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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한국에서의 삶과 죽음 - 이후고
2008-09-28 오전 01: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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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진 소해피 중 알렉의 퀴어외신에서 펀 글입니다.
원문은 영어이고 아래 게이 문도에 실렸던 것이고 알렉(데미지)님이 번역해주셨습니다.

'더 걸리'지 '게이 문도' 섹션
원문: http://www.thegully.com/essays/asia/030306_gay_korea_intro.html


● 서론─순응에 대한 욕구

2003. 3. 7. 이후소 씀

고립된 한국 사회는 차이를 두려워하며 거부한다

한국의 지리적 민족적 고립은 차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전체 면적이 38,023 mi2에 지나지 않아 미국 인디애나주보다 약간 큰 한국─공식 명칭 대한민국─은 동북 아시아에 있는 한반도 남쪽을 차지한다. 북반부는 북한의 영토이며, 중국은 북쪽과 서쪽에 위치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혈통이 단일한 나라 중 하나이다. 대다수 국민은 자신의 혈통을 수 천년 전으로 추적할 수 있으며, 약 60%는 주요 가문인 김씨, 이씨, 박씨 성을 갖는다. 대다수의 한국인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른 민족에 가깝게 접해볼 기회가 없다.

한국의 격동적인 20세기 역사와 종교적 원리주의는 순응에 대한 이 사회의 욕구를 악화했다.

* 격동의 역사
20세기는 아직도 원망의 대상인 일본 식민 통치(1910~45)와 함께 시작됐는데, 그 목적은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고 일본 제국에 철저하게 통합하는 것이었다.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뒤, 한반도는 남쪽(미국)과 북쪽(소련)이 각각 자의적으로 점령함으로써 분단되기에 이르렀다. 1948년에는 남북한에서 각각 독립 공화국이 수립됐으며, 한국 전쟁(1950~53)은 분단을 한층 공고하게 했다.

그처럼 많은 고통을 겪은 뒤 세워진 남한 정부는 신속한 산업화를 추진했는데, 이는 불가피한 인구 이동을 야기했다. 그와 동시에 나라 세우기라는 목표에 대한 실제 또는 가상의 장애물은 제거돼야만 했다. 즉 한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집착의 대상이 돼버린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국제(또는 인종간) 결혼의 자녀는 공직을 담당할 수 없다.

남한은 1961년에서 1992년까지 군사 정권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시기에 농경 사회로부터 현대적이고 도시적이며 산업화된 경제로의 변신이 완성됐다. 유일하게 빠진 것이라고는 바로 법치, 인권, 평등권 등에 대한 존중을 수반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였다. 한국인들은 이 민주주의와 그 모든 수반 사항을 수 년 동안 대규모─그리고 종종 폭력적인─시위를 통해 요구했다.

한국은 1992 이래 민주적으로 선출된 두 명의 문민 대통령을 두었다. 평등권과 인권 상황이 개선되긴 했으나, 제도적 침해는 아직도 존재한다.

남북한은 1990년 이래 화해와 미래의 통일에 대한 고위급 회담을 간간이 개최해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극적인 타결은 보지 못한 상태이다.

* 종교적 원리주의
한국인의 약 49%는 기독교(천주교 및 개신교) 신자이고, 47%는 불교 신자이며, 단 3%만 유교를 신봉한다.

한국의 기독교는 원리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위의 세 종교 모두 성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데, 이같은 보수성은 특히 동성애에 적용된다.

지금도 유교는 일상 생활뿐 아니라 심지어 형법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의 근간이다. 특히 가족 및 친족과 연관되는 형법은 유교적 성 도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한편 유교보다 덜 제도화된 불교는 한국의 정부 체제에 그만한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20세기 초의 일본 식민 통치 시기 동안 개신교회 및 개신교 계통 학교는 독립 운동의 비밀 거점이 됐다. 이 시기 한국의 유력한 지도자 중 다수는 개신교도였다. 오늘날에도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의료와 교육은 물론 각종 사회 운동 등 전문 직종에서 활약 중이다.

고립과 전투 태세, 그리고 순응과 종교적 원리주의라는 이같은 국가적 드라마는 한국 퀴어들의 삶과 죽음에서 아주 큰 역할을 담당한다.


● 1부─퀴어 엑소시즘(퇴마)

2003. 3. 7. 이후소 씀

종교와 폭력은 한국의 성적 소수자들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나는 1995년 봄 어느 날 밤늦게 내 핸드폰이 처음 울린 순간을 아직도 뚜렷이 기억한다. 전화를 받자 어느 남자가 뱉어내는 것이었다. "지옥불에 떨어져라!" 다음날 밤에는 또 다른 무명의 목소리가 쏘아댔다. "널 죽일 거야."

