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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호][커버스토리 "RUN/OUT 프로젝트" #2] RUN/OUT: 참가자 후기 - 사적인 것이 정치가 된 순간
2025-09-03 오후 17:4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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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8월 

[커버스토리 "RUN/OUT 프로젝트" #2]

RUN/OUT: 참가자 후기 - 사적인 것이 정치가 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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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8월 정기모임은 <이렇게 된 이상 국회로 간다>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국회 또는 정당에서 근무하고 계시거나, 과거 근무 경험이 있는 분들을 패널로 모시고 성소수자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고, 여러 정치적 사안에 대한 뉴스를 챙겨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참여하고 싶었던 행사였습니다. 행사를 열어준 소식지팀 동료 제니의 최근 행보를 비교적 가까이서 지켜보며 응원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머릿수 한 명 정도 늘려 주어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사적인 동기도 있었습니다. 다행히 친구사이 사무실이 꽉 차도록 회원들이 모였습니다.

 

저는 과거에 주로 뒷짐을 지고 정치판을 평가하며, 누가 말을 잘하고 누가 그럴 듯한 공약을 내세우는지를 나름대로 "공적인" 관점에서 판단했습니다. 각 당의 전략과 판세를 보니 어느 당이 몇 석을 얻겠다, 이번엔 여기가 비례가 부족할 듯하니 나라도 채워줘야지, 와 같은 생각도 있었죠. 양탄자를 타고 이 선거구 저 선거구를 날아다니며 판세를 보고, 공약을 평가하고, 그것을 통해 냉철하게 지지 후보와 정당을 결정하는 이른바 스윙 보터(swing voter)였습니다. 이런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기기도 했습니다. 

 

성소수자 정체성을 인정하고 나서부터는, 내가 남자로서 남자를 사랑한다는 그 고작 사적인 감정이 공적인 판단 기준을 흔들었습니다. '내가 성소수자지만, 잠시 그건 접어두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A당을 찍어야겠어' 따위의 생각을 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누가 대체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했는지, 누가 정치인과 공무원과 평론가의 관점에서 공평무사하게 정치를 내려다보라고 가르치며 나의 주체성은 교묘하게 지워버렸는지 억울했습니다. 나의 사적인 삶이 국가 기관의 작위 또는 부작위로 인해 정당한 이유 없이 제한되고, 아주 빈번하게 공론장의 스피커들로부터 모욕당하고 있는데, 내가 왜?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많은 유권자들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성소수자로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제약이 있고, 이를 제거해보겠다는 정치인들에게 주목했습니다. 이들에게 과감히 표를 던졌고 그의 당선 가능성이라든가 사표(dead vote) 방지 심리라든가 하는 복잡한 판단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성소수자 정치를 논하는 이번 행사에 대해서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소수자 정치라는 주제로 모인 네 분의 패널은 과거 또는 현재에 몸 담고 있는 정당도 각기 달랐고,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도 달랐습니다. 한 명의 정치인을 돕다가 그분이 얼떨결에 당선되어 보좌진 일을 시작한 분도 있었고, 여러 정당의 의원실에 보좌진으로 지원하여 가장 높은 월급을 주는 의원실에서 일하게 된 생계형 정치권 종사자도 있었습니다. '성소수자 위원회', '인권위원회' 등이 상시 개설되어 활발히 활동하는 정당에 계신 분들도 있었으나, 모두가 그런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한국 정치 내 성소수자의 위치"를 묻는 진행자의 질문에, 패널 중 한 분은 단호하게 "없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성소수자가 아예 정치판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소수자가 대등한 정치적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혐오의 대상이든, 드물게 정책적 고려의 대상이든 객체로서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이죠. 평소 여러 정치 뉴스를 챙겨보면서 느꼈던, '이게 그래서 뭐,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는 공허함과 무력감이 조금은 설명되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패널은 국회사무처 공무원과 국회 보좌진, 심지어 선출직 공직자 중에서도 성소수자 당사자가 꽤 있다고 하시면서도, 공공연하게 커밍아웃을 한 당사자는 거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각자 탁월한 개인의 역량으로 여의도를 '점령'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우리가 아는 오픈리 퀴어가 거의 없다는 것은 여전히 그들의 업무 환경이 유독하다는 뜻이겠습니다. 한 패널은 성소수자 정치인의 가능성은 결국 불특정 다수에 대한, 대(對)사회 커밍아웃 가능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고, 그 말에 크게 동의하였습니다. '불특정'도 '다수'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공포스러운 존재입니다. 특정 소수 집단이 차별금지법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를 일으키며 의원실에 전화를 돌리는 정치 환경에서는 더더욱요.

 

정치권에서 직접 일해보고자 하는 퀴어 당사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분의 패널이 자신은 "못 참겠어서 정치에 뛰어들게 됐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본인은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사람을 말리고는 싶지만, 결국 못 참는 사람은 뛰어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참던 사람도 같이 뛰어들고, 그러면 지켜보던 사람들도 조금씩 합류하는 흐름이 생길 수도 있다는 희망을 덧붙였습니다. 그 말이 계속 기억에 남는 것은, 성소수자로서 정치를 보며 참을 수 없는 그 기분을 꽤 자주 느끼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만 아니었으면 여전히 교양 챙기며 국가이익이니 시대정신이니 하는 고상한 단어에만 반응해도 되는 유권자로 살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럴 여유가 없게 되었고, 사생활과 정치가 이미 깊이 휘말렸습니다. 저도 이렇게 된 이상 어디론가는 가야겠습니다. 국회로 갈지는 모르겠으나 때로 길거리로, 거주지 지역위원회 사무실로, 지역 퀴퍼 현장으로, X(트위터)에 수없이 쏟아지는 구글 닥스 연서명 질문지로, 또 이런 세미나 장소로, 이렇게 된 이상 부지런히 가야겠습니다. 당연히 출근도 부지런히 하고요. 돈 보낼 데도 많거든요.

