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7월 |
|---|
[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10
: 출퇴근 귀농타령
요즘은 가끔 귀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밥을 먹는 친구 건너에 앉아 간식을 주워먹으며 귀농 얘기를 했다. “한 오 년쯤 뒤에 귀농하자면 어떨 것 같아?”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고민하다가 글쎄 오 년은 너무 이른 것 같다고 대답했다. 꽤나 진지하게 고민해주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 귀농 욕구가 좀 가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출근 걱정만 아니었음 내가 진짜 귀농이 하고 싶은 건지 생각할 시간도 좀 내봤을 텐데. 출근 앞에 자아성찰은 분수에 지나친 감이 있다.

새 회사에 출근하며 더 이상 도시락을 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근처 식당에서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밸런스 게임을 했다. 월급 20% 깎고 주 4일 일 하기 vs 그냥 그대로 살기.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했고, 몇몇 동료들은 고민할 것도 없이 후자를 택했다. 옆자리 동료도 전자를 택했는데, 남는 하루에 외주를 받으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이유였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사이드잡으로 넘어갔고, 각자 외주나 프리랜서 경험을 공유하며 마저 식사를 이어갔다. 새 회사 동료들과는 아직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 “와… 다들 퇴근하고 또 일할 시간이 남아요?” 하고 말았지만, 머릿속으론 하루 종일 그 밸런스 게임을 생각했다. 사무실에 돌아와 오늘의 투두리스트에 한 줄 한 줄 가로줄을 그으면서도, 퇴근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주 4 일제도 좋지만, 매일 두 시간 씩 덜 일 하고 월급을 25% 깎는 건 어떨까.
그럼 하루에 여섯 시간 일 하고,
일곱 시간 정도 자고,
세 시간 정도 먹고 씻고,
두 시간 정도 운동 다녀오고,
두 시간 반 정도는 출퇴근, 그리고 중간중간 증발하는 시간이 도합 30 분 정도.
해야 할 일을 다 하고도 세 시간이나 남는다. 벌써 행복하다. 그러나 이 행복한 상상과 계산이 내게 확인시켜주는 건 결국, 지금의 일상엔 단 한 시간의 잉여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체 어떤 회사가 갑자기 내게 주 4 일제나 하루 두 시간 단축근무 같은 걸 제안하겠나.1) 아무튼 이렇게 글을 쓰거나 줄곧 춰왔던 춤을 춘다든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해본다든지, 하다못해 귀농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본다든지, 그런 걸 하기에 한 시간은 확실히 모자란다.
그래도 전 직장의 일상을 떠올리면 지금은 썩 나아진 편이다. 전 직장에 일 년 반쯤 다녔을 때였나. 풀재택이던 회사에 갑자기 주 5 일 사무실 출근령이 떨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공간분리'나 '좋은 컨디션' 같은 거 운운하면서 건방떨지 않고, 어떻게든 서울에 자취방을 얻지 않았을까? 경기도 자취를 선택할 수 있던 건 다 재택근무 믿고 그랬던 거였다. 방심한 만큼 내 일상은 몰라보게 겸손해졌다. 빨간 버스는 탈 수라도 있으면 다행이었고,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렸다간 정류장에 멀뚱히 서서 '잔여좌석 0석' 버스를 몇 대 씩이고 보내야 했다. 재택근무하던 일상이 그리웠다. 영양소를 고려해 일주일 치 장을 보고, 나를 먹일 요리를 하고, 적당한 시간에 운동하고, 짬내서 책도 읽고. 하루의 8분의 1을 길에서 보내게 됐으니 포기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도시락 가방에 두 끼 도시락을 담아 한쪽 어깨에 이고, 가방엔 노트북과 운동복을 담고, 최단 시간과 최적 경로를 계산하며 하루를 보냈다. 빨리 잠들어야 내일도 이 아등바등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강박이 되었고, 외려 그 시기에 나는 불면증의 괴로움을 몸소 깨우쳤다.
