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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종로3가 게이 게토1)와 게이커뮤니티의 위치

 

 

 

* 이 글은 2018년 5월 26일,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기획한 2018년 봄 '익선동, 낙원동' 역사기행 중 종로3가 게이 게토를 다룬 답사지의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문헌에 등장하는 종로3가의 게이업소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 있으며, 답사가 진행된 날 밤에는 익선동 야간개장이 개최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유롭게 인용하시되, 인용하실 때에는 원문의 출처를 반드시 병기해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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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을 둘러싼 종로3가는 오랫동안 성판매여성들의 집결지이자, 게이·트랜스젠더 여성을 비롯한 성소수자의 보금자리였다. 1950년대 이래 언론에 보도된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의 당사자, 그 중에서 오늘날의 게이·트랜스젠더 여성에 해당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유흥업소 종업원이었고, 따라서 이들은 자연히 성매매집결지를 비롯하여 유흥업소에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성판매여성과 대개 같은 현장을 공유하였다.2)
 

1950년대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 당사자들은 주로 명동을 중심으로 한 극장과 다방에 집결하였다. 해방 후 동화백화점(舊 미쓰코시백화점, 現 신세계백화점 본점) 옥상에 위치한 극장 「동명」과 함께, 뉴만백화점의 극장 「뉴만」, 옛 코스모스백화점 옆의 극장 「명동」,3) 그리고 이 지역에 산재했던 다방과 살롱 등이 이들의 접선 장소로 활용되었다. 「단성사」, 「협률사」, 「원각사」 등의 극장은 1900년대부터 성매매 알선 장소로 활용되었고,4) 다방 또한 일제 시기 이래 대표적인 유흥업소로 자리매김된 바 있다.5) 성매매는 국가가 정한 집결지 외에도 일반음식점의 “업태위반” 등 광범위한 현장에 편재하였고,6) 성판매여성과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 당사자 또한 이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얼핏 관계가 깊어보이지 않는 성판매여성과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은 무슨 연유로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일까. 이들의 상관관계와 그 성격은 아직 규명을 기다리는 중이지만, 현장이 겹친다는 것 외에도 둘 사이의 깊은 연관을 암시하는 증거들은 많다. 이른바 ‘갈보’는 성판매여성을 뜻하는 은어로, 빈대 갈(蝎)에서 딴 단어라는 설과, 당시 인기를 끌었던 미국의 여성 배우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에서 딴 말이라는 설 등이 있다.7) 헌데 오늘날의 게이·트랜스젠더 여성에 해당하는 은어는 다름아닌 ‘보갈’로,8) 이는 ‘갈보’를 뒤집은 말이다. 이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지금보다도 동성애자임을 나타내기가 더 어려웠던 시절 성적 관계의 상대자가 몇몇으로 한정된 상태에서 성관계가 복잡한 사람들을 일컬어 장난스레 쓰던 말로 추정”된다는 설과,9) “공인되지 못한 性의 외로움, 빈번한 섹스, 게토화된 공간의 축축함”을 의미했다는 설로 미루어,10) 성판매여성과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 당사자를 아우르는 ‘비규범적 성’의 공통점 위에서 위 은어들이 혼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50년대의 명동, 그리고 60년대의 신당동 「광무극장」과 을지로 인쇄소골목의 게이바 「아담」을 지나,11) 1970년대의 게이 게토는 종로3가로 옮겨오게 되었다. 게이업소 이주의 배경 중 하나는 1968년 서울시장 김현옥에 의한 ‘나비작전’, 이른바 ‘종삼’ 성매매집결지의 철거였다. 물론 사창이 철거된 후에도 이 곳에는 ‘콜걸’ 등 겸업 성매매가 여전히 성행하였고,12) 이 틈을 타 이 지역에 게이바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이 곳 게이바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은 1960년대 초 파고다공원(現 탑골공원)의 동쪽 문 바로 앞에 설립된 「파고다극장」이었다. 이 곳은 1966년을 기준으로 「명보」, 「아세아」와 함께 서울의 3대 극장으로 거듭났으나,13) 60년대 말부터 동시상영관으로 운영되었다. 이 곳은 청소년도 출입 가능했으며, 한번 표를 끊고 들어가면 하루종일 체류해도 되었다.14) 「파고다극장」은 2001년 철거될 때까지, 게이들이 모여 파트너를 찾는 게이 게토의 상징인 이른바 ‘P극장’으로 널리 회자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1974년에는 창덕궁 앞에 이 지역 최초의 게이바 「심」이 개업하였고,15) 1978년 「갈등」, 1979년 「갈(渴)」이 각각 개업하였다.16) 아래 기사는 “종3”의 “P극장”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극장을 중심으로 당대의 비규범적 성애·성별 실천 당사자들이 어떻게 파트너를 만났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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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발 : 마짜 떼자 전차, 남자끼리의 그 징그러운 서울 「보갈」족 : 逆SEX 지대에서 탈출한 두 청년의 체험적 폭로」, 『주간경향』 203, 1972.10.22., 30쪽

