : 가람 글, 가람·코러스보이 곡, Norma 편곡
23. <너의 버릇>(2011) : 코러스보이 외 글, 코러스보이 곡, Norma 편곡
24. <사랑은 하루도 사랑>(2011) : 가람 글, 코러스보이 곡
25. <나에게 가는 길>(2012) : Chan 글,곡
26. <수렁에서 건진 나>(2012) : 선가드·코러스보이 글, 코러스보이 곡
27. <엄마 아빠가 변했어요>(2012) : 호미 글, 코러스보이 곡
28. <슈퍼스타>(2014) : 상언니 글, 코러스보이 곡
29. <이젠 됐어>(2014) : 코러스보이 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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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짜' 평온함과 불편한 '진짜'
 
지_보이스의 공연이 돋보일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공연에 서는 단원들 전원이 얼굴을 공개한 채로 무대에 선다는 것에 있습니다. 공연 당일은 물론 배포되는 리플렛에도 단원들의 얼굴이 들어가므로, 지_보이스의 공연은 곧 단원들의 커밍아웃을 의미하게 됩니다. 공연은 그 점을 의식하여 무대를 꾸리고, 단원들은 그걸 의식한 채로 노래를 부릅니다. 멀쩡한(!) 게이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무대에 서서 게이의 삶에 대한 노래를 합창하는 것이 가지는 충격은,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적어도 현재까지는 여전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는 지_보이스 최고의 컨텐츠입니다. 대사회적으로 커밍아웃을 한 명망가나 활동가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반인 게이가 30여명의 규모로 얼굴을 까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다소 민망하게 들릴지 모를 '기적'이란 말의 내용을 채워주는 경험이 되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 종로의 기적이야
우리는 종로의 기적이야
- <종로의 기적>(2007)
 
 
우리가 만들어낸 종로의 기적
우리가 만들어낼 세상의 기적 

- <종로의 기적 2>(2009) 

 
 
 
물론 남성합창단이라는 형식이 가지고 있는 한계상, 지_보이스의 무대가 장르상이나 형식상으로 아주 전복적이랄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한 사람의 특출난 기예가 부각되기보단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내는 화음과 셈여림을 구현하는 것이 게이코러스의 목표이고, 가사의 내용을 봐도 게이들의 일상을 여상스레 드러내는 내용이 곡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태원 클럽에서 시연되는, 사회적 규범의 허용치를 교묘히 넘나드는 드랙 퍼포먼스라든가,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에서 제작한, 성별 정체성 사이의 차이의 감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풍자하는 '이반지하'의 음반에서 느껴지는 어떤 전위적인 감각은 지_보이스의 공연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러나 지_보이스의 공연이 결코 뭇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운 '착한 게이'의 모습만을 부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지_보이스의 창작곡이 게이들의 일상을 담고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의 여과없는 재현이 지_보이스의 공연을 생동감있게 만드는 요소가 됩니다. 가령 동성애자를 말할 때 '성애'의 측면을 빼놓고 말할 수 없고, 퀴어퍼레이드의 참가자들에게 '성애'적인 측면을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 그래서 어리석은 일이듯, 이들의 공연은 뭇사람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고 손가락질 받기 좋을 '성적'인 이야기를 피해가지 않고 당당히 드러냅니다. 이 가운데 특히 표적으로 즐겨 찍히게 될 '여성스런' 게이의 모습 또한 예외없이 표출되지요. 이렇듯 게이들의 일상에서 '성애'를 탈색하지 않고 그것을 드러냄으로서 '가짜' 평온함보다 불편한 '진짜'의 모습을 택하는 것은, 지_보이스의 공연이 갖는 중요한 정체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은 하루도 사랑 나를 또 설레게 하네
어쩌면 이번 남자는 정말 내 인연인지도
하지만 지나간 사랑, 사실은 아쉬운 사람
짧았지만 좋기도 했어 언젠가는 잊혀질 사람
- <사랑은 하루도 사랑>(2011)
 
 
 
 
무작정 나선 그 거리 / 화장실에서 광장으로
땅만 보던 눈 점점 커지고 / 무겁던 엉덩이 저절로 흔들리네 (...)
액션을 펼쳐라 길녀의 후예 / 거리는 우리가 접대한다
접대한다 / 접대한다
- <길녀의 추억>(2010)
 

 

 
자고픈 남자는 많지만 손잡고픈 남잔 너 뿐이야
(자고 싶잖아)
- <종로의 기적>(2007)
 
 
 
 
하지만 그게 아냐 정말로 궁금한 건
얼굴은 미남인지 몸매는 좋은지
또 성향과 식성인데 또 식성인데 또 식성이야
그냥 받네, 함께 노래부르네
- <수렁에서 건진 나>(2012)
 
 
 
