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나는 숲에서 나와 길에 올랐다
길은 떡갈나무 숲 한 뼘 위에
초승달 눈 흘기고 있었다
숲에서 나오자 세상 끝이었다
우리 밑에 짓눌려 부스럭대던 잎사귀들
아이처럼 지껄이던 산개울 물소리
아무 생각 없이 나눈 악수는
흘러 흘러 흘러서 바위틈으로 스며 들고
숲에서 나오자 깜깜했다
허공중에 피었다 곤두박질치는 것
깨진 접시 조각처럼 잠시 멈춰 있던 것
보았느냐고, 묻고 싶은데
갑자기 숲은 아득해져서
지나간 잎사귀들만 매달고 흔들리고
-<하산>, 최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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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현대문학상 수상작 중 하나이다.(수상대표작은 <그녀의 입술은 따뜻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이다.)
최정례의 이 시는 지나간 많은 사랑들, 단순히 사람간의 연애를 넘어선 많은 몰입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최고의 몰입은 역시 연애지만 말이다.
몰입의 광명과 광기를 벗어나고 나면, 우리는 언제나 '깜깜한 세상 끝'에 서 있게 된다. 아니 그 세상 끝의 순간에 서게 되어야만 그 몰입을 끝낼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많은 추억들, 가치들은 흘러흘러 바위틈으로 숨어버리고
그래도 내가 보았던 광명과 광기를 당신도 보았느냐고, '허공 중에 피었다 곤두박질치는' 그 순간을 당신도 겪었느냐고
온전한 접시가 아니라 깨진 접시처럼, 쓸모 없이 당신을 향해 멈추어있을 수 밖에 없던 황홀을 당신도 아느냐고
우리는 정말 사랑했느냐고
묻고 싶지만 숲에서 던져진 순간 그건 그저 아득할 뿐이다.
다음에는 요술공주 밍키부터 시작하는 누님들의 계보에 대해서 같이 논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