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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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커밍아웃’ #2]
지금 우리, 커밍아웃을 말하다 : 젠더별 젊은 친구들의 고백
미국에서 ‘10월 11일’은 무슨 날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미국 최대 LGBT인권운동 단체 HRC(Human Rights Campaign)에서는 매년 10월 11일을 'National Coming Out Day'로 정해, 커밍아웃한 LGBT들을 축하하고 커밍아웃의 중요성과 오늘날의 현실,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는 행사를 가진다고 한다. 아직 커밍아웃에 대해 대놓고 말하기 힘든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하면, 여간 부러운 게 아니다.
▲(좌)HRC의 'National Coming Out Day' 포스터 /
(우)커밍아웃한 영국 수영선수 ‘톰 데일리’의 인터뷰 ⓒHRC
과연 커밍아웃은 하는 사람에게, 또한 받는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보고서에서는 커밍아웃의 의미에 대해 해방(부자연스러운 자신 및 성역할에 대한 사회적 압력으로부터의 해방), 받아들여짐(상대로부터 나의 정체성이 받아들여짐), 안전망(내 정체성을 받아들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안전망), 그리고 사회운동(사회적 편견을 깨고자 하는 노력)으로 얘기한다. 그렇다면 우리 친구들은 커밍아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과연 모두가 커밍아웃을 좋다고 보고 언제든 누구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번 ‘지금 우리, 커밍아웃을 말하다’를 통해, 다양한 성 정체성/성적지향별 젊은 친구들의 고백을 들어보았다.
규환(게이)의 이야기
100번째 커밍아웃
“남자친구는 잘 있어?”
어느 날 둘만의 술자리에서 한 동료가 내게 물었다. 순간 당황한 나는 “여자친구?“라고 되물었다. 평소 내가 끼를 부리고 다녀서 벌써 내가 게이인 걸 눈치 채고 ‘지금 나를 떠보는 것인가?’ 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첫 사회생활인데 벌써 이렇게 준비도 없이 커밍아웃하게 되는 건가?’하고 말이다. 나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을 때, 그녀는 오히려 그런 내 반응에 당황한 듯 나를 다그치듯이 이야기했다. “어제 외박한 거 같은데, 남자친구 부산에 온 거 아니야?”
그녀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인즉슨 두 달 전 회식자리에서 내가 그녀에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내 성 정체성을 알고 난 뒤 줄곧 나를 배려해왔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성애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애인이 부산에 내려왔을 때 외박을 하고 같은 옷으로 출근을 몇 번 했더니, 사무실엔 내가 밤마다 해운대에서 여자를 후리고(?) 다닌다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런 민망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또 어쭙잖게 “그런 게 아니라…“라고 해명할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스스로에게 놀라웠던 점은, 우선 조직생활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점과, 그러한 사실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커밍아웃이 내게 대수롭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내 무딘 성격 탓 일수는 있어도, 스무 살 첫 커밍아웃을 앞두고 밤새 잠 못 들었던 때를 기억하면 이제는 내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 상황 자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간 괜히 마음을 쓴 그녀에게는 민망한 순간이 되었지만, 적어도 내게는 내 인생에 있어서 커밍아웃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이제는 일상에서 내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밍아웃은 내게 많은 고민을 던진다. 그 중심엔 가족이 있다. 작년에 누나가 엄마에게 나를 아웃팅하는 바람에 집에서 쫓겨나 지내며 마음 졸였던 시간이 있었다. 이왕 엎질러진 물, 차라리 잘됐다 싶기도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준비되지 않은 커밍아웃은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따금 상기한다. 커밍아웃은 툭 내뱉고 끝나는 게 아니라, 입 밖으로 꺼낸 그 순간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같은 성소수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 그들에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커밍아웃은 어떤 숙제와도 같다. 그러려면 이번처럼 내가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을 잊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날, 터놓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한참 동안 그저 서로의 황당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이 친구는 고맙게도(?) 자신을 바이섹슈얼이라고 내게 커밍아웃했다. ‘아, 세상엔 이렇게 많은 성소수자들이 있구나.’ 우린 그렇게 맥주 한 잔을 주-욱 들이키고, 서로를 향한 많은 이야기로 밤새웠다. 아, 물론 술값은 내가 냈다.
황이(게이)와 친구들(이성애자)의 이야기
황이는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오랫동안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갑작스레 그 자리를 뛰쳐나와 문자로 커밍아웃을 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모두 황이 곁에 남아 주었고, 지금은 몇 년이나 지난 이야기. 이번 기획을 통해 다시금 기억을 짚어보았다.
황이 : 내가 커밍아웃 했을 때 느낌은 어땠어?
S : 나는 아무렇지 않았어.
D : 애초에 게이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안 좋아서, 우리가 다시 못 볼 것 같았어. 왜 안 좋았냐고? 이유는 없어. 왜인지 생각해 본 적도 없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었거든.