친구 애인 본 순간 / 맙소사, 아는 사람
옛날 내 남자야 / 성향도 변했나
이젠 됐어, 난 정말 / 이젠 됐어, 괜찮아
한두 번도 아닌 일인 걸 
계속 돌려 막으면 모두가 가족처럼
(괜찮아, 즐거운 곳에선 나를 오라 하여도)살겠지
- <이젠 됐어>(2014)
 
 
 
Shout 누구든 나를 비웃으면 / Fight 누구든 날 다치게 하면
Out 삔 꽂고 달려와 / 립스틱 던지며 엉덩이 흔들며 싸워라
- <UP>(2009)
 
 
 
난 끼순이로 살거야 / 새로운 길을 만들어갈 거야
내가 원하는 사랑 안된다 하지마 
끼스럽게 사랑할래 / 난 끼스럽게 살아갈래
난 정말 슈퍼스타야 
- <슈퍼스타>(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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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당함의 그늘, 그늘에서 꽃피는 당당함
 
지_보이스의 노래 중 많은 가사에는 게이프라이드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커밍아웃을 하고, 남들 앞에 당당히 성정체성을 포함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당당해지자는 가사들이지요. 게이들에게 자긍심을 느끼게 하자는 이러한 메세지는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고, 이는 지_보이스의 활동목표이자 친구사이의 활동목표이기도 합니다. 헌데 당연히 중요한 이야기일수록 반복하다보면 뻔하게 여겨지듯이, 이들의 이런 당당함은 일견 전형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도 반복되어 이제는 시들한, 어떤 유토피아의 이야기나 운동가의 구호처럼 되려 무력하게 들리는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뭔가 이미 속되게 변해버린 것 같은 '당당한 자긍심'이 새로 그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는, 모종의 다른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유쾌하게 또 행복하게 
또 당당하게 변해가네 함께 노래부르네
- <수렁에서 건진 나>(2012)
 
 
 
 
사랑아 울어라 청춘아 노래하라
어둠 속에 빛나라 시련 속에 웃어라 
- <브라보 마이 라이프>(2010)
 
 
 
 
나는 깨달았네 혼자가 아니란 걸
나는 깨달았네 절망은 끝났다는 걸
- <벽장문을 열어>(2003)
 
 
 
 
내 마음 깊이 터져 오르는 이 불길
그 길 따라 앞으로 나가리라 / 당당하게 나가리라
- <나에게 가는 길>(2012)
 
 
 
 
 
사실 이 시대의 대중, 혹은 새로이 떠오르고 있는 이 시대의 게이 공중은 이미 꽤 당당해져 있습니다. 예전처럼 게이 문화의 인프라가 협소한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형성된 문화의 지반 위에서 흡족히 자신의 삶을 꾸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SNS로 보기 좋고 세련된 자신의 이미지를 밤낮으로 홍보할 수 있는 세상에서, 자긍심이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미 흘러 넘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당당한 사람에게 당당함을 구태여 종용하거나 방해할 필요는 없지요. '팔리기' 위해서, 더 멋진 내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드높이는 것은 이 시대의 상식이요 격언입니다. 그런데 지_보이스의 적지 않은 노래들은 그런 세련된 자긍심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세련되지 못한 상처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당장 눈앞에 멀쩡해보이는 것이 이리도 중요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종종 그 멀쩡한 외양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더구나 게이들의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게이가 처한 삶의 조건에 대해 잘 깨닫지 못할 때가 더욱 많습니다. 정작 그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너무도 번연한 문제이기에, 거꾸로 하루종일 그걸 의식하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자기가 처한 조건을 전반적으로 적당히 잊고 사는 것이 현대의 인간과 게이들이 취하는 주요한 처세술입니다. 지_보이스의 노래는 바로 그 잊고 살았던 우리의 조건들을 끄집어냅니다. 
 
 
 
모두가 즐거운 자리에 한참 동안을 웃고 떠들다
흔들리는 뒷골목에 막힌 숨을 게워내네
이 세상엔 뿌연 안개같이 내가 아니란 얘기들만
내 목소리는 어디에 
- <종로의 기적 2>(2009)
 
 
 
 
 
아 이렇게 사는 나
난 정말 게이가 맞을까 게이가 맞을까
- <게이 데이>(2007)
 
 
 
 
 
때로 시간은 거꾸로 도는 시계바늘
- <나에게 가는 길>(2012)
 
 
 
 
 
특히 게이들의 그늘 중에 가장 흡인력이 강한 것은 '성애' 가운데의 절망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없다는 공포 말이지요. 이는 커밍아웃 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커밍아웃한 이후에도 여전히 겪게 되는 문제입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추인하는 일은 연애를 위한 첫걸음일 뿐, 그것 자체는 연애의 진행과 완성에 그리 큰 도움이 못됩니다. 그렇게 '데뷔'해서도 겪게 되는 '식'과 '관계'의 거미줄과 '성애'의 절망 가운데, 인간이면 누구나 힘들 부분과, 게이라서 이렇게 꼬이게 된 내 팔자의 문제는 쉽게 뒤엉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 상태가 다른 누군가의 멀쩡한 행복과 비교되는 순간, 사람들은 걷잡을 수 없는 기분에 빠지게 되지요. 이 '당당한' 세상에 나만 혼자 낙오된 것 같은 느낌 말입니다.
 