그 뒤로 내 핸드폰은 1년 동안 거의 매일 밤마다 증오로 가득 차고 위협적인 목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내가 엄청나게 더럽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는데, 그건 바로 한국 최초의 대학 내 퀴어 운동 단체인 '컴투게더'를 공동 창설함으로써 공개적인 동성애자가 된 일이었다.

* 여리고의 성벽
그 뒤로 내 대학 생활은 바뀌었다. 폭력은 날마다 일어날 수 있을 뿐더러 가끔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됐다. 언젠가는 국민 학교 때부터 알아온 친구들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날 폭행했다.

그 해 가을, 나는 교내 최초로 '성 정치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축제가 시작하자마자 붉은 십자가를 든 한 무리의 기독교 원리주의자 학생들이 LGBT 학생들의 전시물을 깔아뭉개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 전시대 주변을 돌면서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그 때 나는 그들이 성경의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대목을 재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기도하면서 적의 성벽을 일곱 바퀴 돌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들이 그러는 와중에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셨던 것이다. 이 원리주의자 학생들은 우리의 전시대가 무너지지 않자 손에 든 십자가로 깨부수려고 했다.

우리 축제 자체뿐 아니라 이처럼 십자가를 폭력적으로 쓴 일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단지 학내뿐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벌어졌다. 모든 주요 언론 방송 매체가 이 사건을 다뤘다. 축제가 끝나자 총학생회는 동성애와 기독교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그런데 토론 중간에 문제의 기독 학생 동아리 회장이 나한테 다가오더니 공개적인 엑소시즘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 일은 당시의 기억 중 가장 고통스러운 일인데, 왜냐면 나 역시 기독교인이기 때문이다.

* 내면화된 폭력
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1997~99년에 내 동성애자 친구 중 세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오xx는 1998년 5월에 가족에게 커밍아웃했는데, 그 즉시 집에서 쫓겨났다. 그 친구는 사무실에서 먹고 잘 만큼 몇 달 동안 노숙하고 고생하다가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나머지 두 친구는 서울 대학교로 진학했는데, 이 학교는 한국의 하버드나 예일이랄 수 있다. 한 사람은 법대에 갔고, 나머지 한 사람은 생물학과 대학원생이었다. 이 친구들은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 셈이었다. 하지만 결혼 적령기가 되자 둘 다 잔인한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다. 두 사람 모두 결혼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식구를 버리고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결국 둘 다 자살을 택했다─한 친구는 1997에, 다른 친구는 1999에. 이 세 젊은이에게는 장례식도 없었는데, 왜냐면 가족들이 '버린' 자식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2년 동안 공부한 뒤, 나는 1998년에 서울로 돌아와 한국의 성적 소수자를 위한 온라인 상담 서비스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경멸하며 또 많은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서비스 제공하면서, 나는 이성애자들의 광분하는 호모포비아와 성적 소수자들의 절망 모두 가늠할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됐다.

어느 날, 이성애자 여성한테 연락이 왔다. 친구가 자신은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며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1주일 뒤, 그녀는 친구가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자살했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다. 이 이성애자 여성은 친구의 자살에 큰 죄책감을 느꼈는데, 왜냐면 커밍아웃 뒤로는 친구하고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부모는 딸의 자살에 분개하고 있었다.

* 의무 결혼
적잖은 한국의 성적 소수자는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 되면서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왜냐면 그 나이면 한국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충족해야 하는 최고의 의무인 '가문의 대 잇기'를 위해 이성애적 결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의무적인 이성애적 결혼의 한 가지 장점은 일단 결혼하면 비로소 어른으로 대우받고 식구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반항적인 퀴어들을 포함하는 미혼자는 계속해서 부모 밑에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 2부─한국의 호모

정부 당국의 현미경 아래에서

2003. 3. 20. 이후소 씀


'론리 플래닛' 여행 안내서는 한국을 여행하는 동성애자들에게 조심해서 행동하라고 충고한다. 한국인들이란 동성애에 있어서는 약간 정신 분열증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을 명시적으로 차별하는 법이 통과된 적이 없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적대적이지 않은 이같은 법적 환경이 곧 관용을 뜻하는 건 아니다.

한국의 법에 동성애가 언급되지 않는 이유는 동성애란 너무나 기괴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심기 불편하게도 이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경우, 대다수 한국인은 자기 나라에는 동성애자가 없다고 고집하게 마련이다. '외국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시적이지 않은 한, 한국인들은 이 '문제'를 계속해서 무시할 것이다.

