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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인권운동, 우리 안의 다양성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한국에 태어난지 20년이 흘렀다. 그동안 무엇이 바뀌었을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무언가 달라진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런 애매모호한 느낌들 사이를 지난 세월동안 게이들 스스로, 또 운동 스스로가 걸어왔던 셈이다. 여기서는 그 모호한 느낌들 속에 그래도 부딪치고 싸우고, 그럼으로써 무언가 나아졌던 흔적들을 지난 20년간의 옛글을 읽으며 확인해보고자 한다. 지난 시절 우리가 얼마나 무성한 숲을 헤쳐오고, 또 그 과정 속에서 얼마나 다양한 나무들을 길러왔는지 함께 되짚을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1. 여기 동성애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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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는 그간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성을 부정하고 그것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던 우리 시대의 집단적 침묵을 비판하고자 한다. 동성애와 동성애자는 존재한다! 수많은 이성애자들이 생각하듯 이성애라는 성적 지향성만이 유일하고 정상적이며, 이와는 다른 종류의 성적 지향성은 변태이고 도착이며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동성애와 동성애자는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는 우리 동성애자들과 어떻게 민주적으로 더불어 살기를 모색하는가일 뿐이다.”
-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 발족 선언문”, 1995.6.26.

1995년 친구사이를 비롯한 4개의 성소수자 단체가 모여 발기한 “한국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동인협)”의 선언문이다. 발족선언문에서 “동성애자는 존재한다!”는 구절이 실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성애자 인권운동 초창기에는 ‘여기에/이미 동성애자가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큰 반향이 있을 수 있었다. 그 배경에는 동성애가 ‘보이는’ 형태로 존재할 수 없었던, 따라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되었던 엄혹한 시간이 가로놓여 있었다. 

모든 운동의 시작 - 가령 5.18 희생자의 ‘존재’,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보도연맹 학살자의 ‘존재’ - 이 그렇듯이, 동성애자 운동 역시 동성애자가 ‘여기 있음’을 소리높이 외치는 일부터 시작했다. 엄연히 있는 것이 마치 없는 것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치부되는 것만큼 잔혹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우리 시대의 집단적 침묵”이, 동성애자 운동의 시작과 함께 조금씩 베일을 걷기 시작했다. 동성애가 비로소 꺼내어 ‘논쟁’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성애는 다름아닌 성性에 대한 문제다. 동성애 뿐만 아니라 이성애 역시, 섹슈얼리티는 무언가 항상 수줍고, 무언가 꺼내어 말하기 어려운 “허리 아래의 부분”이다. “허리 아래의 부분”이기에 그때까지 많은 성범죄들과, 성소수자들의 삶이 ‘무언가 꺼내지기 어려운’ 낮도깨비의 상태로 존재했다. 그것이 ‘남사스럽게도’ 꺼내어 논쟁되기 시작한 사건은 결코 작은 의의가 아니다. 

여느 사람의 머릿속에 ‘무언가’ 평온하게, 당연한 듯 여겨지던 섹슈얼리티의 세계에, 게이·레즈비언 등이 ‘침입’해 들어오는 다양성의 ‘침범’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양성의 침범은 누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누구에게는 필시 불편하고, 곤혹스러운 것이었을 테다. 또한 기존의 동성애자들에게는, 애초에 나/동성애자는 여기 있는 것이었겠지만, 그런 누군가의 활동으로 ‘나는 여기 있음’의 의미가 좋든 싫든 바뀌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무려’ 동성애자가 존재하고, 또 무려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는, 동성애를 위한 인정투쟁의 역사,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향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동성애의 존재 증명은, 여느 사람의 마음 속에 ‘서로 다름’을 끼워넣고 살 면역이 생기는 과정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은밀하고 평온한 침묵들보다는, 이를 기점으로 불거진 갖가지 분란들이, 좀더 많은 사람들을 포괄할, 보다 진정한 ‘평화’에 근접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2. 우리는 ‘같은’ 동성애자인가? - ‘게이’인권운동단체