돌아보면 새 회사가 강남역 코 앞에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격스럽다. 광역버스 신세를 면하진 못했지만, 출퇴근이 도합 30 분도 더 줄었다. 무엇보다 환승없는 출퇴근을 얻었다! 두 끼 도시락을 이고 다니는 무모한 도전을 포기할 줄도 알게 됐으니 훨씬 살 만해졌다. 그런데 왜 나는 아직도 엉뚱한 밸런스 게임에 마음을 빼앗기는 걸까. 언젠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면, 그래서 한 시간 이내 출퇴근을 마침내 이뤄내면, 그럼 정말 귀농 타령도 멈추게 될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전 회사를 다니던 때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어느 금요일 퇴근길, 전 회사 동료 J는 개발자 일을 그만둘 거라고 했다. 퇴사하고 해외구매대행 사업을 할 생각이라고… 엉뚱한 얘기를 곧잘 하는 분이라 그러려니 했다. 회사에서 일 하는 정도면 혼자서도 얼마든 잘 해낼 수 있지 않겠냐 묻는데, 그게 나한테 묻기보다는 스스로를 격려하는 듯 들렸다. 회사란 건 언제든 어려워질 수 있으니 항시 각자 살 길을 준비해야 한다며 결의에 찬 눈빛을 해보였다. 평소엔 일할 때마저도 그저 해맑던 무지렁이가 주말 앞둔 퇴근길에 갑자기 뭐 이렇게 비장하고 난리인가. 근데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건 나였다. 난 그게 영영 퇴근길인 줄도 모르고 맘편히 주말을 보냈다. 코로나 종식,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IT업계, 갑작스런 재택 근무 종료, 그리고 이어진 희망퇴직자를 받는다는 전사공지. 돌이켜보면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결말을 애써 상상하기도 어렵겠다. 돌아온 월요일, 대표의 황당한 눈물쑈를 마지막으로 2 주 뒤 나와 동료들은 손에 손 잡고 졸업하듯 퇴사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J는 인원감축 계획을 미리 전해듣고 내게 은근히 정보를 흘려준 거였다! 고마운 J, 근데 좀 알아먹게 흘려줬으면 좋았을 것을.)
동료들은 남은 2 주간 필요한 자료를 백업하고 이력서를 쓰고 그렇게 바로 이직모드에 돌입했다. 만삭 아내가 있던 동기는 퇴사 한 주 만에 새 직장을 찾았고, 구매대행 어쩌고 하던 J도 금방 새 직장에 개발자로 취직했다. 나는 새 직장을 찾지 않았다. (‘찾을 수 없었다’고 쓰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다. 어찌됐든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 나는 중요한 질문을 2 년 가까이 미뤄왔던 것 같다. 개발이 정말 내 적성에 잘 맞는 일인 걸까? 2 년이나 미룬 걸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 같은 거, 말로만 떠들 뿐 사실 그닥 중요치 않은 사람인 걸까 생각도 든다. 근데 그건 너무 결과만 놓고 본 야박한 생각이고. 늘 같은 생각을 하며 살긴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인생에 어딨나. 중요한 일이 항상 급한 일은 아닌게 문제일 뿐이지. 출퇴근하는 일상을 정신없이 굴리다보면 알게 된다. 작고 급한 일이 모이면 중요한 일 쯤 가뿐히 압도할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어쩌면 핑계처럼 들릴 거란 걸 안다. 진짜 중요하면 그 와중에도 짬을 내야 했다든지, 몇 년씩 쉽게 압도당하는 걸 어찌 중요하다 할 수 있냐든지, 그런 말은 스스로도 많이 해봤다. 오히려 그냥 잊으면 될 질문을 왜 불편한 마음으로 2년씩이나 미뤄왔는지가 나는 미스터리다. 퇴사 후 1 년이나 새 직장을 찾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해보겠다고 설쳐 댄 거 그게 진짜 이상야릇한 일이다.

