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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커버스토리 "흘리는 연습" #7] 《흘리는 연습》이 흘려낸 것들
2025-10-01 오후 18:34:50
1827
기간 9월 

[커버스토리 "흘리는 연습" #7]

《흘리는 연습》이 흘려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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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에 관하여

 

좋은 전시관에서 30년의 친구사이 소식지를 소재로 전시에 나설 수 있어서 좋았다. 준비 과정에 더 많이 느꼈던 건 나는 전시라는 행사의 포인트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체를 감독해주고, 전시 기획으로 상금을 타오고, 이어지는 거의 모든 실무를 도맡아 해준 박민영 작가(이자 친구사이 상근활동가)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작가로서 함께 해준 이경민, 남선미님과 아카이비스트로서 대활약해주신 김대현(터울)님께도 존경과 애정을 표한다. 개관일에 기가 막히게 케이터링을 준비해주신 장준희님과 동료 분들께도, 민영의 요청에 기꺼이 전시장 설치 실무를 도와주신 동료분들도, 친구사이의 전시 행사가 낯설 수 있었을 텐데 함께 해준 회원들, 방문자들께도 감사하다.

 

사실 내가 전시 자체에 대해 그 외에 남길 말이 많진 않다. 조명 배치나 미감으로 정평이 나 있는 동료 박민영을 내가 평가할 역량도 없다. 친구사이 소식지의 내용과 형태를 박민영의 시선으로 재정의하고 구현한 <어둑서니>나, 친구사이 ‘언니’들의 인터뷰를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들이 구술한 걸 촬영해 설치물과 결합시킨 <글레이즈드 사각언니>, 이경민 작가가 기획한 퀴어 커뮤니티가 비일관적인 형태와 목적을 바탕으로 발행해오던 잡지나 소식지를 재배치하고 방문객들이 직접 참여하여 그 매체 제작을 경험할 수 있는 세션 <흘리는 연습판>, 남선미 작가가 기획한 친구사이 소식지를 바라보는 외부자의 시선을 글과 영상 인터뷰로 담아낸 세션, 역사학자 김대현이 수천편의 소식지 글들을 검토하고 6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낸 32편의 소식지 글까지. 친구사이 소식지를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재현해낸 것에 대해 발행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던 모든 사람들이 정말 기뻐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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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을 쉬지 않고 소식지를 발행해온 친구사이가 가진 아카이빙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나는 더 많은 퀴어를 주제로 하는 예술가들이 이 유물들을 (갈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충분한 소통과 교감을 통해서 새로운 창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근까지도 ‘퀴어’를 주제로 한 전시들이 개인의 성적 욕망이나 발칙함, 공허함, 외로움을 키워드로 작업하는 경우들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의 차별과 혐오가 강하기 때문에 퀴어 개인의 욕망이나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돌보는 사람이고 투쟁하는 사람이고 토론하는 사람이고 지역을 가꾸는 사람이고 일하는 사람이었다는 점, 즉 복잡하고 복합적인 존재라는 점이 지난 한국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기록들에 잘 남아 있기도 하다. 퀴어의 급진성은 우리를 가리고 있는 천막을 걷어낼 때 발생하는 것이기에 그 주제가 꼭 몸과 성의 재현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우리의 기록들은 그 상상력을 더 확장시켜줄 수 있는 소중한 단서들이다.

 

<흘리는 연습>에서 박민영은 한국 사회 속 성소수자운동의 시간성이 매끄럽게 이어져 있는 듯 보이면서 동시에 분절적인 성격을 띄고 있다는던 점을 시각화해냈다. 또한 친구사이만의 독특한 ‘언니’들의 관계망과 경험을 이 시대 신입회원들의 입말로 읊어내고, 그것을 영상화하면서 시간을 이어내기도 했다. 이경민은 퀴어 매체 자체에 관심을 가지면서 불균질한 발행 형식과 내용의 비일관성이 오히려 더 다양하고 색다른 도전과 경험을 낳았음에 관심을 가졌고, 남선미는 반복적으로 글을 발행해봤던 다른 경험들과 친구사이 소식지 경험을 비교분석하면서 친구사이 소식지 외부인의 관점에 초점을 맞췄다. 김대현은 자기 스스로 친구사이 소식지팀장으로 소식지를 발행하는 입장에 있으면서 친구사이의 지난 시간을 여섯 갈래로 분류해내고 그 이야기들을 충분하게 해석하고 전달하는데 힘썼다. 이런 작업들은 친구사이 소식지라는 구체적인 소재를 둘러싼 발행 과정과 결과물을 여러 갈래로 재현한 것이며, 퀴어의 섹슈얼리티를 쾌락, 은밀함, 공허함, 외로움이라는 정서로 은유하거나 가두지 않고 그 섹슈얼리티에 다채롭고 역동적인 운동성을 부여하는 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최근 영화 <3670>(박준호 감독, 2025)이 탈북자의 재사회화와 게이로서의 재사회화를 교차시켜내면서 소수자 사회의 생태를 그려냈던 것처럼, 전시와 재현의 문제에서 나는 조금 더 퀴어의 존재를 복합적이고 교차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을 요청하게 되는 것 같다. 성소수자 인권활동가로서 내가 요즘 더 하고 싶은 말은 예전처럼 “우리는 존재한다”의 수준을 넘어서 “우리는 복잡한 존재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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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흘리는 연습을 준비하던 나의 고민에 관하여

 