오늘날 서울에서 시판되는 국어 사전 18종 중 17권에는 동성애를 '성적 도착증'으로 정의한다. '동성애'를 표제어로 싣는 모든 한영 및 영한 사전 역시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동인련 등 한국의 동성애자 인권 단체의 압력 덕분에 5개의 국어 사전 출판사는 지난 11월에 앞으로는 개정판에서 차별적인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또 다른 4개 출판사, 그리고 표준 국어 사전을 발행하는 국립 국어 연구원은 이 문제를 고려해보겠다고만 답했다.

한편 임상적 상황의 경우, '동성애'라는 개념이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D. S. 한이 1970년에 대한 신경 정신 의학회 발간 '신경 정신 의학(Journal of the Korean Neuropsychiatric Association)'지 9권 1호에 '한국인의 성 도착증(Sexual Perversions in Korea)'이라는 제목으로 투고한 사례 연구를 통해서이다. 1960년대 동성애 환자들의 기록에 토대를 둔 이 연구는 한국인들이 서양인들보다 성적으로 더 "원숙"하기 때문에 국내 동성애자 인구가 적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의 정신 의학계는 자체적으로 생산했으며 사회적 남녀관에 기반하는 이념적 헛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복하며 '동성애 = 변태'라는 서양의 관점을 전략적으로 수입함으로써 동성애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관점을 형성해왔다. 심지어 동성애가 더 이상 정신병으로 간주되지 않는 오늘날에도 한국의 정신 의학계는 아직도 이를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제 기능을 못하는 행동 장애로 본다.

동성애에 관한 한, 한국 표준 질병 사인 분류(KSDC)은 그것이 기반하는 세계 보건 기구(WHO)의 국제 질병 국제 질병 분류(ICD) 체계로부터 상당 부분 이탈한다.

'성적 성숙 장애(sexual maturation disorder)'에 대한 ICD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환자는 그의 성 주체성 혹은 성적 지남력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고민하며 불안과 우울병을 낳는다. 일반적으로 청소년기에 자신이 동성애적인지 이성애적인지 아니면 양성애인지 확실하지 못하거나, 일정 기간의 안정된 성적 적응 기간 후에(가끔은 지속적인 관계 내에) 자신의 성적 적응이 변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강조 추가)

그런데 한국어판에서는 원문의 강조 부분이 "종종 혼인 생활을 통해 일정 기간 정상적인 이성애를 경험한 뒤 동성애적 감정을 경험하는 비교적 나이가 든 기혼자"로 바뀌어 있다.

한국의 정신 건강 전문가들은 성적 소수자에게 바로 이 '성적 성숙 장애'라는 낙인을 찍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 다수는 KSDC의 정의를 토대로 '동성애적 끌림'이란 이성애적 발달의 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래서 상황에 따라서는 동성애를 '진성 동성애' 또는 '가성 동성애'로 '진단'할 수 있게 된다.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여성의 동성애는 더더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 성 문화 연구소(Korean Research Institute for Culture and Sexuality)는 1996년에 여고생의 성적 행동과 태도에 대한 연구에서 '동성애'를 '성 폭행'과 같은 범주에 넣어버렸다. 이 연구소는 1997년에 수행한 또 다른 연구에서 여고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남성으로 간주하는 여성을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

즉 한국에서 동성애란 죄악이거나 그릇된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사회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며, 정신병이나 발달 장애나 성적 기능 장애인 셈이다. 성적으로 폭력적인 행동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하지만 중요성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외국의 현상'이기도 하다. 결국 한국에서의 동성애란 '치료' 또는 억압을 절실하게 요구하는 대상인 것이다.


● 3부─민권과 시민으로서의 옳고 그른 행동

한국의 법, 상상력, 그리고 인터넷과 대결하기

2003. 6. 6. 이후소 씀

한국의 퀴어 단체들은 주류 인권 단체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열렬하게 지지한다. 반면에 한국의 주류 인권 단체들이 성적 소수자의 권리 또한 인권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게다가 이 역시 지금 막 대두하는 한국의 퀴어 인권 운동 단체들로부터의 강한 압력 때문에 마지 못해 시인한 것이지, 자발적으로 자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적으로는 시인하더라도 공개적으로는 지지하지 않는다─변호는 둘째 치고 말이다. 한국의 주류 인권 커뮤니티 대부분은 아직도 퀴어 문제를 전략적으로 피하고 있다.