1 년 넘게 새 직장을 찾지 않고 날린 돈을 셈해보자.
바로 다음 회사를 찾아 나섰다면 1 년 가까이 벌었을 돈이 몇 천 됐을 거고.
모아 놓은 돈 중에 생활비로 쓴 돈이 일이천쯤. (뭐 이거야 회사 다녔어도 썼을 돈이긴 하지만.)
사업자등록하고 세금 낸 거 (번 것도 없는데 이건 대체 왜 낸 걸까), 비상주사무실 계약한 돈, 다달이 나간 서버 비용, 웹사이트 디자인 맡긴 거, 결제 붙이면서 PG사에 가입비 냈고, 명함 제작했고….
더 떠올리면 슬퍼질 것 같으니 이쯤 해보자. 희망?퇴직을 하고 한 석 달쯤 돼서야 내가 하려는 게 소위 말하는 ‘창업’이란 걸 깨달았다. 장래를 꿈꿔 마땅한 시절에 나는 내가 개발자가 될 거라곤 상상해본 일이 없고, ‘창업’은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없다. 회사를 그만두면 노래노래를 부르던 대학원에 갈 줄 알았다. 실제로 내가 한 건 댄스 스튜디오 예약/관리 서비스를 만들고 영업을 다닌 거였다. 팔자에도 없는 개발을 하느라 충분히 행복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루에 열 시간도 넘게 컴퓨터 앞에 앉아 개발을 했다. 밤낮 없이 MVP2를 개발하는 동안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어 신기했다. 전직장에 다닐 땐 ‘죽고 싶다’까지는 아니어도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상관 없겠다’는 마음이었다. 개발이 못견디게 싫었던 적은 없다. 그렇다고 주말에도 코드를 치고 싶거나, 월요일을 기대할 만큼 개발이 재밌었던 적도 없다. 하루 가장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지만 회사 일을 열심히 한다고 내 삶이 흥미로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생활이란 게 그저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거라면, 그러면 언제 끝나도 상관없다는 마음이 된 거다. 내 서비스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후에는, 약간 프런코 황재근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거야!” 죽더라도 MVP는 완성해보고 죽어야돼… 그러니 따지고 보면 이 때가 나한텐 월급받던 때보다 더 ‘살만 한’ 시간이었다.
영업에 나서기까지 과정은 사실 험난했다. 더 이상 출퇴근에 시달리지 않았지만 출퇴근이 사라지자 워크와 라이프의 경계도 함께 허물어졌다. 깨어있는 동안은 밥을 먹고 운동을 가도 출근 상태에 가까웠고 자려고 누우면 그게 퇴근이었다. 에러에 가로막혀 기능을 채 구현하지 못하고 잠에 들면 가끔 꿈에서 해법을 찾기도 했다. (일어나보면 늘 말도 안 되는 엉뚱한 해법이었지만.) 이게 버틸만 했던 걸 보면, 내가 그리워한 건 재택근무시절이 아니라 고교·대학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이 늘 손 닿을 곳에 있었고 난 그저 정신없이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됐었다. 마침내 되찾은 삶에 의욕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다 상쇄해 주는 건 물론 아니었다. 말마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익 없는 일상은 ‘살기’보다는 ‘버티기’의 자세로 임해야 했다. 자주 불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업자를 고르는 건 결혼상대를 고르는 것만큼 신중해야 할 일이라 했거늘…. 난 이 사회가 내게 결혼을 허락한 만큼 신중했다. 함께 퇴사한 전 직장 동료 A는 내 계획을 듣곤 서비스를 함께 개발해보고 싶다고 해주었다. 프론트엔드 개발 경험이 전부였던 내게 넝쿨째 굴러들어온 10년차 백엔드 개발자는 그야말로 ‘이게 웬 떡’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100 년차 풀스택 개발자라 할지라도 함께 하지 않을 이유를 100 가지 쯤 댈 수 있다.3
아직도 정확히 기억난다. 현충일 다음날이었다. 6월이니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반 년도 더 넘었을 즈음.