나는 친구사이 회원과 상근활동가로 활동한지 지금 2년 6개월 정도되었고, 친구사이 30년의 역사에서 아주 일부만을 경험했다. 동료인 박민영은 친구사이에서 회원으로는 1년, 상근활동가으로는 거의 일하자마자 이 전시 기획에 뛰어들었다. 30년 동안 친구사이와 함께 해준 회원들에게도 좋은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갓 활동을 시작한 두 명의 활동가에게 겪지 않은 지난 30년을 톺아보는 일은 감정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의 시간에 손을 대는 것 같아서, 미안함과 책임감이 크게 느껴졌다. 지난 30년을 활동해온 친구사이의 시간을 최대한 애정하고 존중하는 입장에서 다루고자 했고, 기존에 활발하게 활동해왔던 회원들이 격려와 위로, 응원을 받길 바랐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지난 30년으로부터 앞으로의 친구사이를 상상하는 단서를 찾게 되기도 했다. 솔직한 얘기로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상근활동가로 들어오기 전부터 단체의 후원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고, 어떤 회원들은 친구사이 활동에서 멀어지거나 떠나기도 했으며, 어떤 참조점을 갖기엔 시대의 변화에 따라 친구사이가 놓인 조건도 변화했기 때문에 친구사이 과거를 통해서 ‘오래된 미래’를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단정적으로 말하자면 가능하지 않았다.

 

<흘리는 연습> 전시를 하고 8개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옛 것을 반복하려고 하는 나의 심보가 대체로 게을렀던 것이라고 자책하게 된다. 기록된 활동들에 대한 비판적인 계승, 창조적 계승을 선언하는 것은 분명 멋있지만, 알려진 기획을 따라하고 변형하려고 해봤자 그 기획은 그 시대의 기획인 것이기에, 결국 우리는 지금의 기획을 할 수밖에 없다. <흘리는 연습> 전시 이후, 기존 활동을 앞으로도 친구사이가 반복해나가겠다는 얘기를 할 수 없었던 이유다. 지난 기획들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전에 어떤 기획들이 가능했던 조건들이 지금 없다고 해서 한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떤 회원들은 <흘리는 연습>을 관람하고 나서, 지난 시간을 너무 잘 전시한 것을 보고 나니 오히려 이것이 친구사이의 한계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감상을 이야기했다. 친구사이가 지난 행보 이상의 것을 앞으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2023년 처음 친구사이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친구사이 회원들 중에는 친구사이가 이제는 해산하고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지를 고민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성소수자’라는 사회적 집단화가 어느 정도 공고하게 이뤄진 지금 ‘게이’라는 성적·문화적 정체성을 표방하는 단체의 한계를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코로나19와 내부적 갈등 이후 위축된 단체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난망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지난 10년 간 친구사이가 어떤 사업 방향성을 갖춰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흐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흐름 속에서 나에게 <흘리는 연습>은 방향을 잡기 위한 과거 탐구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계와 미래의 막막함을 느꼈다던 회원들에게 답하자면, <흘리는 연습>이 친구사이 구성원과 게이 커뮤니티, 나아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대신 활동하고 운동해주는 집단과 사람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기록이 알려주는 것은 앞선 모든 이들이 의지할 것 없는 상황에서 날 것의 고민을 바탕으로 기획과 활동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처럼 우리의 기반이 논리적이 필연적인 흐름에 따라 알아서 풍족해지는 것도 아니고, 시대의 흐름은 “사랑이 이긴다”는 낙관과 별개로 세계적으로 극우운동이 유행하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결국 우리의 연대와 유대, 동료됨이 그것을 넘어설 유일한 자원임을 인지하고, 지금의 조건에서 활동을 기획하고, 지치지 않고 대항해야 평온한 일상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안에서 잘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활동이 멈출 때 그 지점이 한계선인 것이지, 우리가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고 대응하길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한계는 누구도 먼저 단정할 수 없다.

 

심지어 <흘리는 연습>의 준비는 윤석열이 쿠데타를 일으킨 시기와과 거의 똑같이 실무가 격화되었다. 우리 안에서는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전시행사를 진행해도 괜찮겠냐는 생각도 했지만, 한편으로 윤석열 퇴진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극우세력 사이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차별과 혐오의 정동으로부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기에 행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석열 내란 사건을 계기로, 나는 친구사이가 게이/퀴어 커뮤니티 안에 있는 극우적인 흐름에 관해 대항하는 내부자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도 생각을 하게 되었고,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서의 친구사이와 같은 커뮤니티 단체의 역할에 대해서 더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시대를 얼마나 잘 읽어내고 있는가가 우리의 관건이다.

 

안일하게 지나간 시간이나 없는 자원을 되짚으며 왜 지금은 그러지 못하지라고 생각한다면 조금도 나아갈 수 없고,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고 싶은지 분명히 하고 어떤 도전을 감수할 것인지 결의하게 될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 <흘리는 연습>에서 작업한 박민영, 김대현, 이경민, 남선미의 작업들이 역동적으로 확장하고 있듯, 우리의 가능성은 결국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다. 나는 사람들이 <흘리는 연습>이 전시한 글들의 사실관계만이 아니라, 그 기록들이 어떻게 확장하고 어떤 경험들을 연결시키며 미래의 잠재성을 그려내고 있는지 확인해주길 바랐다.

 

<흘리는 연습>이 너무 근사했듯, 친구사이의 활동이 변화시킬 앞으로의 미래도 충분히 근사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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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상근활동가 / 심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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