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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22 02:51

<펌> Queer Mapping

조회 수 5609 추천 수 78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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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 Mapping in Seoul

1990년대 가장 기억될만한 시인 기형도. 그는 자신의 첫 시집이자 유고집이 된 ‘입속의 검은 잎’이 발간되기 몇 달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1989). 그가 사망한 장소는 서울 한복판, 종로의 심야극장인 파고다극장. 이곳은 동성애자들의 크루징 밀실로 악명 높은 공간이었다. 시인이 죽고 10여년 후, 그 위험하고 치명적이며 유혹적인 거래가 이뤄지던 이 극장도 파란만장한 시대를 마감한다(2002). 마치 그곳에 그런 공간이 있었다는 것조차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채 조용하고 초라하게…

시인의 시는 지금도 대중과 평단의 열광적인 주목을 받고 있지만,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절대적인 ‘사실’은 심지어 그에 관한 논문에서 조차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의 시 전편에 깔려있는 축축하고 농밀한 습도가 파고다 극장의 비내리는 스크린 앞에 ‘서있는’ 동성애자들 사이에 감도는 습도와 그대로 닮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세계는 다만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란 표현으로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하게 포장돼 있을 뿐이다. 시인의 동성애적 성정체성 앞에서, 시 속의 무수한 동성애적 메타포와 공간 앞에서 이성애자들은 애써 눈과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동성애에 대한 거부가 팽배한 서울이란 공간에서 동성애자 공간을 맵핑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종로와 이태원이란 두 거점을 중심으로 퍼져있는 동성애자의 공간이 마치 격리된 유배지에서 세포증식하듯 비가시적으로 퍼져있기 때문이다. 시인과 극장의 경우처럼, 이 공간들은 사회의 보편적인 인식과 가치, 내지는 적어도 묵인을 기반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다.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의 인식지도에 동성애라는 구역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 어떤 서울지도를 펼쳐봐도 동성애자의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2년 전 Keith Haring의 전시를 알리는 TV뉴스에도, Robert Mapplethorpe의 작품이 전시되는 갤러리에도, 미시마 유끼오 소설의 작자소개글에도 그들의 동성애적 정체성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유교주의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에 대한 위선적인 태도는 동성애자의 공간을 음지로만 엄격히 한정지었다. 1960년대 근대적 의미의 동성애자들이 최초로 모이기 시작한 장소도 성적 거래만이 가능한 어두컴컴한 극장이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7,80년대의 서울의 게이바들도 동성애자들이 모여드는 극장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퍼져가고 있었다. 밤이 되면 공동현상이 일어나는 도심의 극장을 중심으로 생겨난 게이바들은 극장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며 철저한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짝짓기의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자정이 다 돼야 영업을 시작하는 간판조차 내걸지 못한 게이바를 비밀스럽게 벨을 누르고 출입하던 시절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전 얘기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게이씬이 그랬다.