달호님, 저 좀 큰일이 있어서 오늘까지는
연락이 안 될 갓 같아요
주말에 이번주까지 하기로 한 거 올려 둘
게요!
빨리 처리 되면 빨리 연락할게요
주말 잘 보내요
동업자가 되기에 A의 인생엔 ‘큰 일’이 너무 잦았다. 직장도 그만두고 하고 있는 일인데 이보다 큰 일이 대체 무어냔 말인가. 대강 ‘큰 일’로 얼버무린 숱한 잠수, 그간 참을 만큼 참았다.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될 거란 건 니 마음이고, 난 연락 받을 때 까지 걸 심산이었다. 대여섯번 전화를 건 끝에 통화할 수 있었다. 장례식이라고 했다. 아차, 내가 실수한 건가. 작아지려던 찰나, 속아줬던 지난 날들이 머릿속에 빠르게 되감겼다. A가 보낸 카톡, 장례식이라기엔 어딘가 좀 가벼웠다. 되묻기 시작하자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친구 장례식이라고… 친구의 친구 장례식이라고… 친구가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고… 이야기의 전말을 들어보니, 모처럼 휴일이라 친구들과 술을 마셨는데, A의 친구가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와 힘들어 하길래 곁에 있어줬다는 거였다. 이야기는 갈수록 허무맹랑해졌고, 그럴 수록 내 꼴이 우스웠다. A에겐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아도 될 이 프로젝트에 나는 사활을 걸고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도 A는 입버릇처럼 이제 진짜 제대로 하겠다고 했다. 그래도 우리 꽤 많이 완성하지 않았냐고, 고지가 눈앞이라고…. 꿈을 빌미로 착취당하는 아이돌 연습생의 기분을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프로젝트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 A에게 설명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A는 내가 얼마나 진심인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렇게까지 제멋대로 일 수 있었겠지. 오히려 내 쪽에서 뭔갈 깨우쳐야 했다.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시달리고도 계속 절실했던 걸까.


결혼한 적도 없는데. 그 후론 단기 속성 이혼 체험판 같았다. 장례식 어쩌고 떠드는데 널 참아주는 나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좀 과장함)이라고 핸드폰에 대고 악에 받쳐 소릴 질렀었다. 한바탕 울어제끼고 나니 판단이 섰다. 후에 A에게 프로젝트에서 빠져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고, 잠시간의 숙려기간을 가졌다. 백엔드 서버는 어쩌지, 영업은 또 언제까지 미뤄지는 거지, 남은 예산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는 거지 하던 걱정은 다 부차적인 게 됐다. 세무서 앞에서 A를 기다리며 혹시 또 잠수를 타버리는 건 아닐까, 나와서 해코지하면 어쩌지 초조해하기도 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 정도 개차반은 아니었고, 공동사업자도 공동명의계좌도 다 잘 정리했다. 이제는 프론트고 백이고 모든 일이 내 몫이 되었지만, 그래서 잡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A가 갖가지 핑계를 동원해 반년 가까이 질질 끌던 일은 백엔드 코드를 처음 짜보는 나도 두 달 여 만에 따라잡을 양이었다. 여름을 꼬박 매달려 시스템을 얼추 완성했고, 가을이 되어 마침내 영업에 나섰다. 직접 발로 뛰어 서울 소재 댄스 스튜디오 곳곳을 방문해 서비스를 소개했다. 끝내 고객을 찾지는 못했고, 일년 간의 좌충우돌 창업도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난 다시 직장인 개발자가 됐다. 난데 없는 계엄이 터지고 상황이 혼란해지자 계속 사업해보겠다고 버티고 있었으면 어쩔뻔 했냐는 얘길 종종 들었다. 새 회사 대표님은 얼어붙은 스타트업 투자 시장의 이모저모를 직접 들려주기도 했고. 그래, 그 때 그만둔 게 천만다행이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면 한 편에 아쉬운 마음이 남은 게 느껴졌다. 뻔한 수사지만 일 년을 공들여 남들에게 소개하고 나니 내가 만든 서비스가 꼭 내 자식 같았다. 프로젝트를 계속해야 할지 아님 그만두고 새 회사를 찾아야 할지 고민할 때, 전직장 입사동기 H에게 조언을 구했다. 둘다 비전공자 출신 개발자였던 우린 비슷한 시기에 전 회사에 입사해 비슷한 고민을 하며 일했었다. 관심 분야의 서비스를 개발하면 그래도 좀 나은지, 유저가 많은 서비스를 개발하면 동기부여가 더 잘 되는지 질문을 쏟아냈다. H는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했다. “솔직히 지금은 일에서 재미를 찾을 생각은 잘 안 해요.” 퇴사 후 일주일 만에 새 직장을 찾은 H의 아기는 벌써 돌이 지났다. H는 일은 일이고 가족을 생각하면 직장에선 무얼 개발하든 그럭저럭 버틸만 하다고 했다.