운동의 시작에 서서 ‘동성애자’임을 힘주어 선포한 다음에는, 그 ‘동성애자’의 속에 실제로 어떤 내용을 담을지가 숙제로 남는다. 1993년 12월 게이 4명과 레즈비언 3명이 모여 ‘초동회’를 결성하였는데, 3개월 후 초동회는 해산하고 1994년 2월 남성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같은 해 11월 한국여성성적소수자인권운동모임 끼리끼리(현 한국레즈비언상담소)가 분리 발족하게 된다. ‘같은’ 동성애자이지만, ‘다른’ 게이/레즈비언의 단체로 모임의 토대를 잡아나간 것이다. 당시 정황에 대한 회고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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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 : 처음 결성할 때부터 게이와 레즈비언 따로, 개별적인 발족을 만들지 않고, 게이-레즈비언 연합 모임으로 만들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해성(끼리끼리 초대 회장) : (초동회)당시는 이 사회에서 “같은 동성애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고, 굳이 남녀를 분리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소식지를 만들게 되면서부터 미묘한 차이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즉 성에 대해서 남자, 여자가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남자, 여자의 차이 등 미묘한 관점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같이 있으면서 갈등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분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적대적인 분리가 아니라, 서로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는 긍정적인 분리였다고 생각합니다.

오준수(당시 친구사이 사무총장) : 그때 헤어지면서 약속했던 말을 전해성씨께서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초동회가 분리되면서 남-녀가 어느 정도 역량이 모아지게 되면, 다시 연합회를 만들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사회자(이해솔, 전 끼리끼리 회장)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연합체가 바로 “동인협”이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 자리에 같이 모이게 되었구요.”
- “’96 동인협 여름 인권 캠프 토크쇼 녹취록”, 1996.8.18., 2-3쪽.

이들을 비롯한 성소수자 단체들은 1995년 동성애자인권운동협의회(동인협)를 결성한 다음, 1998년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동단협), 그리고 2002년 한국동성애자연합(한동연)의 형태로 각각 결집과 해산을 반복하게 된다. 초창기 LGBT운동에서 위 협의체들이 차지하는 위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헌데 2002년 한동연 발족선언문에서, 앞의 두 연대체 활동을 두고 “실무조직을 갖추지 못하고, 운동의 방향설정에 있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언급하는 한편, 이 한동연 역시 두 해를 넘기지 못하고 해산한 것을 보면, 이러한 연대체들이 실무적으로 원활히 돌아가기만 했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전체연합’식 연대체가 명멸해가는 동안, 독립된 조직들이 당면한 사안을 맞아 그때그때 힘을 모으는 연대 모델, 즉 2000년 동성애 사이트 ‘엑스존’의 청소년 유해매체물 지정 사건에 맞서 2001년 출범한  동성애자차별반대공동행동(동차공), 2007년 차별금지법 정국에 대응하여 2008년 출범한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무지개행동) 등의 연대체가 이후 더 긴 호흡으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 운동에 있어, 개개인이 동성연애자에서 동성애자로, 섹스만이 아니라 섹슈얼리티와 연동된 사회적 관계를 가지는, 그 나름의 삶의 양식을 갖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생활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목표일 수 있다. 그를 위해 너무 틀거리가 큰 단체는, 다수성의 횡포에 지쳐 쫓겨온 사람들을 위로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선 자기와 닮은 이들이 모인 쉼터에서 마음을 녹이고 나면, 자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처지의 소수자에게도 마음을 열 수 있는, 운동을 터잡을 수 있는 힘이 비로소 생겨났던 셈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단체의 명의를 동성애자가 아니라 ‘게이’로 한정한 것은, 레즈비언을 포함한 여타 소수자들과 갈라서겠다는 분파주의라기보다, 다양성을 구성하는 한 ‘단위’로 기능하기 위한 역량을 안으로 다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도 그렇게 작동되었다. 무조건 한 단체의 우산 안에 머무는 것보다는, 하나가 되기 위한 전제를 쌓는 과정, ‘같은’ 동성애자 운동을 위한 서로 ‘다른’ 복수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조직의 과정이 필요했던 셈이다. 대의가 커다랄수록 그를 위해 커다랗지 않은 복수의 결사가 굳건해야 했을지 모른다. 다양성이란, 그 다양함을 지탱하고 그것을 질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각자의 역량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저마다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 각 운동단체의 궤적은, 다양성을 위한 생존단위와 소통을 위한 최소역량이 시험되고 구획되어온 역사와 동일하다. 