 
 
우리라면 좋았을 시간 동안
하늘에 고백한 사랑 원망이 되어
-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2010) 
 
 
 
 
 
나를 떠난 당신 / 내가 버린 남자
이젠 믿지 않아 / 믿고 싶지 않아 (...)
용기 없는 사람들 / 지쳐버린 사람들
생각말자 취해 버려 / 우리의 낙원이여
- <낙원동 블루스>(2009)
 
 
 
 
 
사랑에 아파하던 널 위로하며 / 부러워 울던 날들
말할 수 있는 너의 사랑 너의 고민 / 차라리 행복인 거야
말할 수 없는 나의 사랑은 가슴에 묻어도 죄라서
- <브라보 마이 라이프>(2010) 
 
 
 
 
 
이렇게 당장에 멀쩡해보여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초자아처럼 자리하고 있는, 당당하게 사는 것이 이미 상식이자 시민권이 된 사회에서 자신의 뒤를 돌아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가운데 게이의 그늘을 노래하는 지_보이스의 곡들은, 내가 살고 견디기 위해 스스로 굳혀야 했던 두터운 꺼풀을 파헤치고 벗기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내가 처한 새삼스런 삶의 조건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서러운 것이 그저 괜찮은 것이 아니라, 서러운 것이 서러운 것으로 정확히 겨누어지는 느낌, 그러면서 속이 풀리고 감정의 중추가 다시 세워지는 느낌 말입니다. 그러면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당당함이 아니라 내가 바로서기 위한 당당함이 체감되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뻔한 자긍과 뻔한 프라이드와 뻔한 당당함들이, 어렵게 직면한 제 마음속 절망의 깊이에 견주어 새로이 그 의미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밤 나는 보았네
그 어떤 기도보다도 아름다웠지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면서
누구도 가질 수 없는 하늘을 나누고 있네
- <길고양이의 노래>(2011)
 
 
 
 
 
아현동에 가줘요 내 가난한 동네 
못생긴 내 어깨가 한뼘 더 자란 골목
노래 하나쯤은 저절로 만들어지던 
이 길에서만큼은 나 주인공 되어
- <북아현동 가는 길>(2010)
 
 
 
 
 
가자 가자 언덕으로 
꽃바람 부는 언덕으로
그대 서러움 향기가 나게 
가슴에 꽃을 걸자
- <환절기>(2009)
 
 
 
 
 
그 때 반짝 눈뜨게 되는, 게이로서의 자신, 나아가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있습니다. 당장 멀쩡하기 위해 속을 긁어 갖다바쳤던 기억과, 내가 인간이길 바라지 않았던 누군가의 목소리에 대항해, 비로소 내가 한 명의 충일한 게이이고 인간임이 조용히 추인되는 그 짧은 순간을, 지_보이스의 노래들은 가만히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간의 모든 상처와 대속을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가 아닌, '세상의 죄를 사한다'는 말로 대신하는 대목은, 멀쩡한 세상 가운데 열등한 무엇으로 자리매김되고 그저 없어져도 되는 것으로 치부되던 한 개인의 조각난 내면이 극적으로 들어올려져 제 빛을 보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제껏 중요했던 것들이 중요하게 않게 되고,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중요하게 되는 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역전과 회심과 치유의 경험이란, 지_보이스가 해낸 꽤 멋진 성취라 해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나 이제 떠나려 해 
이 세상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이런 나를 이해하지마 
나도 이 세상 용서할 마음 없으니
- <브라보 마이 라이프>(2010)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 
사랑 또 사랑이었네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 
사랑 또 사랑이었네
-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2010)
 
 
 
 
 
 
 
3. 예술도 운동도 아닌 어떤 '해방감'
 
물론 지_보이스의 앞날이 그저 밝은 것만은 아닙니다. 일단 남성합창단이라는 형식으로 단원들의 음악적, 퍼포먼스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울 수도 있고, 당당함이 전형으로 변하기 쉽듯이 게이들의 아픔과 상처도 자칫 상투적으로 여겨질 위험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게이 사회의 성장에 따라 커밍아웃을 하는 문화공동체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고, 따라서 이전에 누려왔던 지_보이스의 상대적인 이점이 퇴색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물론 전체 게이 사회로 보았을 때는 환영할 일이지만요.
 
