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미안한 노릇인데, '동백꽃 프로젝트' 중 처음 영화 '김추자'의 주인공이었던 황춘하에게 난 세 번씩이나 무례를 저질렀다. 시차를 두고 세 번씩이나 '형, 저 기억해요?' 하고 물었는데, 앞선 두 번은 전혀 기억을 못했던 것. 함께 술도 마시고, 늦은 시각까지 부산의 밤거리를 쏘다녔다는데도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더랬다. 이럴 땐 정말 난처하다. 희미한 발뺌의 미소만 지을 뿐.
난 기억력이 부실하다. 특히 사람들 얼굴을 기억하는 일은 거의 쥐약이다. 누군가 저, 기억해요? 하고 물었을 때 내 얼굴에 스치는 당혹감을 보며, 상대편 역시 씁쓸히 웃거나 기억 못하는구나, 하고 조심스럽게 핀잔을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난 정말이지 머리가 나쁜가 보다. 그들을 도저히 기억해내지 못하겠다. 워낙 방안퉁수인지라 낯선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닌데, 기억력이 문제인지 아니면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싸가지 없는 것인지 그들을 기억해내지 못한다.
어느 날인가는 정말 창피해서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한 2년 쯤 되었나, 어느 게이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와 인사를 한다. 엉거주춤 인사만 하고 뜨악해하는 얼굴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억 못하시는구나. 정말, 기억 안 나요? 예전에 함께 술 마셨었는데... 그때 술 먹고 많이 우셨잖아요. 애인이랑 헤어지셨다고."
낭패.
이상한 게, 생각해 보니 난 사람들에게 '저, 기억해요?' 하고 물어본 적도 별로 없다. 친한 사람들에게만 주의와 관찰을 부여하는, 아울러 내 쪽으로만 삶의 영토를 확보하려는 오만한 자존심 때문에 빚어진 사태이지 않나 싶다. 프로이트 말대로 '기억은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선별된다'는 명제가 옳은 거라면, 난 그 선별에 대해 인색한 구두쇠가 되는 셈이렸다.
이 의도된 건망증 탓에 아마도 또 언젠가 누군가 내 등을 두드리며 저, 기억해요? 하고 물어봐도 여전히 희미한 발뺌의 미소만 지을 것 성싶다. 이 당혹을 혹시 즐기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달리 할 말도 없다.
Lisa Ekdahl | sun 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