 

 

 

도착(倒錯)된 성(性)은 오늘날 병마처럼 세계에 번지고 있다. 이 도착세계를 도망쳐 나온 두 청년이 정신병동같은 그곳 세계를 폭로했다. 「호모」 즉 「보갈」이란 은어로 통하는 그 세계의 체험적 고발기는 - [...]
현재 「보갈」의 조직은 서울역파, H극장파(종로1가), M극장파(명동), P극장파(종3), K극장파(퇴계로), Y동(용산구)파 등 6군데.
그들의 수법은 서울역의 경우 무작정 상경 미소년들을 노리고 미끼는 『취직시켜 준다』로 꾀어 양동 무허가 하숙집으로 데리고간다.
극장의 경우는 옆자리에 있는 관람객을 상대로 처음에는 슬그머니 손을 잡는다.
이 때 빙긋 웃어주면 암호가 통한 것. 『차한잔합시다』에 동의하면 극장을 나와 일단 다방으로 가고, 다방을 나오면 목욕탕으로 직행한다.
Y동파의 경우는 좀 색다르다. 그들은 주로 여장남자들. 외국인 상대가 많고 때로는 밤거리 미도파앞, 무교동까지 원정을 나와 술취한 손님을 유혹한다.
이같은 조직에 걸려든 사람은 다른 「보갈」 집단에게 1인당 1천원이란 헐값으로 팔려간다.
특히 『대낮의 극장뒤에 서있는 손님 가운데는 파트너를 구하러나온 「보갈」족들이 9할이 넘는다』고 단정했다.17)

 

 

 

흥미로운 것은, 위 기사의 “보갈”이 오늘날의 게이(남성동성애자)와 여장남자(크로스드레서, 혹은 트랜스젠더 여성)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각각의 성소수자 정체성은 1990년대에 정립된 것으로, 이 시기에는 이렇게 세분된 정체성 용어와 구분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아가 당시 ‘남성동성애자’에는, 현재의 기준으로 게이와 트랜스젠더 여성이 포함된 범주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당시 정신의학계는 “성전환수술”을 원하는 “환자”를 “동성애”의 한 “증례(症例)”로 소개하였다.18) 또한 1980년대 당시, 오늘날의 게이에 해당하는 남성동성애자는 ‘호모’라는 은어로 불렸고, ‘게이’는 다름아닌 오늘날의 트랜스젠더 여성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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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악보고 : 서울에 「창남지대」, 남자가 여장하고 “놀다가세요, 네!”」, 『주간경향』 78, 1970.5.27, 80-81쪽.
 

 

 

이들 게이업소들은, 1980년대 들어 1982년 1월 6일부로 실시된 야간통행금지 해제조치20) 및 유흥업소·접객업소 심야영업 제한 폐지로 인해 본격적으로 그 수가 증가하게 된다.21) 1980년대에는 이 지역에 50~60개의 게이바가 성업하였는데,22) 이는 1980년대 유흥음식점 및 숙박업소, 다방 등의 수가 급증한 것과 맞물렸다.23) 이후 유흥업소의 심야영업 허가는 이후 청소년 선도 등을 이유로 정부 및 지자체에 의해 1980년대 내내 일시적으로 금지되었다.24)


더불어 유흥업소에 대한 경찰의 단속은 해방 이후부터 대개 임의적이고 간헐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는 경찰과 유흥업소의 유착을 통한 유흥업의 불법 영업이 정례화되는 효과를 낳았는데, 이는 이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게이바는 변종영업을 하고 있는 셈”이었으며,25) 이 시기 종로3가의 게이바 업주들 중 몇몇은 “무슨 호모 바냐 그래가지고” “종로 경찰서에 밥먹듯이 드나들”어야 했다. 더불어 지역 사회의 시선도 따가웠는데, “낙원동 번영회에서 물이 더러워져서 안되겠다고 해서 가서 또 싸”웠다는 증언이 주목된다.26)
 