결혼이나 육아따위가 내 몫이 아니란 걸 배우기 전에도 나는 기왕이면 일을 통해 뭔가 해내고 싶었다. 퇴근 후에 풍요롭기 보다는 일하면서 보람 있는 인생이길 바랐다. 게이로 살아가기 나쁘지 않은 방향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매 시절마다 적성에 꼭 맞는 일을 지속적으로 발견한다는 건 노력만으론 어렵다는 걸 알았으면 더 좋았을 거다. 적당한 노력과 운이 따라주어 개발자가 되었지만, 취업 전선에서 매순간이 최선의 선택이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직장에서의 개발은 안정적인 일상을 보장해주었지만 매번 의욕이 넘치는 일은 아니었고, 나는 어느 순간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면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부지런을 떨어도 일상을 돌아보면 자신있게 내 몫이라 할 게 별로 없었다. 이 때쯤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일’이란 게 내가 선택한 샘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유일한 샘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족과 학교의 경계 밖으로 나와 본격적인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내 삶엔 더 이상 의미를 길어올릴 우물이 도처에 갖춰져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대단한 사명이나 필연적인 이유같은 게 있는 삶이 몇이나 되겠냐고 생각해 넘기려해보지만 개운치가 않다. 인생 하나를 통째로 관통할 거창한 이유는 아니더라도, 한 시절 한 시절 정신을 팔아둘 콘텐츠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살아갈 적당한 이유’야말로 모두의 일상에 필요한 복지다. 결혼이나 출산, 육아란 게 어찌보면 서로가 서로의 삶에 마땅한 이유가 되어주겠다는 약속이 아닌가. 뜬금없는 귀농타령도 어거지 갓생도 결국엔 나한테도 일상을 붙들 콘텐츠가 필요하단 말이었다. 사서 고생하고 땡전 한 푼 벌지 못한 프로젝트를 접겠단 결심이 수월하지 않았을 이유가 무엇이었겠나. 좀처럼 ‘이유’랄 게 허락되지 않는 토양에서 그건 아주 오랜만에 손수 일군 내 몫이 자라나는 밭이었다. 이런 경험과 생각에 이르고 나니, 커리어의 영달이란 삶의 마지막 남은 동앗줄 마저 다 놓쳐버린 게 아닐까 마냥 불안해 했던 게 이젠 조금 낯설다. 이토록 아등바등이란 게 맘에 들지 않지만, 공공이 지원하는 콘텐츠풀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자체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다.