파고다 극장을 중심으로 동성애자들의 게토를 형성해 온 종로는 한국전쟁 이후, 사창가가 밀집해 있던 공간이었다. 그러던 것이 도시개발의 일환으로 사창가가 철거되기 시작했고(1968), 이들이 철거된 황량한 뒷골목에 게이바들이 하나 둘씩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는 지금까지도 음습하고 더럽고 냄새 나는 도심의 전형적인 뒷골목을 형성하고 있다. 공간의 정체성은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들의 경험과 사유에도 영향을 미쳐 이 거리에 게릴라들처럼 숨어있는 게이바들의 은폐되고 금지되고 닫혀있는 공간에서 게이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언어화해내고 서로에게 동질적 유대감을 갖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이 공간들은 게이들로 하여금 자괴심과 자기부정을 부추겼다. 따라서 종로의 게이바에서 게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성관계를 전제로 한 거래와 교환뿐이었다. 섹스하고픈 대상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단 하나의 판단기준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평가되는 공간에서 전인격적인 만남이란 당연히 있을 수 없었고, 게이 커뮤니티와 공동체 의식을 기대하는 것 역시 넌센스였다. 종로의 게이들은 아무리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도 자신의 타입을 찾아내는 놀라운 감각을 발전시켰지만, 이런 기형적이고 말초적인 발전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공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이 암울하고 조악한 일명 종로시대에 일대 지각변동이 찾아온 것은 90년대 중반이었다. 1995년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명문대학의 동성애자 모임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 동성애자 인권운동 협의회’가 발족된 것이다. 동성애자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굳게 믿고 있던 한국사회에서 이들의 집단적 커밍아웃은 일대 사건이었다. 특히 이들 커밍아웃의 보다 직접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옷장 안에 숨어있던 숨은 동성애자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정신질환 취급 받던, 스스로도 부인하던 자신의 성정체성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성찰하는 계기를 부여받은 셈이었다.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설명해낼 그 어떤 언어도 갖고 있지 않던 이들에게 사회적 엘리트들의 가시적 커밍아웃은 그 무엇보다도 설득력 있는 언어로 작용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인터넷이다. 인터넷이란 공간을 통해 스스로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공유하고 관찰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보다 많은 정보와 언어 그리고 동질적 구성원을 제공해 주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정체성에 막 눈을 뜬 동성애자는 더 이상 더럽고 조악한 도심 뒷골목에서 게이공간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졌다. 낯설고 낙후된 게이공간에 커밍아웃의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데뷔’하지 않고도 밝고 편안한 자기 방에서 수많은 동성애자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주로 밤에만 출현하던 게이공간에 비해 언제나 이용 가능한 인터넷 공간은 시간의 확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게이공간을 점유하면서 느껴야 했던 암울한 자기비하와 음습한 자괴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인터넷이 가져다 준 혜택이었지만 동시에 대가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는 잠시 후 살펴보자.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태동과 인터넷의 등장은 분명 한국의 동성애자들을 추동하는 힘이 되었다. 스스로의 정체성에 눈을 뜨는 연령도 과거보다 낮아졌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자처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런 변화속에서 게이메카로 명실상부했던 종로는 새롭게 떠오르는 이태원에게 점점 그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태원에 새롭게 등장한 초대형 댄스클럽 ‘스파르타쿠스’는 종로의 낙후된 게이바들을 순식간에 정리해고 시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주말만 되면 젊은 게이들은 이태원으로 몰려갔고, 서구화된 공간이 주는 경쾌하고 가벼운 해방감을 즐기기 시작했다. 주로 끈적거리는 시선과 술잔만이 오가던 종로에 비해 이태원은 댄스클럽이 주는 즐거움과 모던함이 주는 만족감이 존재했다. 인터넷을 통해 등장한 많은 동성애자들의 모임도 주로 이태원에서 소화되었다. 대규모의 인원을 수용하기에 종로는 너무나 열악했고, 젊은이들의 기호를 따라잡기엔 너무나 낙후됐다. 90년대 중반부터 막을 연 이태원시대는 지금도 ‘30대까지의 꽃띠들은 이태원, 중년 이상의 노땅들은 종로’라는 공식을 더욱 강화하며 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태원이 종로와 차별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공간의 개방성이다. 일명 ‘호모힐’로 불리는 게이업소 밀집지역은 길거리에서 요란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끌어 안고, 큰 소리로 떠드는 젊은 동성애자들의 so gay한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게이바를 나오면 서로가 완벽한 타인이 되던 종로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진풍경인 것이다. 또한 업소들은 조금이라도 더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듯 더욱 게이스럽게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태원에서 가장 뜨거운 게이클럽 ‘G SPOT’은 동성애자들은 물론이고 이성애자들에게도 특별한 공간으로 각광받는다. 이태원이 이렇게 개방적인 게이타운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지역적 특성에서 연유한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꽤 오랫동안 외지인들의 마을이었고, 지금도 미군부대를 기반으로 존재하는 낮에는 쇼핑가 밤에는 유흥가다. 따라서 많은 한국인들 인식속에 이곳은 반외국이나 다름 없고, 이것이야말로 이곳에 게이타운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결정적 배경이 되었다. 사창가가 철거된 도심의 뒷골목을 기반으로 생겨난 게 종로였다면 이태원은 외지인들의 유흥가를 방패삼아 형성되었다. 공간의 형성은 사회적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다고 볼 때, 서울의 게이타운이 자리잡고 있는 종로와 이태원의 지리적 특수성은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낙후되어 있는가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실증적인 예다.

종로에 비해 이태원이 개방적이고 가시적인 공간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종로가 그랬던 것처럼 이태원 역시 동성애자로서의 경험을 축적하고 가시성을 부여하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기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인터넷공간이 동성애자들에게 요구한 대가이기도 하다. 인터넷은 동성애자들에게 그들만의 공간의 필요성과 그 의미를 대폭적으로 무화시켰다. 실제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목적이 아닌 인터넷 공간에 이은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많은 동성애자들은 종로시대에 형성된 공간(OUT)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태원시대를 맞이했고 아직도 많은 동성애자들은 ‘게이게토에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만남과 스토리는 인터넷 공간에 주로 의존하고 있고 이태원의 클럽에서는 꽤나 나대는 일부 동성애자들의 게이다움을 뽐내는 공허한 잔치만이 반복될 뿐이다. 커뮤니티가 지리적 기반을 바탕으로 구축된다고 볼때, 한국의 게이 커뮤니티는 인터넷 가상공간에는 존재할 지 몰라도, 실제하는 물리적 공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서울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도 다이나믹한 근대를 겪어왔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발전지향적 다이나믹에 밀려 문화라는 키워드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 왔다. 문화적 소양과 유연성이 부족한 서울에서 마이너리티의 타자성이 인정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유교문화에 기반한 가족주의가 사회의 큰 축을 이루는 서울에서 동성애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은 반사회적 반윤리적 존재로 여겨진다. 따라서 서울의 게이공간은 사회적 이름을 부여 받은 하나의 공간이라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 다만, 가족보다는 개인에 눈을 떠가는 사회변화를 통해, 기성세대 동성애자와는 다른 가치를 지닌 젊은 동성애자들을 통해, 성을 언어화하는 수많은 작업들을 통해 게이게토에도 사회적 이름이 부여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시인 기형도가 그랬듯이 게이 공간을 지속적으로 아파하고 노래하고 찾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실천(Queer Mapping)은 직접 오프로 뛰쳐나가는 것에서 시작된다.

- 이반 시티에 urdonlyone 님의 글을 허락아래 퍼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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