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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내가 사랑한 소녀’ #2] 엽편 - 내 문제는, 웨딩 피치
2017-09-29 오후 16: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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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9월 

[커버스토리 ‘내가 사랑한 소녀’ #2]

 

엽편소설

내 문제는, 웨딩 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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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사실 변신소녀야.

 

가로수길에서 처음 만난 그는 누가 봐도 평범했다. 그 어떤 극단으로도 가지 않겠음을 온몸으로 선언하는 듯한 외모는,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다지 섹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외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 날 서지 않을 정도로만 정리한 눈썹, 밤마다 온갖 크림을 발랐을 눈매, 필러를 넣은 지 몇 달쯤 지났는지 살짝 꺼져가는 코. 그는 나를 만날 때는 화장을 하지 않았다. 턱에는 늘 수염이 얇게 솟아나 있었고, 이름 모를 야구팀의 이니셜이 새겨진 모자를 쓰고 나왔다. 아이돌 연예인의 프로필사진과 초췌한 복학생 사이의 중간 어느 곳을 오가며 머물러있는 것은, 어찌 보면 재능이었다. 사실 그와의 연애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는 애인 있을 때는 종로나 이태원은 잘 안 간다고 했다. 우리 둘 사이에는 직장 이야기, 직장에서 회식한 이야기, 직장 여자 상사 욕. 뭐 그런 이야기들만이 자리를 차지했고, 몇 번의 데이트는 으레 몇 분 거리에 있는 서로의 집에서 간편하게 이루어졌다.

 

퀴퍼에서 너 봤어.

 

왔었어?

 

아니, 사진으로.

 

아.

 

늦은 밤에 집 앞으로 찾아왔다고 했을 때 대강 예상을 했었다. 뭔가 힘든 이야기가 있겠거니 했다. 그는 집 앞 편의점 앞에 맥주 두 캔을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인기척을 신경 쓰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미안한 얘기인데, 난 니가 너무 불편해.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나에게 보였다. 붉은 가발에 붉은 드레스, 검은 립스틱으로 드랙을 한 내 사진이었다. 입을 제외한 얼굴은 모자이크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캡션이 붙어있었다. 나는 피식 웃고는 스크롤을 내렸다.

 

 

▲ 한 트랜스젠더가 ‘다시 만난 세계’(소녀시대)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다.

 

 

너 소녀시대 좋아하잖아.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여기서 같이 출래?

 

아, 좀 하지 말라고. 왜 그래야 돼? 안 하면 안 돼? 싫다는데?

 

 

그는 변신소녀였다. 변신소녀는 교복을 입은 채로는 날아다니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힘을 얻는 것도, 하이힐을 신는 것도, 모두 변신했을 때만 가능하다. 교복을 입고 날아다니면 자신이 변신소녀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치와 웨딩피치, 세라와 세일러문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만화 속 세상 사람들만 빼고. 그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변신소녀가 변신을 하고 마주 상대하는 대상은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변신은 오로지, 악을 처단하기 위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나는 처단해야 할 악인가. 비일상의 와중에 어떻게든 처리 내지 해결한 뒤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할, 원하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그러나 필요한, 그런 존재인가.

 

넌 참 변신소녀같아.

 

뭔 소리야 그게.

 

변신소녀.

 

굳어지는 그의 얼굴에 다시 “ㄴ” 발음에 힘을 실어 말했다. 술이 조금 들어가자 쓸데없는 말이 늘어났다. 기어코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입으로 다 꺼내고야 말았다. 내 말을 한참동안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야. 난 니가 끼 떠는게 존나 싫었다. 종로에서 아무리 떨어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해. 근데 꼭 밖에서까지 해야 돼? 내 옆에서? 그러면 나는 뭐가 돼?

 

뭐가 되는데?

 

내 물음에 그가 나를 노려본다. 하나, 둘. 고개를 푹 숙인다. 한숨을 쉰다.

 

 

피치에게는 세 가지 변신 모습이 있다. 첫 번째는 교복을 입은 피치. 두 번째는 사랑과 순결의 상징 웨딩드레스를 입은 웨딩 피치. 세 번째는 레오타드와 미니스커트를 입은 사랑의 전사 웨딩 피치. 교복 피치가 웨딩드레스로 변신하고, 곧바로 그 웨딩드레스를 꽃잎처럼 산산이 흩어내며 멋진 복장으로 변신하는 그 장면에는 이상한 쾌감이 있었다. 그 해방감은 교복 피치가 있기에 존재한다. 교복 피치는 누군가에게는 과거일 수도, 누군가에게는 반복되는 매일일 수도 있다.

 

 

뭐가 되는데.

그는 한참동안을 가만히 있다가 조용히 일어났다. 묵직한 맥주캔을 집어들어 쓰레기통에 넣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모자를 다시 푹 눌러쓰고,

네가 날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병신이다.

라고, 말한다.

 

 

그가 등을 보인 채 멀리 걸어간다. 

너는, 그리고 나는, 지금 무슨 피치의 상태에 있는가. 

나는 잘 모른다. 너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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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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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 2017-09-30 오후 17:19

웃었다. 그리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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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경 2017-10-01 오후 21:22

ㅋㅋㅋ 앞으로 기대가 되는 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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