3. 우리는 ‘같은’ 게이인가? - 종로·이태원과 인권운동

그렇다면 이렇게 구획된 ‘게이’들은 과연 서로 ‘같은’ 이들이었을까? 인권운동단체의 게이와 종로·이태원의 게이들이 과연 같은 ‘게이’일 수 있었을까? 아래의 인용을 보면 그것도 용이치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998년 9월 13일 유명을 달리한 친구사이 회원 故 오준수님의 생전 모습을 그린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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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이한 존재였다. 누구처럼 내세울 만한 가방끈도 자랑할만한 깨끗한 도덕교과서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스스로 얘기했듯이 20대 초반부터 낙원동 뒷골목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호모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초동회’ 시절부터 종로의 게이커뮤니티와 동성애자 인권운동 사이를 연결하는 유일한 고리가 될 수 있었다. 친구사이가 우아떠는 게이들의 자족적인 집단이 아니라 우리문화의 일부인 종로와 함께 하려한다는 의지는 그의 존재로서 넉넉히 증명되곤 했다.”
- 신윤동욱, “추모사 : 겨울 허수아비, 가을바람에 잠들다 - 친구사이 전 부회장, 오준수 님의 죽음에 부쳐”, <오준수를 추모追慕함>, 2000.2.11, 13쪽.


한 사례를 더 보자. 90년대 말엽, 업소 앞 친구사이 회원의 소식지 배포를 문제삼은 이태원 업소와의 분쟁을 다룬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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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9일 밤 11시경 이태원 S 업소 앞에서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친구사이 소식지를 배포하려던 친구사이 회장님을 비롯한 몇몇 회원들과 이를 저지하는 업소 주인과의 마찰이 그것이다. 그동안 별 문제없이 진행되던 소식지 배포를 막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사람들이 소식지를 길거리에 함부로 버려 어지럽힌다.’, ‘이웃에서 동성애자들이 주말만 되면 이곳에 몰린다고 말이 많다’, ‘단속이 심해서 경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다’ 등 결국은 한창 잘나가는 영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으니 방해요소는 다 제거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일단은 그 자리에서 언성을 높여서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에 자리를 접고 물러서긴 했지만 그동안 아군이라고 믿었던 업소의 실망스런 처사에 느낀 배신감과 억울함은 삭히기 힘들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뒤늦게 도착한 다른 회원들은 힘빠진 회원들을 뒤로한 채 신이 나서 언제나처럼 그곳에 들어갔다.
- 연대 미상의 글.


초창기 회원 중에 인권운동과 유흥문화 사이의 “고리” 역할을 하는 이가 드물었음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위의 글이나, “이제 더 이상 이태원 문화를 찬양하기만 할 수는 없다”고 부르짖는 아래의 글에서 보듯이, 종로·이태원과 인권운동이 ‘게이’란 정체성 안에서 처음부터 사이좋게 모여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게이라는 정체성의 내용이 보다 ‘다양’해지기 위한 진통의 과정일 수 있었다. 
아래의 글은 그 과정으로서의 ‘진통’이 그야말로 적나라하게 표출된 글이 아닐까 싶다. 


