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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애국충성의 상징’이 남색을 즐겼다는 걸 일제 역사조작으로만 몰 수는 없어… 일찍부터 서구보다 자유로웠던 동아시아의 동성애는 다양성과 선진성의 증거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약 15년 전, 화랑에 대한 국내의 한 대표적인 논저를 읽게 됐다. 그 저자는 일본인들의 화랑 연구가 얼마나 왜곡됐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864~1946)이란 관학자가 화랑들을 동성애 집단으로 봤다는 사실을 소개해주었다. 아유가이의 학설에 대해 별다른 해석을 달거나 반박을 하지도 않은 채 말씀이다.

그 논저를 집필한 학자의 입장에서는 ‘화랑들이 동성애 집단이었다’는 주장이 굳이 반박할 가치도 없는 낭설, 망설 그 자체였다. 애국충성의 화신인 화랑들이 변태를 업으로 삼았다 하니 우리에 대한 비하와 왜곡임이 자명하다는 이야기였다.

국선과 낭도 사이의 노골적인 사랑

물론 아유가이라는 사람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 부분을 십분 이해한다. 일찍이 한국어를 익혀 1894년에 조선으로 건너온 그자가 명성황후 시해 계획에 참여했다는 점도, 식민지 시대 내내 조선 고서와 골동품 등을 수집하면서 총독부가 원하는 대로 ‘조선 문화’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냈다는 점도 그를 ‘연구자’로만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아유가이가 악질적 어용학자라 하더라도 화랑들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꼭 어불성설로만 취급돼야 하는가? 물론 ‘화랑 정신’을 ‘우리 조상의 얼의 원천, 3·1운동 정신과 멸공 애국 정신의 원동력’으로 본 이선근과 같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의 학술적 하수인의 입장에서는 그랬을 것이다. 애국의 표본인 화랑들이 ‘변태’였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모독쯤이었던 거다. 그런데 동성애도 이성애와 동등한 자격을 갖는 하나의 사랑의 방법, 하나의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라는 더욱 진보된 생각을 갖는다면, 과연 화랑들의 동성애 가능성을 일제의 조작으로만 봐야 하는가?

국선과 낭도 사이의 사랑 관계를 노골적이다 싶은 언어로 이야기해주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진위를 아직 알 수 없다고 치자. 그런데 익히 아는 ‘모죽지랑가’를 대충 읽어도 뭔가 비상해 보이지 않는가?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전각(殿閣)을 밝히오신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

당신을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북쑥이 우거진 마을에서 잘 밤 있으리까? (양주동, 김완진 해석 참고)

물론 작가 득오곡이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 노쇠해 결국 세상을 떠난 스승 죽지랑에 대해 단순히 사제 간의 정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아시아 고전시가에서 사랑과 자주 연관되는 ‘봄’이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등장하는가? 그냥 스승이 그리워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었을까? 이 일이 있기 약 150년 전에 일찍이 죽은 친구 무관랑이 그리워 7일 동안 통곡해 슬픔으로 죽은 그 유명한 사다함도 무관랑과 우정 이상의 어떤 관계도 없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상당한 ‘순화 과정’을 거친 후대의 자료만 가지고 화랑을 논해야 하는 우리로서 확증이 없어 더 이상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굳이 아유가이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화랑들이 후대의 유교적 사학이 아주 싫어할 만한 방향으로 성을 즐겼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실학자였지만 엄숙주의를 버리지 못한 성호 이익(1681~1763)이 아유가이가 동성애 집단 이야기를 꺼내기 200년 전에 <성호사설>(제18권)에서 미남자로 뽑혀 얼굴에 분을 바르는 화랑들의 ‘음란하고 추악한 남색(男色)’을 개탄한 바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대 한국인들의 성적 개방성은 굳이 개탄해야 할 일인가?

조선시대, 여종과 궁녀 사이의 동성애

서구 각국에서는 교회가 약 12~13세기에 동성애를 적극적으로 죄악시하기 시작해 그를 엄벌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그 뒤에는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의 정도가 교회 세력의 강약에 의해 결정됐다. 동아시아 같으면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의 성왕인 세종은 궁중의 동성애와의 투쟁으로도 유명했다. 나중에 조선의 제5대 국왕 문종이 된, 세종이 무척 아끼던 세자의 둘째 부인 봉씨가 남편에게 소박맞자 고달픈 심정을 소쌍이라는 여종과의 동성애로 달랬다. 여종·궁녀 사이의 동성애는, 이성애의 기회가 별로 마땅치도 않은 궁중 생활 속에서 당시로서 보편화돼 있었으며 소쌍만 해도 이미 다른 여종과 동성애 관계를 가진 바 있었다. 그런데 봉씨가 그 관계를 끊어버리게 하고 심적 혼란에 안절부절못하는 소쌍을 공공연하게 독차지했다. 세종은 처음에는 눈감아주려 했던 모양인데 성품이 반골인 봉씨가 당시 여성의 ‘정신 훈련’ 교재인 <열녀전>을 배울 마음이 없다고 던져버리자 이데올로기적 도전을 받았다 싶어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열녀의 길을 거부한 봉씨는 1434년에 궁에서 폐출당해 부모의 집으로 쫓겨왔다. 딸의 반란 때문에 차기 임금의 장인, 즉 국구(國舅)의 영광스러운 생활을 포기해야 했던 봉씨 아버지의 반응은 어땠는가? 그는 허리띠를 풀어 딸의 목에 감아놓고 “자결하라”고 명한 뒤 본인도 곧 자결했단다. 세종은 봉씨 부녀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는 한편 궁녀 사이의 ‘음란한 짓’의 전통을 근절시키느라 더욱 애썼다.

