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도시(En la ciudad sin limites, Antonio Hernández, 2002)
배우 : 레오나르도 스바갈리아, Fernando Fernan Gomez, Geraldine Chaplin, Ana Fernandez
오, 재밌는 영화를 발견했네요. 짜임새 있는 퀴어 맬로.
사전 정보 전혀 없이, 퀴어 맬로인 줄도 모르고 그냥 영화 타이틀에 붙은 영화제 수상 이력들을 보고 그냥 봤는데, 반전이 인상적입니다. 아마 가장 유사한 영화를 꼽으라 한다면, 페르잔 오즈페텍의 '창문을 마주보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중반까지 분위기는 데니 아르깡의 '야만적 침략'을 마주대하는 듯한 느낌이더군요.
(남미발 꽃돌이 폭풍의 두 주역인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레오나르도 스바갈리아.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아모레스 페레소'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이어지는 필모그라피에서 보여지듯 동적인 활력을 지닌 배우라면, '번트 머니'로 주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 대표 배우로 전격 부상한 레오나르도 스바갈리아는 조금 더 스펙트럼이 다양한 감성을 지닌 배우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스바갈리아가 출연한 영화 중에선 스페인산 철학적 스릴러인 '인택토'가 단연 최고 작품.)
스페인 출신의 가족이 파리에 한꺼번에 다 모입니다. 둘째 아들도 아르헨티나에서 파리로 애인과 함께 오지요. 아버지가 위중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치매도 있어 보이는 아버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요. 가족들은 점점 정신 상태가 이상해지는 아버지를 안타까워합니다.
헌데 둘째 아들인 우리의 꽃돌이 스바갈리아는 점점 아버지의 정신 나가 보이는 태도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이 도시에 의해 포위되었고, 란셀이라는 묘령의 인물이 기차를 타기 전에 단추를 전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처음엔 안쓰럽게 생각하던 둘째 아들은 점점 아버지 이야기에 동화되기 시작하죠. 가족들은 모두 헛소리라고 치부하지만, 아버지는 가족들도 믿지 말고 자신의 말을 믿어달라고 애타는 눈빛으로 부탁합니다.
점점 아버지 이야기 속으로 빠진 아들은 란셀이라는 인물을 직접 찾아나서게 됩니다. 가상의 인물로 생각했던 란셀이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고 보니, 아버지와 란셀은 마그리드와 프랑스를 연결하는 공산당 세포 조직원들이었던 것. 처음엔 란셀의 존재를 극구 부인하던 어머니는 결국 연락책이던 두 사람 중 바로 아버지가 란셀을 '배신'했고, 감옥에 투옥된 란셀이 죽는 바람에 그 피해망상 때문에 저렇게 죽어가면서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실토하게 됩니다.
그러나 란셀이라는 인물이 여전히 실존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반전은 맨마지막에 드러나게 되고, 이 영화는 갑자기 가슴 아픈 퀴어 맬로로 훌쩍 비상하게 되지요. 둘째 아들이 밝혀낸 사실은 놀라운 거였습니다. 공산당 연락책인 아버지와 란셀은 연인이었던 겁니다. 아버지를 끔찍히 사랑했던 자신의 어머니가 '배신'을 했던 것.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그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란셀을 구하려고 기차역에 가자고 졸라댔던 거지요.
아주 오래 전 자신의 아버지가 그 기차를 란셀과 함께 탔더라면, 자신들의 꿈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이 도시에서 벗어났었을 거라는 아버지의 꿈을 둘째 아들이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겁니다.
강인한 어머니가 말합니다. '넌 내가 아니었으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잘못한 거니?' 그러자 둘째 아들이 말하지요. '지옥에나 가시죠!'
이 영화의 흠이라면, 아마도 꿈을 체계화하는 도시의 문제를 어머니의 배신과 강압으로 협소화한다는 점일 겝니다. 비록 이 영화가 전형적인 유럽의 앵티미즘을 표방하긴 하지만(앵티미즘은 사회적인 이야기나 풍경보단 가정 내의 일상생활을 주로 다루는 예술 사조), 또 가족 구성원의 비밀을 폭로하는 전형적인 사적 스릴러 양식을 취하고 있긴 하지만, 사회 문제를 개인이 몫으로 치환한 단순한 필력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기도 합니다. 어머니 역시 체계의 피해자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스릴러 양식을 밀고 가다가 마지막에 맬로로 반전되는 영화적 만듦새도 그럭저럭 튼튼한 편입니다. 전형적 캐릭터들, 순수한 게이들의 사랑과 대비시키기 위해 동원된 (이성애자) 가족들의 복잡하고 문란한 섹스 등을 부각시키는 도식적 흠결이 존재함에도, 단서들을 플롯 속에 끼워넣는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일단 영화적 재미를 보증하고 있는 작품이네요.
스포일러인 줄은 알지만... 모든 사연을 알게 된 둘째 아들이 막 마지막 수술을 마친 죽어가는 아버지를 끌어안으며 우는 장면에서 찔끔 눈물이 나는 바람에 그만.... 줄줄 스토리를 늘어놓았네요.
이 영화의 힘은 정확히 시나리오에 놓여져 있습니다. 뭐, 뛰어난 형식적 완성도를 지닌 것도 아니지요. 감정을 응축하거나 폭발시키는 긴장감도 없고, 어쩌면 tv 영화들을 많이 찍었던 감독의 이력이 보여주듯, 텔레비젼 드라마를 보는 듯한 통속적인 느낌도 있습니다. 뻔한 스토리일 수도 있었던 영화를 장르를 혼합해 구성한 플롯의 힘.
영제는 The City of No Limits.
호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