“당신(친구사이-인용자)에게 ‘헌신’하겠다고 댕기풀고 맹서했던 그년들은 휘황한 이태원거리에서 ‘해피 투게더’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만 ‘따’시키고 말입니다. 당신께 바칠 회비로 우아하게 잔을 돌리고 있더군요. 나쁜 년들. 그게 저를 포함한 친구사이 (전)회원들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친구사이 회원이라구? 난 어느 빠든 갈 수 있어! 식성은 움직이는 거야.”
하긴 그년들만 탓할 수는 없겠지요. 어쩌면 당신은 이제 정말 ‘한물 간’ 스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시대는 ‘거’했다는 거지요. 이반사회의 그 엄혹한 ‘연애계’에서 당신은 이제 매력 빵점입니다. 한때 다들 흠모해 마지 않았던 ‘인권’이라는 당신의 매력 포인트에 이젠 아무도 끌리지 않습니다. 저부터 그렇다니까요. 왜냐구요? 글쎄요.”
- 오래된 년, “안녕, 내 사랑 -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비망록”, <친구사이 소식지>, 2000.6.1, 14쪽.


누구의 표현대로 “끼리끼리 술마시고 놀러다니”다가, 어느 날은 또 태연히 피켓 들고 시위에 나가고 캠페인을 하는 현재의 친구사이의 모습을 생각하면, 위의 글이 그리고 있는, 지난날 게이운동이 지나쳐왔던 진통의 무게를 생각하게 된다. 운동이 생활 안에서 제자리를 흡족히 찾아가고, 생활이 쾌락을 물리치지 않고도 적절한 윤리를 세우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 하여 비로소 어느 한 모습의 게이가 아닌, 게이로서 다양한 모습을 스스로 체현하며 살 수 있게 된 것. 이 또한 수월찮은 과거의 시행착오 끝에 거둬진, 보다 성숙한 게이의 상이 아닐까 싶다. 

서로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던 인권운동과 종로·이태원업소들이 서로 윈윈하는 묘책을 찾고, 서로가 서로를 품음으로서 결과적으로 저마다 더 크고 의미있는 모양을 가지게 된 것, 그리하여 이태원과 집회를 동시에 뛸 수 있는, 서명운동을 받으면서도 남자 끼고 앞을 지나치는 게이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야말로,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지난 세월이 우리에게 남긴 농담같은 유산일지 모른다. 


4. ‘다양한’ 게이를 위하여

20년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을까? 그간 별로 한 게 없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고 향유하는 바로 이것이, 우리가 여태껏 거둔 성취의 집합이다. 다양성을 위한 최소한의 존재조건과 역량을 만들고, 나를 지키면서 남과 함께함을 배우고, 그럼으로서 내가 풍요해지는 법을 배우고, 이를 통해 다양성의 의미를 말로 끝내지 않고 몸으로 부딪치며 실천해온 역사다. 따라서 다양성은 그냥 온 것이 아니라 경험과 시간을 들여 비로소 뺏아오고 사수해낸 것이며, 그를 통해 우리는 그 이전에 비해 보다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일까. 우리에겐 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조직, 더 많은 목소리, 더 많은 분란, 그 모든 침범과 도전을 넘기고 새로 생길 모든 것에 제자리를 찾아줄 수 있는 더 많은 지혜, 그럼으로서 얻어질 더 많은 정체성. 그것들을 어떻게 이룰지를 고민하기 위해, 한번쯤은 우리네 과거를 돌아봐도 무방할 것이다. 새 세대가 과거를 알아야 할 ‘의무’는 없지만, 과거를 앎으로써 보다 현명하게 자유로울 방법을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2014년 지금에 와 한번 돌이켜보자, 결혼할 권리가 거부당하기 전엔 방송활동을 할 권리가 거부당했고, 그것이 거부되기 전엔 아예 존재할 권리가 거부당했던 과거를. 이제와 당연한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불과 몇 년 전의 일을. 세상은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나아가고 있다.  


터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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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경 2014.05.28 03:35
    시간의 깊이를 잘 해석하는구나
    역시 터울이야 ㅋㅋㅋ 뭐 전공자니깐 ㅋㅋㅋ

    항상 잘 읽어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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