더불어 1990년 1월 1일을 기해 노태우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 정책의 일환으로, 유흥업소 심야영업제한 조치를 재차 시행하였다. 이에 따라 관광특구로 지정된 곳은 새벽 2시, 이외의 지역은 자정까지로 영업이 제한되었으며,27) 이는 자연히 게이업소에게도 적용되었다.28) 물론 이러한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1990년대 게이바들은 광고지에 “매일밤 11:30-12:00 봉고대기” 등을 내걸고 자정 이후 비밀리에 영업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였다.29) 이러한 영업 관행은 1998년 9월 15일 일반음식점·휴게음식점 심야영업제한 해제 조치에 이어, 1999년 3월 1일 유흥업소·단란주점 심야영업제한 해제를 통해 비로소 과거의 일이 되었다.30)


한편 1990년대는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인권운동이 꽃핀 시기였다. 동성과의 섹스만을 부각하여 일반 사회에서 비속어로 사용되던 ‘동성연애’ 대신, 동성을 좋아하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채로 삶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동성애’의 사용이 인권단체에 의해 장려되었다.31) 또한 ‘게이’라는 말은 “‘다른 남자들과 섹스를 하는 남자’를 지칭하는 용어로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문제-이성애 사회에서 ‘게이’로서 살면서 경험하는 억압과 모순들-을 풀어 나가기 위해서 쌓아가야 할 정체성과 연대를 상징”한다는, 일종의 규범적인 의미를 담은 채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게이커뮤니티’라는 말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차츰 널리 사용되었다.32)


헌데 이러한 ‘게이커뮤니티’의 범주에는 이 시기 새로 생긴 게이인권운동단체 뿐만 아니라, 기존에 존재했던 게이바를 비롯한 게이업소도 포함되었다. 성적 활력과 프리섹스 등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게이업소를 ‘게이커뮤니티’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일에 대해, 적지 않은 당시의 게이들은 반대 의사를 표출하기도 하였으나, 이들 업소 또한 우회할 수 없는 동성애자의 역사를 담은 공간으로 존중하고자 하는 흐름 또한 존재하였다.

 

 

 

극장과 여관, 바를 전전하는 동성애자들을 삭제시켜버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면, 기존의 동성애의 역사가 음습한 지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적인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음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젊은 동성애자들이 당당해지는 길은 극장과 사우나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손가락질과 탄압으로 숨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를 받아들여 안고 우리가 빼앗긴 것들, 얻어내야 할 것들, 그리고 반성하고 고쳐야 할 것들을 더욱 극명하게 깨달아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33)

 

 

 

나아가 비규범적 섹슈얼리티가 실천되는 이러한 게이업소를 게이인권운동의 중요한 현장으로 적극적으로 자리매김하려는 활동도 개진되었다.34) 이는 당사자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게이인권운동 안에서, ‘커뮤니티 운동’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통해 대중과 운동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전략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흐름으로 자리잡는 데 일조하였다.35)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과 결혼한 상태에서 남성과 섹스하는 ‘기혼 이반’의 존재나,36) 게이업소 중 성판매가 공공연히 일어나는 업소의 경우는 점차 배제되었다.37) 이러한 포섭과 배제의 기획 속에서 익선동을 비롯한 ‘게이커뮤니티’의 게이규범성은 탄생되었다. 이는 섹슈얼리티의 개방성과 자율성이 그 의미를 갖기 위해, “호모”, “동성연애”에 쏟아지는 보수적인 섹슈얼리티 인식의 쇄신과 더불어, 여성과 성소수자가 공존하였던 유흥업 현장 내에서 ‘성매매’로 상징되는, 젠더적 관점에서의 “여성 교환”의 문화가 극복되는 과정이 필요하였음을 암시한다.38)


더불어 1998년 2월 20일 창간된 “동성애 전문잡지” 『BUDDY』(1998~2004)는 게이를 대상으로 한 내용과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같이 배치하였고,39) 2000년에 첫 깃발을 올린 퀴어문화축제에서는 “한국성적소수자(게이, 레즈비언, 트렌스젠더, 바이섹슈얼)”라는 개념이 비로소 등장하였다.40) 즉 오늘날의 LGBT의 개념은 이렇게 젠더감수성을 바탕으로 한 일정한 규범성을 전제하였고, 그 속의 ‘게이’ 또한 성소수자 범주에 포함되는 동시에 다른 정체성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형태로서 구성되었다.
 

