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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보수 개신교와 성소수자' 특집 #2] 수도자와 동성애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2015-06-27 오전 01: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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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6월 
성스런 혐오와 속된 사랑의 중심에서
- 수도자와 동성애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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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광장에서 열린 2015년 아이다호데이 행사에 보수기독교 단체가 몰려들었다. 그들은 행사장 바로 옆뜰에 천막과 의자를 깔아놓고 통성기도를 올렸고, LGBT 단체들은 미리 준비한 "혐오를 중단하라"는 대형 현수막을 전방에 세워 행사참여자들과 혐오세력 사이를 가로막았다. 시야가 가로막힌 혐오세력들은 행사가 진행되자 점점 더 목소리를 키워 "사랑해서 혐오하는 것"이라는 참람된 구호를 외쳐대었다.
 
그 중 그네들의 목소리가 단연 격앙되었던 순간은, 섬돌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와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민김종훈(자캐오) 신부가 행사장에 올라 그곳에 모인 성소수자들을 축복하는 기도를 올릴 때였다. 그분들과 같은 신을 모시는, 그러나 같아선 안될 신들을 따르는 무리들이 목청이 찢어져라 악다구니를 썼고, 단상에 오른 두 성직자는 결기를 애써 감춘 채 "부디 저들을 용서하는 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는 청원을 신께 올렸다. 
 
그 업화와 같은 광경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혐오세력들에게는, 그렇게 성소수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숫제 몸소 성소수자인 기독교인들의 존재가 그들에게 가장 외상적인 게 아니겠는가 하는. 그리고 그들의 그런 외상과는 상관없이, 기독교와 성소수성을 동시에 사랑한 사람들은 여기에 이미 존재한다. 마치 동성을 혐오하거나 동성애를 찬반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온갖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가 '지금 여기에 이미' 존재하듯이. 그렇게 이미 존재해왔던, 그리고 누군가에겐 외상적일 동성애자 기독교도 가운데 나 또한 포함돼있고, 하여 여기서는 그 가운데서 내가 겪은 이야기를 좀 풀어놓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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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동성애자이면서 수도자가 되고 싶은 꿈을 꾼 적이 있고, 그것을 실행에도 옮겨보았다는 내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쓴 뒤, 게이이면서 교회 안에 깊이 몸담고 있는 몇몇 분의 연락을 받았다. 정확히는 자신의 동성애적 지향과 교회의 신앙 사이를 고민하는 몇몇 분들의. 그분들의 사연과 전갈을 들을 때마다 기이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덮어둔 것들이 다시 끄집어내져 마음이 마구 부풀었다 꺼지는 일이 반복됐다. 하긴, 사람은 본래 자기가 채 다 감당못할 경험과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산다. 성소든 게이든 무언가 대단히 특별해보였던 그것들도, 뒤집어보면 누구나 가지고 사는 고민에서 아주 멀지는 않은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겪은 기억들이 갖는 응축된 감정의 늪들은 그것대로 내 것이거나, 내 것이 아니기에 늘상 나를 쥐어 흔드는 무엇이다.
 
입회 거부 통보를 받고 나는 친구사이에 들어가 내 섹슈얼리티와 관련한 이러저런 활동을 해보고, 나와 동류인 이들과 교류하며 삶에서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끼워넣고 사는지를 곁눈질하며 배웠다. 대학원생의 직업이랄 만한 공부도 최소한 이전보단 더 진지해졌고, 금방 이별할 수 있을 것 같던 세상 속으로 이제 제대로 터잡고 살자는 마음을 먹으니 그 세상 속의 것들이 새로이 미쁘게 보이는 경험도 했다. 어쩌면 그런 변화들이, 이전에 내가 고민했던 성소의 깊이가 그만큼 빈약하고 어떤 도피와 연루돼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내가 이 고민을 털어놓았던, 내가 게이란 걸 아는 주위의 많은 지인들이 내 그런 고민을 ‘지랄’이라 응수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얼마간 그런 부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또 일상을 살아가면서, 가끔씩 그 성소실에서의 기억과 그곳 수사님들과의 자리가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가 있다. 당시에 내가 쓰던 노트를 이따금 뒤적이다가, 수도자의 삶-으로 표현된 내 인생에 대한 목마름이 시퍼렇게 토로되어있는 글들을 볼 때마다 아주 깊은 동경과 회한의 기분이 되살아난다. 그러니 내 과거의 성소가 누구의 말처럼 온전히 ‘지랄’이었던 것은 아니겠고, 나아가 입회 거부를 끝으로 그런 고민과 지향들이 일거에 청산되거나 극복되어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지금도 여전히 마음 속 한 귀퉁이에 오랜 물음으로 남아있다. 대체 이 강렬한 갈망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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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란 충일한 ‘나’로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다. 수도자로 살건, 사랑하는 배우자를 섬기며 살건, 중요한 것은 그런 내적인 충만함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더 규율있는 삶이라든지 어느 한쪽이 더 거룩한 삶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당장 편한 길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나도 그 안에서 마음의 풍요를 느낄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그래서 수도성소를 지닌 이들만이 아닌 누구에게나 필요한 고민이다.
 