이들의 소심함은 두려움에 뿌리를 둔다. 강한 집단주의에 기반하는 한국 사회는 남성 중심적이고, 외국인 차별적이며, 반동성애적이다. 주류로부터 이탈 행위를 범한다고 간주되는 집단은 시민으로서의 평등권이 박탈된다. 따라서 퀴어나 외국인 근로자에게는 법적 보호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강하게 집단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이 주변화되거나 무시되지 않도록 싸우고 시민으로서의 평등권을 갖는 정당한 소수 집단으로 인정 받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현재까지 퀴어들에게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자고 주장한 한국의 정치인은 단 1명도 없다.

* 협박하는 순경

한국에서 동성애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서 형법에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신 22장 '성 풍속에 관한 죄'라는 다목적 규정이 있다. 그리고 물론 협박이라는 방법도 있다.

한국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이 시작된 1995년 이래 경찰에 의한 동성애자 협박건은 널리 보고된 바 있다. 많은 경우, 사복 경찰관이 공원과 화장실같은 크루징 장소에서 남성 동성애자를 검거하고 한적한 곳으로 데려간 뒤 금품을 갈취한다. '협조'하지 않으면 가족한테 아우팅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이다.

경찰은 게이빠와 사우나를 수시로 단속하는데, 명분상으로는 마약이나 미성년자를 색출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금전을 상납받는다는 조짐이 있다.

한국의 퀴어들은 경찰이나 법원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다.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경찰은 종종 최악의 동성애자 대상 범죄 집단이어서 바로 자신들이 보호해야 하는 동성애자들을 구타하고 강간하게 마련이다.

* 이런 '친구'라니...

그런데 이같은 악습이 보고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면 한국의 동성애자들은 아우팅을 두려워하며, 사회 사업가, 의사, 경찰, 교회, 정부 기관을 포함하는 당국이 반응을 안 보이거나(최선) 호모포비아적 폭력을 조장한다는(최악) 점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퀴어들에게 사회적이고 전문적인 지지 서비스가 없다는 점도 결격 사유이다. 예로 성적 소수자를 공개적으로 변호하는 변호사는 전국에서 단 1명뿐이다. 내가 아는 한 한국에는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퀴어 정치인, 대학 교수, 의사, 사회 사업가, 또는 정신 보건 전문가란 없다. 따라서 제한되나마 현존하는 서비스에 대한 접근은 많은 경우에 퀴어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데 기반한다.

이같은 지지망의 부재는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성적 소수자들과 인권 단체들은 외국에 제한된 연결 고리를 갖고 있을 뿐인데, 대다수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국제 레즈비언 게이 협의회(ILGA)에도 한국 회원은 없다.

다른 아시아 국가의 경우, 에이즈에 초점을 두는 동성애자 인권 단체 지도자들은 종종 국제 회의에 참석해서 외부 지원금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같은 업무 방식은 한국의 성적 소수자들에게는 낯선 일이다. 예로 국내 퀴어 인권 단체들은 국제 아시아-태평양 에이즈 대회(ICAAP)에 참여한 적이 없다.

* 취약한 근로자

모름지기 한국에서 먹고 살려면 직장에서는 커밍아웃하지 말 일이다. 왜냐면 퀴어 근로자를 보호하는 법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를 죄악이나 구역질나는 일로 보는 대다수 한국인에게 직장과 기타 장소에서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해선 안 된다는 생각은 아직도 새롭고 종종 아리송한 개념이다.

그런데 대대적으로 보도된 한 사건은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라는 문제를 공론화하고 여론화하기에 이르렀다.

인기 많은 탤런트 겸 개그맨 홍석천(29세)는 2000년 9월 21일에 TV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했는데, 그는 이미 4일 전에 '일간 스포츠'에 의해 아우팅된 상태였다. 그는 최초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한국의 유명 인사이다. 그러나 그가 출연하던 전국 방송사 두 군데는 '청소년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그를 즉시 해고헸다.

홍석천의 해고는 한국 사회의 여론을 분열시킨 듯하다. 중앙 일보의 최근 여론 조사에 의하면, 응답자 중 59.2%는 해고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반면 39.7%는 방송사들이 적절하게 조치했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77.5%는 동성애자들이 차별받는다고 인정했으나, 전체 응답자의 2/3는 동성애란 죄악이며 그릇된 것이라고 답했다.

* 신체를 넘어서는 탄압

한국의 퀴어들에 대한 강력한 탄압은 단지 신체 자체뿐 아니라 영화, 서적, 교과서, 잡지, 그리고 최근에는 인터넷을 대상으로 한다.