성리학적 입장에서는 풍속의 정화였겠지만 그 여성들의 처지를 생각해준다면 성적 억압의 심화로 봐야 할 듯하다. 성리학자들이 동성애를 남녀 교합의 도리를 위반하는 ‘괴변’으로 인식했지만, 함경도 지역에서 지방관들까지도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한다는 1890년대 후반 한 러시아 탐험가의 증언 등의 자료로 봐서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법이 없는 모양이다.

성리학을 국교화한 일이 없었던 동시대의 일본 같으면 동성애는 비록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훨씬 더 자유로웠다. 정토종을 제외하고는 색을 합법적으로 즐길 수 없는 승려 집단, 가족을 오랫동안 떠나야만 하는 무사 집단에게는 슈도(衆道), 즉 ‘중생의 도리’라는 것이 있었다. ‘중생의 도리’란 무엇인가? 승려의 경우에는 ‘치고’(稚兒·‘어린아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제자를 키우면서 그와 색정을 푸는 것이고, 사무라이의 경우에는 특별히 어여쁜 시동과 사랑의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다. 주군의 총아가 되어 정치적 비중까지 가질 수 있었던 이와 같은 시동들 중에서는 16세기 일본을 처음으로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의 애인 모리 란마루(森蘭丸)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관헌의 간헐적인 단속이 있기도 했지만 유통경제가 발전됨과 동시에 성 상업화도 심해진 17세기 일본에서는 가부키극에서 ‘온나가타’(女形·여성의 역)를 맡았던 남자 배우들이 ‘남색’을 좋아하는 도시 부유층을 상대로 매춘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슈도’라는 말이 문서에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말이지만, 고대 문헌을 봐도 동성애를 암시하거나 직설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수많은 언급들을 볼 수 있다. 동성애의 전통은 이성애만큼이나 깊다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 복건성, 동성부부 입양아까지 허락하다

동성애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조선 성리학자들이 중국 성현들을 우상으로 삼았는가 하면 중세 일본의 저술가들은 일본적 남색 풍토의 원산지로 중국을 지목하기도 했다. 실정은 어땠는가? 음양의 합침과 후사를 두는 일을 중시하는 유교 도덕에 위반되는 일이었지만 아편전쟁을 전후해 중국을 방문한 다수의 유럽인들이 중국 사회를 ‘변태의 천국’으로 묘사했다. 엄숙주의를 표면에 내세웠던 당대 영국인에게 이 풍토는 ‘타락한 중국 문명’에 대한 비하와 멸시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실제로는 동성애 탄압이 자행됐던 동시대의 유럽과 비교하자면 중국은 그야말로 관용의 낙토였다. 동성애 남성 사이의 계약결혼까지도 가능했던 17세기의 복건성에서는, 이 ‘남성 부부’들이 입양아까지 들여 이성애자와 같은 가족 형태를 일시적으로나마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도덕주의를 통치 명분으로 삼았던 청나라에서는 남성 동성애자들에게 곤장 100대를 쳐야 한다는 조항을 형법에 집어넣는 등 ‘도덕적’ 마녀사냥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물론 그래봐야 중국 사회가 사는 방법이 크게 바뀔 일은 없었다.

남한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동성애를 “하나님의 말씀에 위반되는 변태”로 보는가 하면 그들과 견원지간인 북한의 <노동신문>은 동성애자에 대한 서방의 관용을 “세기말적인 부르주아적 타락”으로 몰아세운다. 극과 극이 서로 잘 통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중국이 역사적으로 12~13세기 이후의 유럽에 비해 동성애에 훨씬 관대해온 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다양성과 선진성을 보여줄 뿐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지역적 전통’을 꼽자면 이와 같은 전통부터 생각해봐야 하지 않는가?

참고 문헌:
1. 일연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삼국유사>, 한길사, 2006.
2. 이경덕 편저, <성풍속으로 보는 일본 문화>, 가람기획, 1999.
3. 정성희 지음, <조선의 성풍속>, 가람기획, 1998.
4. Bret Hinsch,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 차돌바우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10-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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