그렇다면 만약 게이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얻게 되면, 이 합창단의 존재 의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요. 가령 어떤 분의 말대로 게이인권운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게이인권운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어떤 게이도 억압받지 않는 날이 오게 될 때, 이 합창단은 기쁘게 소멸하면 되는 것일까요?
 
 
 
성마른 매미소리에 내 노래 묻히고
수줍었던 열정은 푸르던 날들 
세월 따라 스러졌네
- <교정의 추억>(2007)
 
 
 
 
아쉽지만 그 날의 도래는 먼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온갖 이름의 동성애 혐오단체가 새로이 부상하고, 나아가 평범한 '시민들'이 스스로 들춰보지 않은 무지의 구름 가운데 얼마나 도저한 구조적 혐오와 포비아가 자리하고 있는지 차례로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 아래라면, 지_보이스는 아직은 그 수명을 낙관해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더불어 게이들의 자긍과 절망을 번갈아 직관하는 그들의 감각이, 적어도 당분간은 전형과 상투의 늪을 피해 요령있게 빛을 발할 것이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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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표로 벅찰 해방 
화음으로 걸어맬 어깨
- <종로의 기적 2>(2009)
 
 
 
 
우린 더 행복해져야 해요 
그래서 해야 할 일이 많아요
고난을 이겨낸 당신을 위해 
Everybody, congratulation
- <Congratulations>(2010)
 
 
 
 
2015년 5월 16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IDAHOT)에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노래패 '함께꾸는꿈'과 지_보이스가 한 무대에 선 일이 있었습니다. 두 합창단은 한 목소리로 지_보이스의 창작곡인 <Congratulations>을 불렀고, 지_보이스의 율동을 다같이 선보였습니다. 해직 노동조합원의 목소리와 게이코러스의 목소리가 한 노래에서 섞이는 이 광경은, 절망의 깊이에서 희망과 자긍을 발견한 어떤 소수자의 회심이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과 눈을 맞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꼭 네가 얘기해줘 
사라지지 않도록
- <북아현동 가는 길>(2010)
 
 
 
 
끝으로, 게이들의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목표로 활동하는 이런 아마추어 합창단이 늘 직면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너희들은 운동을 하는 거냐 예술을 하는 거냐'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의 속내에는, 이런 합창단의 활동이 애초부터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예술로 치닫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고, 나아가 그런 줄타기가 결과적으로는 운동이나 예술 중 어느 한쪽을 택해서 정진하는 것보다 '열등'하다는 의식이 깔려있기도 합니다. 하긴, 지_보이스의 활동에 운동이랄 수도, 예술이랄 수도 없는 구석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 '중간'의 '줄타기'를 적절히 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은 제하고라도요.
 
그러나 그들의 위치는 애초에 어떤 '중간'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두 극점 사이에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을 애매한 '중간'이 아니라, 엄연한 또 하나의 극점이요, 경지이고 단계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예술'이나 '운동' 중 어느 한 극점에 있지 않다고 해서 '열등한' 추구가 되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활동은 얼마든지 운동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노래가 설령 운동이 아니면 어떻고, 예술이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애초에 그들이 달리 추구하고픈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떤 치유와 성취와 해방감이 얻어진다면, 어느 누가 그것을 '어중띤' 무엇이라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 해방감의 실체가 궁금하시다면, 지_보이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원들을 한번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그들 중 몇몇은 분명히, 무언가 무겁고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운동? 그런 거 잘 모르겠고 전 그냥 노래가 좋아서 무대 서는 건데요?"
 
 
 
_
 
1) 배재훈, 「게이 남성 합창단의 문화 정치학」, 연세대학교 문화학협동과정 석사학위논문, 2012 ; 배재훈, 「게이 남성 합창단의 문화정치학」, 『여/성이론』 31, 2014.11.
2) 위 목록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친구사이 20년사>, 2014, 64-66쪽의 내용을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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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profile

모쿠샤 2015-07-29 오후 18:20

아직까지 지 보이스 정기공연을 본 적이 없는 저는
이 글을 보니 10월에 있을 10회 정기공연이 무척 기다려집니다^^
profile

이욜 2015-07-30 오전 02:44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없다는 공포....
공감
profile

기로 2015-07-31 오후 21:31

너무 좋은 글.
읽다가 몇번이나 울컥했네요

그들의 위치는 애초에 어떤 '중간'의 형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두 극점 사이에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을 애매한 '중간'이 아니라, 엄연한 또 하나의 극점이요, 경지이고 단계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예술'이나 '운동' 중 어느 한 극점에 있지 않다고 해서 '열등한' 추구가 되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활동은 얼마든지 운동이기도 하고, 예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노래가 설령 운동이 아니면 어떻고, 예술이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애초에 그들과 달리 추구하고픈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어떤 치유와 성취와 해방감이 얻어진다면, 어느 누가 그것을 '어중띤' 무엇이라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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