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AM 3
우리 둘은 동네 단골 선술집에서 소주 네병을 마시고 일어나 아파트 근처 편의점엘 들렀다. 컵라면에 물을 받아놓고 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녀석 옆에서 나는 오늘의 네 번째 초코바를 먹어치웠고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로 향했다. 편의점이 위치한 상가건물 복도는 불이 꺼져있었다. 어둑한 복도를 지나다 나는 난간 어디쯤에 손을 짚었고 잠깐 검지와 중지 손가락 끝에 예리한 통증을 느꼈다. 오줌을 누고 편의점에 다시 들어서서 녀석에게 이것 봐봐양으로 손을 들어보인 나는 “야 나 피난다” 라고 말했다. 아마 칠칠맞다는 소릴 듣고 싶었나보다. 엑 하는 얼굴로 나를 보던 녀석 표정이 갑자기 변해버린 걸 알아챈 순간 녀석한테 손을 잡혔다. “왜그래” 라고 내가 물었고 친구는 신속하게 휴지로 내 손가락을 꽉 쥐었다. 기대와 다른 반응에 나는 조금 벙쪘다. 바닥에 핏물이 떨어져있었고 휴지 몇장이 온통 빨갛게 젖어가는 걸 보고 있었다. 녀석 손이 따뜻하구나 라고 생각할 때쯤부터 구박이 시작됐다. 술은 고통을 무디게 한다. 그래서인지 별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녀석이 울컥한 걸 알아차리기 전까진. 그리곤 녀석이 참 아파보여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 자기 생일날 다치고 그러냐는 소리 때문에 더 그랬나보다. 좀처럼 피가 안 멎는다. 녀석 손위에 얹혀진 내 손만 보고 있다. 그 잘생긴 얼굴을 한참이나 나는 보지 못 하고 있다. “야 라면 다 뿔었겠다.”
선술집 PM 11
덴마크에 한국이 3:1로 지고 말았다며 우리 둘은 또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녀석은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진짜 남자 중 하나다. 호탕하고 시원시원하고 사람일엔 좀처럼 계산하질 않는다. 내가 가끔 심심해 죽겠다며 놀아달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와 책 이야기가 바닥날 때쯤 녀석에게 갑작스레 일을 부탁하는 전화가 왔다. 세상엔 참 거절을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놈이다. 나는 10분동안 전화 붙잡고 쩔쩔매는 모습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다. 4년 전 녀석이 군대들어가기 전에 같이 남도여행을 가자고 둘이서 잡은 약속이 파토난 게 떠올랐다. 그때도 제발 쫌만 더 도와달라는 호프집 사장님의 간곡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한 저 자식 때문이다. 맘이 약해서 사람들이 사정얘기 쫌만 하면 그거 듣기 싫어서라도 도와주고야 만다. 요즘 세상에 살아있는 천연기념물이다. 그래서 내가 잔소릴 안 할 수가 없다.
선술집 AM 1
세번째 소주병이 비워갈 때쯤 녀석이 한숨을 푹 지른다.
“왜? 사는 게 재미없냐?”
“왜 사는지 모르겠다.”
“야, 나 얼마 전에 어땠는지 물어봐.”
“어쨌길래?”
“맥주마시다 체할뻔한 날이 있었는데 말이지. 동네 도착하니까 밤 11시 30분쯤이드라. 그날은 참 집에 들어가기 싫드라구. 밖에 있어도 막 숨이 막히는 그런 날 있잖아. 그래서 괜히 연못이 있는 작은 공원을 어슬렁거리다가 친구하나 불러냈지. 친구한테 1시간쯤 시덥잖은 타령하다 집에 들어가서 불끄고 누웠는데.. 참 드럽게 잠이 안 오드라. 시계의 째깍째깍소리도 끔찍하고 뒤척거리는 것도 끔찍해서 더는 못 참고 밖을 보니까 아침이더라. 와아 환장하겠대.. 저기있지.. ..나 괜찮을 줄 알았다.”
집 AM 10
일어나자마자 손을 본다. 편의점에선 밴드도 파는 모양이다. 밴드를 벗겨내고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꾹꾹 눌러본다. 중지손가락 끝마디가 마취라도 된 것마냥 감각이 없다. 인간은 언젠간 망가지고 결국은 폐기처분되는데 이깟게 대수냐고 생각하는 걸 보니 내가 이상하긴 한가보다. 새벽녘 집에 오는 길. 내 목걸이가 이쁘다고 자기 생일 선물로 내놓으라는 녀석과 몇 번 주네마네 실갱이를 벌였던 거 같다. 결정적인 순간에 아마 녀석이 사양했지 싶다. 아파트 입구에서 녀석이 딱 한번 내게 아프지마라 라고 했고 나는 나즈막히 알았다고 답했다. 나는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를 맡으면 현기증이 난다. 그래서 병원은 잘 안간다. 다시 손을 본다. 오른손이 온통 피범벅이다. 채 가시지 않은 그 붉은색에 잠겨 몇분쯤 그렇게 보고 있다. 당분간 포크신세를 져야 할 거 같다는 예감이 든다. 그리고 아무래도 병원을 가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