1997에 한국의 유수 대학 중 하나인 연세대 캠퍼스에서는 동성애 영화제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개막 당일, 지역 당국은 상영장의 전기를 끊어가면서 이 행사를 저지했다. 1998년 11월에는 최초의 서울 퀴어 영화제가 열렸는데, 이는 가혹한 규정을 준수한다는 약속 아래 허가됐다. 즉 비디오 테이프만 틀어야 하고, '동성애 행위를 보여주는' 작품은 상영하면 안 되며, '전문가'만 관람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에이즈에 대한 우려가 커짐에 따라 한국에서도 호모포비아적 반격이 점차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1999년에 발간된 고교 교재는 남성 동성애자들을 에이즈의 주범이자 성적 변태로 그린다. 심지어 명분상으로는 에이즈 퇴치에 힘쓴다는 단체들도 실제로는 호모포비아와 보수적인 성 도덕을 조장함으로써 동성애의 확산에 대항에 싸우고 있다.

* 한국의 웹 전쟁

한국의 정보 통신부는 2001년 7월에 인터넷 내용 등급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는데, 그 기준에 의하면 동성애 사이트는 '유해 매체'로 분류된다. 이 부처는 국내 동성애 사이트들에 19세 미만의 사용자의 접근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단지 미성년자뿐 아니라 모든 사용자가 전국의 PC방, 공공 도서관, 각급 학교, 지방 자치 단체, 그리고 가정 밖의 모든 장소에 있는 컴퓨터 장비를 통해 동성애 사이트에 일체 접속하지 못하도록 했다. 늘 되풀이돼온 구실은 바로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정부의 탄압은 같은 해 4월에 한국의 유사 정부적 심의 위원회가 '음란성 및 변태성'을 근거로 동성애를 음란 인터넷 사이트 조건에 포함시킨 뒤에 일어났다.

심의 위원회는 이같은 결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한국에 기반하는 모든 사이트로부터의 동성애 관련 자료의 제거를 요구한 셈이었다. 공식 명칭은 정보 통신 윤리 위원회인 이 심의 위원회는 1997년 청소년 보호법에 근거해 이 결정을 정당화했는데, 청소년 보호법은 '동성애'를 '청소년 유해물'로 규정한다.

이같은 새 정책은 급속히 시행됐다. 한국의 동성애 관련 사이트는 단 며칠만에 폐쇄됐다. 그리고 국내 최초이자 최대 동성애 사이트인 엑스존 관리자는 2001년 11월에 다음과 같은 협박을 받았다. 엑스존에 '유해 사이트'라는 딱지를 붙이고 청소년의 접근을 차단하지 않을 경우, 2년형과 미화 1만불에 해당하는 벌금이 가해지리라는 것이었다. (현재 엑스존 사용자들은 자신의 주민 등록 번호를 입력해야 접속이 가능하며, 따라서 19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사용이 차단된다.)

이 검열에 반대하기 위해 5명의 남성 동성애자를 포함하는 60명은 서울의 명동 성당 앞에서 60일간 연좌 단식 농성을 벌였다. 참여자는 1일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 반격

2002년 1월에는 20개 이상의 동성애 인권 단체와 사이트 관리자들이 연대해 동차공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동차공 이름 아래 정부의 엑스존 검열을 제소했다. 이유인즉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국 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헌법의 표현의 자유가 동성애에도 적용될 수는 없으며 엑스존이야말로 '음란물'이라는 딱지를 붙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레즈비언 단체 끼리끼리가 ILGA 등 동성애 인권 단체를 포함하는 전세계 동성애 사이트로의 접속을 차단하는 소프트웨어인 '수호 천사' 제조 및 판매사 (주) 플러스텍을 국가 인권위에 제소했다.

또 다른 신규 단체인 한동연의 회원이기도 한 끼리끼리는 이 소프트웨어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고 그들의 인권은 물론 일반 대중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조사는 1997년 제정 청소년 보호법이 '동성애 보급'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한, 자사 정책을 바꿀 의사는 없다고 응수했다.

법원 판결과 플러스텍 사건은 지난 2년간 인터넷 검열 투쟁으로 이미 힘이 결집된 한국의 퀴어 인권 운동을 자극했다. 현재 운동의 초점은 검열 근거로 제시되는 1997년 제정 청소년 보호법의 수정이다.

이같은 새로운 전략은 열매 맺기 시작했다. 국가 인권위는 2003년 4월 2일에 1997년 제정 청소년 보호법으로부터 동성애 관련 조항을 삭제하도록 공식적으로 권고했다. 이 권고가 받아들여질 경우, 한국 퀴어 인권 운동에서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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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연결 프로젝트는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2014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성소수자 자살예방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