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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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리 2005-05-21 12:10:25
+0 542
1.
오늘 수업들어가기 직전, 담배를 피면서, 같이 수업을 듣는 한 청년을 보았다.  그는 청바지에 깊숙이 손을 찔러 놓고 멍하니 서 있었다.  강의실에서 보는 그는 매우 거만하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아주 어려운 말들도 다 알아 듣는 척을 한다.  그가 같은 과 친구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몸짓이 무척이나 과장돼 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참 외로운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이지 외롭게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고독한 사람으로 여기겠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지만, 그는 결코 그의 외로움에 솔직하지 못하다.  

외로운 사람은 경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 둔탁하다.  그가 그의 외로움에 솔직하지 못해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외로움에 솔직할 것.  그래서 그저 경쾌할 것.  담배를 비벼 끄며 그런 생각을 했다.

2.
내가 좋아하는 문학청년 친구는 술을 먹고 나에게 짧은 이메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나의 언어들이여, 계속 가라.  마법에 걸린 나의 펜은 공중에 흩어진 말의 힘으로 움직일 것이고, 빛바랜 종이는, 뼈마른 나의 정념으로 그것이 품었던 사특한 기운을 검버섯처럼 스스로 피어올릴 것이니.  하여, 너희에게 오래도록 전해지던 잊혀진 비밀지도를 그릴 것이니."

그의 말들을 신봉하는 그의 팬인 나는 그 메일을 몇 번이고 곰곰히 읽어 보았다.  그가 눈부시게 쏟아내는 말들, 그의 뼈를 우려내지 않고서는 배어나오지 못할 글들을 그는 부정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언어들이 싫다고 했다.  그것은 결코 그의 진실이 아니며, 진실이어야 할 어떤 것들을 좇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것들에 그의 진정성은 조금도 들어있지 않고, 그의 펜을 조종하는 어떤 힘이 써 나갔을 뿐이라고 했다.  그 언어들을 그의 것이 전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 오래도록 전해지던 잊혀진 비밀지도처럼 본다고 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은 알 듯도 했다.

3.
몇 년 동안 나를 가까이 해 온 친구는 며칠 전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자기는 슬픔이며 아픔 따위를 아는 사람들에게 정이 가긴 하지만,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고.  나는 그렇지 않아서 좋다고.  그래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그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정말 그런지.  어쩌면 그가 그런 모습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찍부터 눈치채서 그 모습을 안 보이려 했는지도 모른다.  원래 나의 말들은, 내 문학청년 친구처럼, 내 진실은 아니었으니.  

집에 다다랐을 무렵,  둘도 없는 한 친구를 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가 나를 더이상 찾지 않길, 나에게 기대는 일이 없길, 그를 위해 기도했다.

부디, 햇볕처럼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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