 

끝으로, 행사에 참여했던 분들의 소감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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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정치계에 성소수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딱히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정치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고 저만의 편견에 갇힌 걸 수도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성소수자들을 위한 정치'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이번 친구사이 정기 모임 <이렇게 된 이상, 국회로 간다>는 제 안에 있는 벽을 하나 깨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치 이야기이기 때문에 딱딱한 분위기로 흘러갈 거라는 생각은 저의 오산이었습니다. 친구사이 대표 윤하님의 진행에 맞춰 듣는 정치인 네 분의 이야기는 진중함 사이에 유쾌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절망 속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정치인 네 분의 시작과 현재 정치 안에서 성소수자의 위치,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을 골라보라면 정치인 분들의 웃음과 미소, 그에 답하는 우리들의 웃음소리 같은 것입니다. 스스로 뭘 이런 것만 기억하냐 싶었는데 어쩌면 성소수자 정치가 가야할 곳은 기쁘다 못해 시끄럽고 끼스러운 우리들의 웃음소리 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8월 마지막 토요일의 모임처럼 퀴어는 항상 진중함 사이의 유쾌함을 찾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기모임은 굉장히 퀴어한 모임이었습니다. 퀴어 만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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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회원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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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기모임은, 평소 궁금했지만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어서 정말 흥미로웠다. 패널 분들의 입문배경도 의외로 각양각색이었다. 정당에서 일하는 선배의 지속적인 러브콜에 넘어가서, 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후배가 국회의원이 됐는데 마침 자신이 변호사라서, 매번 낙선하던 분을 입대 전에 마지막으로 도왔더니 당선돼버려서, 좌절된 박사과정 대신 높은 연봉을 벌기 위해서..!

국회의원 보좌진, 당 대변인 등을 역임한 패널 4인께 들은 '정치 속 퀴어의 위치'는 안타깝게도 좋지 않았다. 국회의원, 보좌진, 국회사무처 직원 등 퀴어가 국회에 꽤 많은데, 퀴어 정체성을 정책화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정치셈법상 마이너스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개신교 혐오세력의 조직적인 방해공작(전화폭탄 등)인데, 이에 맞서 우리도 정치권의 눈과 귀를 괴롭혀야 퀴어패싱이 없어질 거라는 제언도 있었다. 이러한 '시끄러운 소수' 전략은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듯해 십분 공감했다!

실제로 퀴어가 모여 사는 마포구에선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후보가 구의원에 당선됐고, 내가 사는 지역구에선 주민운동을 전개한 분이 5년 만에 22년 지방선거 때 구의원에 당선됐다. 모두 지역 기반의 소수자 정치가 성공한 사례인데, 이번 정모를 통해 이와 같은 도전을 친구사이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앞으로 있을 26년 지선, 28년 총선에 출마할 커밍아웃한 퀴어 후보자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친구사이 사업 <RUN/OUT!>이 9월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설령 당선이 못 되더라도 그 과정에서 이뤄질 퀴어의 정치세력화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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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회원 / 참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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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 혹은 보통의(?) 남성 시민이 정치에 큰 관심이 없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집단을 뭉뚱그려, 납작하게 바라보거나 근거 없이 짐작해선 안 된다는 걸 <이렇게 된 이상, 국회로 간다>에 참석해 패널들의 이야기와 플로어의 질문을 들으며 다시금 깨달았고, 내 생각이 오만한 예단이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개인적으로 차별금지법, 생활동반자법이나 혼인평등권 등 옳다고 믿는 세상의 변화를 견인하기에 사회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게 된지 수년이 흘렀다.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정치 영역에서의 역할을 찾아 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해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도권에 진입해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바꿔내고 싶었던 의제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하기 어려운 역설에 직면했다. 

보편적 가치로서 인권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차별금지법 제정이 실질적인 단계에 들어서면 공동발의나 찬성의견을 철회하며 꽁무니를 내뺀 국회의원들을 지켜보며 어느 순간 ‘제대로 못할 거라면 차라리 차별금지법에 대해 언급을 아예 안 했으면 좋겠어’라던가, 나조차도 ‘이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해’ 혹은, ‘나중에’라는 생각을 하는 지경에 이르자 현타가 왔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전히, 정치가 세상의 변화를 견인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그 수단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나를 비롯한 유권자로서 게이 개개인이, 게이 커뮤니티가 옳은 것, 당연한 것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 더 영리하고 유능하게 생각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친구사이에서 마련한 <이렇게 된 이상, 국회로 간다>는 주권자-시민으로서 게이들이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고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장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친구사이 회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하지 못할 거면서 기대만 갖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친구사이에서 마련한 이 소중한 불씨가 미약하게라도 꾸준히 이어져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영리하고 유능한 전략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길 소망한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이러다 판이 커져서 노동당-녹색당-정의당-진보당부터 민주당을 거쳐 국민의힘까지, 이 나라 제 정당의 모든 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게이 유권자 혹은 선출직 그룹이 형성되는 시초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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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회원, 정치싱크탱크 VALID / 반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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