그럼 내 성소는 무엇일까. 나는 내가 머무는 세속 안에서도 그 나름의 거룩함과 속죄가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되바라진 풍경을 쉽사리 퇴폐라 읽지 않고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과 지향을 알고 싶었다. 당장 눈에 성스러워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자기’를 잃은 것이라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자주 분별의 감을 잃고 살지만, 자기 삶에서 깊은 경지의 분별은 끝내 쥐고 사는 이들이 많았다. 세속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사람사람들 내면에 있는 분별의 힘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후로 나는 어떤 유흥가 한복판에라도 마음의 동요 없이 걸을 수 있게 됐다. 그러니 죄스럽다면 존재가 죄스러울 뿐이지, 세속은 죄스러울 것이 없었다. 성스러움은 그 어떤 복벽에게도 홀로 전유되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내가 내 영성을 스스로 깎고 해체하고 살면서 스스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내가 게이인 나를 사랑하고 그로부터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꼭 쥐어야 했던 바가 그것이었다. 
 
그런 ‘성소’를 바탕으로, 나는 세속에 살면서 동성애 인권과 섹슈얼리티에 관련된 일련의 움직임들에 동의하거나 그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바들은, 과거 내가 수도자 공동체에 있었을 때 너무 기쁜 마음이 들다가도, 혹시 들킬지 모를 내 ‘기이한’ 섹슈얼리티만 생각하면 땅끝까지 떨어지던 자존감의 기억들보단 그래도 어쨌든 나아간 것들이었다. 내가 지금 세속에서의 삶에 일말의 확신과 안온함을 느끼는 까닭이 이와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앞서 얘기한, 지난 수도성소의 기억에 대한 괴괴한 갈망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 보면, 무언가 풀리지 않는 숙제가 내게 남아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치와 섹슈얼리티야말로 철저히 인간적인 것이고, ‘성소’에 대한 고민은 사실 인간 바깥의 인격체를 놓고 인간과 인생 자체를 객관화하는 데서 나오는 삶의 지향이다 보니, 전자가 풍요하다고 해서 후자가 온전히 충족될 리는 없는 것이다. 신앙에 대해 깊이 묵상한 분들이라면 누구나 직감하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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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에 대한 고민에 한번 빠져본 사람은 그 때 보았던 세상을 잊지 못한다. 그런 원의를 한번 품어본 사람은, 그 길을 걷든 걷지 않든 그 기억과 지향을 평생 가지고 산다. 나같은 경우 세속에서 살고 있다가도, 어느 때 보면 내가 수도회에 있었더라면 했을법한 일들과 결과적으로 비슷한 것들에 끌리고, 그 일을 하고 있어야 안심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헌데 문제는 섹슈얼리티 또한 사람의 삶에서 그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의 고민에 한번 빠져본 사람은 그를 통해 본 인간의 모습을 잊기 힘들다. 두 주제 모두 사람에게 아주 깊은 감정과 존재에 즉한 에너지를 끌어올리게 만드는 인간의 조건이다. 그런 심연을 두 개나 품고 사는 사람들은 그만큼의 버거움을 감내할 의무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께서 그들을 특별히 아끼신다는 증명이 되리라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리고 그런 부분들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특정 사람이나 특별한 정체성에 결부되는 것이 아닌, 인간 일반의 조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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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졌던, 수도자와 동성애를 동시에 고민해보았던 이들이 있다면 다음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심연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한 교만도 아주 쉽게 부추겨질 수 있는 주제다. 중고등학교 때 ‘첫경험 유무’ 등으로 우열을 가리던 것처럼 성경험의 유무 또한 그런 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상처입히기 쉽고,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그런 부추김이 자신의 성경험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겪어본’ 말에 쉽게 휘둘리지 말고 자기가 느끼는 감각과 지향에 보다 집중하시기를 권한다. 자기 섹슈얼리티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교만이다.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해 가장 모를 때는, 그것에 대해 하나도 몰랐을 때가 아니라 그것에 대해 어설프게 한번 훑고 난 이후이다. 그러므로 한번 겪은 사람이 안 겪은 사람보다 무얼 많이 알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극도의 휴머니즘적인 미신이다. 그러니 그런 ‘경험 자랑’의 교만에 각자의 내면이 혹여 상처입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불어 만에 하나 이 글에서 그런 교만섞인 느낌을 조금이라도 느끼셨다면, 그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나아가 성직에 있든 세속에 있든, 사람은 자기 섹슈얼리티에 직면하는 과제를 결코 피할 수 없고, 그것을 투명하게 알아가는 것은 인생 앞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헌데 그것을 너무 도피하려해도 문제겠지만, 그걸 너무 억지로 알아가려고 하지도 않으셨으면 좋겠다. 사람은 결코 인생의 신비를 일거에 알 수 없다. 자기 섹슈얼리티를 어느 한 순간 단박에 알아야겠다는 것도 인간적인 교만이고, 그걸 알아가는 것이 ‘평생에 걸친’ 과정이라는 것을 간과한 생각이다. 그러니 도피하지 말되, 자신을 재촉하지도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 부분은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다. 나는 과거에 섹슈얼리티에 대한 어떤 윤리를 얻는 것을 마치 무슨 라이센스를 따는 것 같은 단절과 도약의 업으로 생각했고, 그 결과 입지 않아도 되었을 상처와 악연을 많이 만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과 그로 인한 내 인생이 어떻든지, 나는 나의 말이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감한다.
 
 
 
나는 당신의 삶을 모르고, 내 말은 당신에게 털끝 하나의 변화도 마련하지 못한다. 그러니 모든 것은 당신의 몫이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 있든, 우리는 결국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보다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자리에서, 지금보다 기쁘게 서로를 마주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서로 못다한 이야기는 그 때 가서 나누기로 하고, 그 때까지, 부디 무운을 빈다.
 
 
* 이 자리를 빌어 L 수사님께 각별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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