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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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사슴 2003-10-30 20: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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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쌀쌀해지고 눈이 올 것 같은 날이면 그가 생각나요. 날짜를 확인해보니 작년 12월 겨울에 썼던 글이군요.

오늘 우연히 테레비를 보니 백석과 자야부인의 사랑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었다.



우리 문단에서 가장 추앙받은 천재 시인인 백석. 신경림의 말처럼 "우리 시에서 단 하나만 꼽으라 해도 서슴지 않고 꼽는 시인"임에 분명할 게다. 그의 시는 1987년 창비에서 시선집으로 묶일 때까지는 월북작가, 라는 타이틀로 출판 금지가 되어 있었다.

백석의 사랑이 처음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은 김자야(金子夜) 에세이 <내 사랑 백석>에서다. 이 책은 1936년 함흥에서 22살난 기생과 당시 영어교사였던 시인 백석의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처음 보자마자 단박에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자야, 라는 이름도 백석이 지어준 것이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며 사랑을 고백하고 둘은 곧 각자 가까운 거리에 하숙을 정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당신은 학교의 일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도망치듯 나의 하숙으로 바람같이 달려왔다. 우리는 새삼 그립고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담쑥 잡았다. 꽁꽁 언 손을 품속에 데워서 녹이려 할 양이면 난폭한 정열의 힘찬 포옹, 당신은 좀처럼 풀어줄 줄을 몰라했다"던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자야는 기생이었고, 당시 엘리트였던 백석 집안은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아 백석은 세 번이나 장가를 가야 했다. 백석은 그때마다 자야를 위해 첫날밤에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를 세 번, 마침내 백석은 1939년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치자고 제의하며 자신 먼저 만주로 떠나게 되나게 된 것이 결국 이별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자야 부인은 그리움의 세월을 보내다 1999년 남한에서 유명을 달리했고, 백석은 1995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백석의 여인이 자야 부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백석이 부른 사랑의 시 중에 단연 절창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사실 최정희라는 모 잡지사의 여기자를 위해 지은 것임이 최근에 밝혀졌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손뼉을 침은'과 같은 혁명을 위한 시에서부터 백석 최고의 시라 불리워지는 한국 근대시의 절창 '흰 바람벽이 있어'까지 넓고 아름다운 시 세계를 구축했던 백석.

오늘 우연히 그를 생각하며 내 생이 비루함을 또다시 깨닫는다.

여기 '흰 바람벽이 있어'를 남겨놓는다.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 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
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
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p.s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잘 생긴 사람으로도 꼽히는 백석. 어디 이런 남자 못 봤수?


챠밍보이 2003-10-31 오전 02:10

같이 찾으러 갈까? 나는 나타샤가 될 터이니 꽃사슴 너는 얼굴에 분칠하고 흰당나귀가 되거라...

장금이 2003-10-31 오후 12:43

챠밍보이 출신은 어디신가요?

분칠한 당나귀여도 훠잉훠잉 사랑하는 이를 위해 울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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