끝으로 성판매여성과 성소수자를 아우르는 성적 낙인은 이후 시기에도 여전히 작동하였다. 1980년대에 한국에 들어온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및 AIDS(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에 대한 “고위험군”으로 보건당국은 “동성애자”와 “성매매여성”을 꼽았다.41) 비규범적 성을 둘러싼 낙인과 그로 인한 피해는 이렇듯 여전히 사회적 소수자들의 머리 위를 공전하였다.

 

 

 

<미주>

 

1) Martin P. Levine은 주로 대도시에 형성되는 동성애자들의 모임 장소를 “Gay Ghetto”라 불렀고, 여기서의 게이 게토는 남성·여성 동성애자를 모두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영미권에서 “gay”가 한국에서의 게이·레즈비언을 통칭하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Martin P. Levine, “Gay Ghetto”, Journal of Homosexuality, Vol. 4, 1979. [https://doi.org/10.1300/J082v04n04_04]

2) 김대현, 「1950~60년대 유흥업 현장과 유흥업소 종업원에 대한 낙인」, 『역사문제연구』 39, 2018 참조.

3) 이희일, 「한국 동성애 게토, 오욕과 오명의 연대기 : 서 있는 사람들 - 극장의 역사」, 『BUDDY』 3, 1998.4.20, 45-46쪽 ; 「종로는 뿌리가 있어! : 게이 바 ‘돈키호테’ 심대철 사장님에게서 듣는 80년대 종로 이야기」, 『BUDDY』 22, 2003.3.19, 71쪽.

4) 강준만, 『매매춘, 한국을 벗기다 : 국가와 권력은 어떻게 성을 거래해왔는가』, 인물과사상사, 2012, 24쪽.

5) 「루포-서울의 적선지대」, 『야담과실화』 1961. 1, 32쪽.

6) 전업 성매매와 겸업 성매매 등 성매매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서는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묵인-관리 체제’의 변동과 성판매여성의 역사적 구성, 1945∼2005년』, 서울대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 참조.

7) 박갑천, 『어원수필 : 말의 고향을 찾아』, 을유문화사, 1974, 12-13쪽.

8) 「고발 : 마짜 떼자 전차, 남자끼리의 그 징그러운 서울 「보갈」족 : 逆SEX 지대에서 탈출한 두 청년의 체험적 폭로」, 『주간경향』 203, 1972.10.22., 30쪽.

9) 「알아두어야 할 동성애 관련 용어」, 『BUDDY』 5, 1998.6.20, 77쪽.

10) 이송희일, 「은어를 쫓는 은어의 세계 : 종로 은어 사전」, 『BUDDY』 6, 1999.4.1, 17쪽.

11) 이송희일,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 게이바의 역사」, 『BUDDY』 6, 1998.7.20, 53쪽.

12) 「콜걸로 들끓는 서울의 여관·호텔 : 사회정화 위한 고발, 종삼 폐지 그 후...」, 『주간경향』 35, 1969.7.20., 76-77쪽.

13) 『경향신문』 1966.12.26., 8면.

14) 임범, 「추억속으로 지다, 재개봉극장」, 『씨네21』, 2004.8.27.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5820]

15) 「역사 속의 진실 : 이것이 한국 최초의 이반업소였다!」, 『보릿자루』 25, 2001.2.29, 36쪽.

16) 「종로는 뿌리가 있어! : 게이 바 ‘돈키호테’ 심대철 사장님에게서 듣는 80년대 종로 이야기」, 『BUDDY』 22, 2003.3.19, 71쪽.

17) 「고발 : 마짜 떼자 전차, 남자끼리의 그 징그러운 서울 「보갈」족 : 逆SEX 지대에서 탈출한 두 청년의 체험적 폭로」, 『주간경향』 203, 1972.10.22., 30쪽, 김대현, 「1950~60년대 한국의 여장남자 – 낙인의 변화와 지속」,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한뼘 한국사 : 한국사 밖의 한국사』, 푸른역사, 2018, 138-140쪽 참조.

18) 한상엽·박태수·오민응, 「동성애의 1예」, 『신경정신의학』 11-3, 1972, 64-66쪽.