T : 얘가 괜찮을까? 하고 생각했어. 나는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너희 집 컴퓨터를 봤더니 게이 야동이 있었고, 사실 네 성격이 조금.. 감수성이 풍부해서 여성스러웠달까. 말싸움하면 삐치고 말이야. 물론 편견이었지만 그런 것 때문에 혹시 네가 게이가 아닐까 짐작은 했었거든. 한편으로는 왜 꼭 술 먹고 이런 얘기를 하나 싶기도 했고. 진지하게 했으면 더 좋았을 걸.
Y : 안 믿었다. 한 동안 안 그러더니 또 술 취해서 지X하는구나 싶었지.
황이 : 커밍아웃 후 조금 지난 후에 느낌은 어땠는데?
S : 지나고 나서 네가 그 동안 힘들었겠다고 생각은 했어.
D : 네가.. 비행청소년 같은 느낌.. 되돌릴 수 있다고도 생각했었던 것 같아. 네가 종로 간다는 말을 들으면 가출 청소년 잡는 심정으로 말리고 싶었다고.
T : 별로 변화는 없었어. 오히려 짐작이 확신이 돼서 더 의식하지 않게 됐어. 우리는 오래 본 사이잖아? 오래 본 사실로 어색한 부분을 메우게 되니까.. 그러고 보니 네가 말한 시기도 제법 적절했던 것 같네.
Y : 진짜인 걸 알았을 때는 고민이 많았어.. 너랑 목욕탕도 같이 갔잖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이해도 안 갔어. 널 안 볼 생각은 못하겠고, 게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에 널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걱정했었어. 혹시 내가 어색하게 대하는 건 아닐까, 그게 너한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
황이 : 지금은 어때?
S : 지금도 사실 별 생각 없어. 전부터 나는 편견이 없었으니까. 아, 그런 건 있어. 같이 종각에 놀러갔을 때 신기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웃팅에 대해서 안심하고 그곳에 가는 사람들이 나에게 노출되는 것이 더 곤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네.
D : 전에 비하면 좋아졌지. 특히 널 따라서 게이들과 몇 번 어울리면서 맹목적이었던 거부감이 점차 사라졌어.
T : 네가 우리 말고도 더 많은 합리적인 사람들 속에서 대우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싶네. 이 X같은 정권 아래서 그런 스트레스라도 받지 말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
Y : 나중에 널 만났는데 그냥 웃기더라. 이반 가라오케 갔던 거 기억하냐? 난 널 정말 오래 봤는데 말로만 평생 친구였지, 사실 오랫동안 너한테 속은 거 같아서 너에 대해서 더 알아야할 것 같은 기분으로 간 거였어.
황이 : 커밍아웃 이후로 나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 점이 있다면?
S : 전혀.
D : 인간관계에 대한 건 전혀 바뀌지 않았지. 다만 게이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게 되는 계기가 너였던 만큼 평가도 당연히 달라졌을 거야. 구체적인 건 모르겠지만.
T : 네가 연애 이야기를 하더라. 만나고, 헤어지고, 전에 만났던 이야기. 솔직히 일상적인 이질감이 없었던 건 아니고. 하지만 네가 애인을 소개시켜 줄 때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어. 네 애인이 너무 여성스러울까봐 걱정도 했었지만. 물론 편견이었지. 결론적으로는 보기 좋았어. 난 너 모태솔로일 줄 알았거든.
Y : 널 더 이해했다는 것 정도.
황이 : 동성애자에 대한 생각은 혹시 달라졌을까?
S : 게이는 여성스러운 면이 무조건 있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구나 싶었지.
D : 나도 여자 같은 남자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 됐다는 건 알겠어. 지금은 막연한 거부감도 거의 없고.
T : 주위에 흔하게 있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실제로 그렇다는 걸 경험했어. 하나 또 재미있는 건 왠지 동성애자인 것 같은데, 내가 먼저 나는 당신 편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졌다는 거야. 물론 그건 실례겠지만. 그런 걸 숨길 필요 없이 서로 어울리고 싶은 거지.
Y : 이반 가라오케. 거기 너무 재밌더라. 우리 몇 번이나 갔었잖아. 나 사실 우리 직원들과도 거기 갔었어. 그 사람들 다음에 또 가자하더라. 게이들도 똑같이 노는 똑같은 사람들이구나 싶었대. 나도 어쩌면 보수적인 생각 때문에 어색했던 것 같은데, 네 전애인 만날 때도 어색하지 않았던 거 보면 생각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네.
우야(레즈비언)의 이야기
초등학교 4~5학년 무렵, 아마도 그 때부터 나는 나를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성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했던 때였던 것 같다. 내 몸은 보통 여자의 몸과 똑같은가? 나 혼자 특별한 몸을 가진 게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곤 했다. 같은 반 여자 친구들하고 놀 때에도 ‘남자니까 지켜 줘야해.’ 이러면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던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가수 팬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나랑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짧고, 남자처럼(?) 입고 다니고, 언니라고 부르지 않고 누나라고 부른다거나. 그런 친구들과 만날 때는 굉장히 편했다. 그러면서 여자인데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처음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다. 지금 보면 그 관계를 동성애? 이성애?로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어쨌든 연애를 했다.