첫 영업날은 강남부터 신논현, 논현, 신사를 지나 압구정 일대의 댄스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가방 앞주머니에 주문제작한 명함과 베타서비스 체험계정 정보를 담은 쪽지를 넣고 노트북도 챙겼다. 강남에서 버스를 내리자 수험생이 된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마음이 아닌 게 오랜만이었다. 대단한 국가고시나 그럴듯한 자격증 시험이 아니라 좀 초라했는데 금방 괜찮아졌다. 어차피 시스템이 뒷배가 되어주지 않는 인생인데, 나라고 갖춰진 시험만 보고 살 이유는 없으니까. 매 스튜디오 문을 두드릴 때마다 예상치 못한 문전박대와 예상치 못한 환대가 번갈아 튀어나오는 여정이야 말로 오리지널 콘텐츠였다. 영업을 통해 실제 고객을 찾고 제대로 서비스를 론칭했다면 더 통쾌한 콘텐츠가 되었겠지만, 충분히 치밀하지 못했던 과정을 생각하면 그건 내 욕심이다. 개발이 내 적성인지 아닌지, 더 이상 알쏭달쏭하지 않다. 다음 기회를 엿보며 나름대로 견뎌줄만한 출퇴근을 한다.
1 이 부분을 쓸 땐, 아직 ‘주 4.5일제’ 이야기가 나오기 전이었다.
2 IT업계에서는 최소 기능 제품(“Minimum Viable Product”)을 줄여 MVP라 부른다. 앱이나 웹 서비스 개발 초기 단계에 빠르게 시장의 반응과 사용자의 피드백을 살피기 위해, 최소한의 핵심기능만 담아 개발한 제품을 말한다.
3 집을 짓는 과정에 비유하면, 백엔드 개발은 건물의 골조를 세우고 전선과 수도관을 놓는 작업, 프론트엔드 개발은 그 기반 위에 벽지를 바르고 스위치, 수전을 다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풀스택은 그 둘을 모두 할 줄 아는 개발자이고.
(그림_Vin)

[182호][활동스케치 #1] 혼인평등소송에 나선 회원들을 위한 <은수저> 선물
혼인평등소송에 나선 회원들을 위한 <은수저> 선물 혼인평등소송에 나선 회원들을 위해 <은수저> 선물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작년 10월부터 혼인평등소송을 시작...
기간 : 8월
[182호][활동스케치 #2] 말 걸기, 숨쉬기 — 친구사이·마음연결 프라이드 엑스포 후기
말 걸기, 숨쉬기 — 친구사이·마음연결 프라이드 엑스포 후기 지난 8월 23-24일, 주말 이틀 동안 사무국과 친구사이의 성소수자자살예방프로젝트 &l...
기간 : 8월
[182호][소모임] 책읽당 읽은티 #50 : 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 문집 합평 이야기
[소모임] 책읽당 읽은티 #50 : 할레드 호세이니, <연을 쫓는 아이> / 문집 합평 이야기 : 할레드 호세이니, 왕은철 옮김, 『연을 쫓는 아이』, 현대문학, 2022[2...
기간 : 8월
[182호][소모임] 이달의 지보이스 #50 : 2025 정기공연 <Why We Sing>
[소모임] 이달의 지보이스 #50 : 2025 정기공연 <Why We Sing> 1. 2025 지보이스 정기공연 : Why We Sing 일시 : 2025년 10월 19일(일) 오후 6시 장소 : 양천구...
기간 : 8월
[182호][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30 : 온누리가 사내연애, <3670>
[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30 : 온누리가 사내연애, <3670> ▲ 박준호 감독, <3670>(2025) 서울의 게이커뮤니티 종로·이태원은 만인이 만인에게 식되...
기간 : 8월
친구사이 2025년 7월 재정보고 *7월 수입 후원금 정기/후원회비: 12,203,405 일시후원: 17,264,300 사업 교육사업 : 1,480,000 마음연결(민관협력사업): 5,319,2...
기간 : 8월
친구사이 2025년 7월 후원보고 2025년 7월 정기후원: 637명 2025년 7월 신규가입: 4명 7월의 신규 정기 후원회원 서정현, 강진우, 함용길, 이현우 (총 4명) 증액...