19) 시인 채호기의 시집 『슬픈 게이』(문학과지성사, 1994)에 등장하는 게이는, 오늘날의 트랜스젠더 여성에 해당하는 이들이다. 「쉬어가는 시 한 수 : 채호기 시집 '슬픈 게이' 중에서」, 『BUDDY』 16, 1999.9.1., 58쪽. 더불어 1980년대 ‘게이’와 ‘호모’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로는 전원근, 「1980년대 『선데이서울』에 나타난 동성애 담론과 남성 동성애자들의 경험」, 『젠더와 문화』 8-2, 2015 참조.

20) 「오늘밤부터 통금 철폐 각의 보고」, 『경향신문』 1982.1.5., 1면.

21) 「강남 새 풍속도 (9) 유흥업소 – 9. 철야영업 캬바레」, 『경향신문』 1982.11.6., 10면.

22) 이송희일,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 게이바의 역사」, 『BUDDY』 6, 1998.7.20, 51쪽.

23) 박정미, 「쾌락과 공포의 시대 : 1980년대 한국의 ‘유흥향락산업’과 인신매매」, 『여성학논집』 33-2, 2016, 37-39쪽.

24) 「관광업소 제외 무도업소 영업시간 단축 관계법 개정」, 『동아일보』 1983.4.22., 1면.

25) 나경민, 「이태원을 둘러싼 이야기들」, 『BUDDY』 3, 1998.4.20, 27쪽.

26) 「종로는 뿌리가 있어! : 게이 바 ‘돈키호테’ 심대철 사장님에게서 듣는 80년대 종로 이야기」, 『BUDDY』 22, 2003.3.19, 71쪽.

27) 「유흥업소 영업시간단축 논란 “범죄예방 ”민생침해“」, 『경향신문』 1989.12.20., 15면.

28) 「아듀, 98년 : 한해동안 동성애 커뮤니티가 얻은 것과 잃은 것 (2) - 1998년 뒤돌아본 게이바(Gay Bar)」, 『BUDDY』 11, 1998.12.25, 40쪽.

29) 『친구사이 소식지』 7, 1994.12., 8쪽.

30) 「이건 이렇게 : 심야영업 제한 폐지」, 『경향신문』 1998.9.24., 7면.

31) 「버디가 간다!」, 『BUDDY』 1, 1998.2.20, 19쪽.

32) 김민, 「"게이"라는 용어는 한국 상황에서 적절한가?」, 『BUDDY』 22, 2003.3.19, 19쪽.

33) 「독자가 편집자에게」, 『BUDDY』 5, 1998.6.20, 79쪽.

34) 이에 대해서는 김대현(터울), 「1990년대 말 이반업소 정보지 『보릿자루』를 통해 본 게이커뮤니티의 형성 : 기혼이반 논쟁과 섹슈얼리티 검열을 중심으로」, 『퀴어인문잡지 삐라』 3, 2016 참조.

35) 이에 대해서는 김대현(터울), 「게이 커뮤니티 운동 약사, 1995~2000」, 『친구사이 소식지』 66, 2015.12.31. 참조.

36) 각주 32번의 문헌 참조.

37) 가령 2002년 동성애자인권연대의 대표는 동료 활동가에 대한 여성비하·혐오적 언급 등을 이유로 성소수자인권단체 연대체였던 한국동성애자연합 준비위에 의해 탄핵이 요청되었는데, 이 서류에는 당시 동인련의 대표의 비위 내용에 “이태원 한 호스트바의 사업자로 등록돼 있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동성애자연합 준비위원회, 「임태훈 동인련 대표 탄핵 요구서」, 2002.6.22. 참조. 더불어 이 사례와 별개로 성소수자 문화 내 성매매는 오늘날 하위문화의 범주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평가와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소수자 성매매 : 성적소수자 성매매에 대한 보고서』, 2014.11.18. 참조.

38) 김대현, 「1950~60년대 유흥업 현장과 유흥업소 종업원에 대한 낙인」, 『역사문제연구』 39, 2018, 2장 참조.

39) 김대현(터울), 「어느 게이가 바라본 성별 정체성 : 잡지 『BUDDY』에 실린 트랜스젠더 관련 기사」, 『친구사이 소식지』 64, 2015.10.30. 참조.

40) 「한국 최초의 자긍심 행렬 : 벽장을 나와 거리로 뛰어나온 동성애자들」, 『BUDDY』 18, 2000.11.9,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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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 인권위원 /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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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박재경 2018.10.02 22:44
    호모낫 ^^ 이 글들을 다 읽은게야
  • profile
    츠바사 2018.10.03 16:04
    지금도 딱히 나아진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예전엔 정말 대놓고 혐오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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