그 이후, 학교 친구들 중 몇 명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커밍아웃’이라는 말은 몰랐지만 친구들한테 “나는 여자를 좋아하고, 현재 여자친구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 모두 혐오하거나 경멸하거나 그런 반응이 아니라 ‘너는 그럴 것 같아’ 또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아’ 식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굉장히 편하게 학교를 다녔던 것 같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중고등학교 때보다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더 이상 미성년자가 아니라 성년자고 다들 대학생인데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매우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같이 학회를 하던 친구가 길을 걷던 중에 갑자기 “너 그런 이상한 애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 같아서 이제 더 친하게 지내야겠다.”고 말했다. 그 때 대학교에서는 커밍아웃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좋아하는 수업이 있고, 그 수업으로 인해 많은 것들을 느꼈으면 교수님께 메일을 보내서 커밍아웃을 하곤 했었다. 특히, 수업 시간에 대안미디어를 이야기하며 ‘레주파 L양장점’을 알려주신 교수님께 감사하고 고맙다는 메일을 보내고, 지금까지도 계속 연락을 드리고 있다.
그 이후, 직장에 들어가고 커밍아웃을 할 생각조차 못했던 것 같다. 퀴어 커뮤니티에서 너무 즐겁고 재밌고 편하게 살아오다가 일반 커뮤니티에서 생활을 하니까 어려운 지점들이 많았다. ‘여자가 여자답게 다녀야지. 그러면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 ‘가장 좋은 공동체는 가족공동체다. 네 나이면 결혼할 준비를 해야지.’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굉장히 힘들었다. 그래서 입을 닫았다.
지금의 직장에서는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해서 직원들 모두가 알고 있다. 굉장히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여자친구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성소수자 활동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이제는 부모님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아닐까 고민을 하고 있다. 가장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들, 가장 지지받고 싶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아직도 고민 중이다.
커밍아웃이라는 게 말하는 사람도 준비가 잘 되고, 듣는 사람도 준비가 잘 됐을 때 하는 게 좋은데 그 타이밍을 어떻게 맞추는가, 알 수 있는가 이런 게 어려운 것 같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더 잘 커밍아웃을 할 수 있을지 알아가야 할 것 같다.
왁킹(트랜스젠더)의 이야기
나의 닉네임은 왁킹. 현재 친구사이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MTF 트랜스젠더이다. 1년 전부터 친구사이에 처음 나오게 되었고, 나와 맞는 성격의 단체가 아니었지만 성소수자라는 큰 굴레에서 보면 전혀 다르지 않은 성격이기에 지금도 계속 이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웠다. 성적지향/성별정체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 움직이는 많은 사람들, 또 아직 뿌리 깊게 자리 잡아 있는 사람들의 혐오와 그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 이렇게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우며 대부분의 성소수자들의 마음에 항상 남아 있는 것이 하나 보였다. 바로 ‘커밍아웃’이었다.
커밍아웃.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천차만별인 단어다. 누군가에겐 단지 인생을 살며 지나쳐가는 하나의 단계이고, 다른 누군가에겐 평생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며, 하고 싶으나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으면서도 나 역시 아직 세상은 그들 모두가 커밍아웃을 할 수 있는 곳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다른 모든 성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MTF 트랜스젠더에게 커밍아웃은 좀 더 힘겨운 여정이다.
나는 2013년 7월, 21살 때 가족들에게 커밍아웃을 했다. 사실 그 때 커밍아웃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커밍아웃을 해야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을 뿐 이렇게 일찍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이미 나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군대’, 이 단어 하나에 대한민국의 MTF 트랜스젠더들은 반강제적인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 기로에 놓일 것이다. 20대 초반에 이뤄지는 신체검사와 ‘군대는 일찍 다녀와야지’라는 어른들의 마인드는 나를 커밍아웃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커밍아웃을 한 이후로 나는 억압에 시달리는 시간을 보내야했다. 정신적인 준비는 되어있었지만 물질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지내야 했다. ‘커밍아웃은 할 것이라면 일단 자신이 독립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을 때 하는 것이 좋다.’라는 말이 뼛속 깊게 다가왔다. 남이 아닌 가족이라는 피로 이어진 관계 안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이 슬펐고 힘들었으나, 수많은 다른 가정도 같은 상황을 겪으면 별반 다를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면 결국 해결될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안 그래도 힘든 일 조금이나마 더 수월하게 갈 수 있는 문제를 MTF 트랜스젠더는 더 힘든 길을 걸어야 한다.
이런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커밍아웃에 대해 조금 더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면서 커밍아웃은 정신적, 물질적인 준비가 모두 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커밍아웃을 할지를 자신이 정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주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좀 더 깊숙이 생각해 봐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커밍아웃을 한 상황이라든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야. 빨리 하렴.’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상황에 상관없이 휘둘리는 것은 좀 더 힘든 길을 가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들도 커밍아웃을 강요, 혹은 억압하는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된다. ‘커밍아웃을 한 것은 정말 축하할 일이지만 커밍아웃 하지 못한 것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마인드를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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