기간 : 8월
[182호][알림] 친구사이 x <3670> 종로3가 GV 상영회
친구사이 x <3670> 종로3가 GV 상영회 종로3가의 게이를 담은 <3670>, 종로3가에서 게이들이 상영하다 ★ 영화 관람 후 관객과의 대화 진행 Host : 망원댁TV 킴 ,...
기간 : 8월
[182호][알림] 친구사이 x <RUN/OUT> 커밍아웃 성소수자 정치인 가능성 찾기 #1
커밍아웃 성소수자 정치인 가능성 찾기 #1 지금, 질문을 던집니다. “한국에서 정치에 도전하는 커밍아웃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본 적 있나요?&rdqu...
기간 : 8월
[181호][이달의 사진]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내란 옹호와 성소수자 혐오
친구사이가 2007년 이래 연대 단체로 참가 중인 무지개행동* 주관으로, 2025년 7월 22일 오전 11시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내란 옹호-성소수자 혐오 국민통합비...
기간 : 7월
[181호][활동보고] 2025년 상반기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5년 상반기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2025년 상반기가 지나고, 어느새 7월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내란 종식을 위한 윤석열 퇴진운동으로 시작한 2025년이기도 ...
기간 : 7월
[활동스케치 #1] 인권활동가대회 후기 지난 7월 18~19일 인권활동가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친구사이 사무국 3인도 참여했는데요. 성소수자 인권을 포함해 정말 ...
기간 : 7월
[181호][활동스케치 #2] 학술대회 후기 : 문란하고 난잡한 돌봄으로 우리의 관계를 구하기 위해
[활동스케치 #2] 문란하고 난잡한 돌봄으로 우리의 관계를 구하기 위해 - 2025 한국성소수자/퀴어연구학회 학술대회 ‘게이남성 돌봄이 위치한 다층적 풍경&...
기간 : 7월
[181호][활동스케치 #3]『퀴어 디플로머시』공부 모임 및 북토크 참여 후기
[활동스케치 #3] 『퀴어 디플로머시』공부 모임 및 북토크 참여 후기 윤석열의 계엄 여파로 사회가 술렁이던 올해 1월 초, 성소수자 대학원생/신진연구자 네트워...
기간 : 7월
[181호][기고] 로뎀나무그늘교회, 친구사이 사정전을 떠나며
[기고] 사정전을 떠나며, 새로운 공간에서의 기대를 담아 로뎀나무그늘교회가 친구사이 사정전에 첫발을 내디뎠던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2016년 9월, ...
기간 : 7월
[기고] 광장의 기준과 인사(人事) 나에게 다정해줘/ 안 그럼 죽어버릴 거야/ 아무도 구할 수 없음/ 움직일 수 없음/ 뱃속에서 마취된 몸에 팔다리가 생김/ 죽겠다...
기간 : 7월
[181호][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10 : 출퇴근 귀농타령
[칼럼] 내 불필요한 경험들 #10 : 출퇴근 귀농타령 요즘은 가끔 귀농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밥을 먹는 친구 건너에 앉아 간식을 주워먹으며...
기간 : 7월
친구사이 2025년 6월 재정보고 *6월 수입 후원금 정기/후원회비: 6,674,328 일시후원: 23,667,720 사업 무지개인권상 : 2,004,082 마음연결 : 120,000 마음연결(...
기간 : 7월
친구사이 2025년 6월 후원보고 2025년 6월 정기후원: 633명 2025년 6월 신규가입: 23명 6월의 신규 정기 후원회원 김태웅, 김보겸, 오창균, 아프, 이웅찬, 이민...
기간 : 7월
[181호][알림] 2025 친구사이 교육팀 하반기 프로그램 - 게이 커뮤니티 생활법률 강연
2025 게이 커뮤니티 생활법률 강연 ⚖️ 게이커뮤니티 생활법률 강연이 열립니다! 게이법조회의 현직 변호사들이 알려주는 성소수자를 위한 법률 상식! 친구사이 ...
기간 :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