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이제서야, 사는 게 그런 대로 나쁘지 않다, 고 생각하게 됐다.
될 수 있으면 웃으려고 하고, 힘 닿는 한 낙관하려고 한다. 가끔 길을 걷다가도 `스마일'하면서 웃는 연습을 한다. 진짜다. 물론 아직은 표정관리가 잘 되진 않지만. 앞으로도 노력할 것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집착하지 않는 것이 모든 낙관의 비결이라는 깨달았다, 고 하면 과하지만, 하여튼 뭔가 변했다. 집착하지 않으려면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됐다. 하긴, 나는 B형 남자 아니던가?
집착을 버리니까 세상이 만만해졌다. 잘못해도 다음에 잘하면 되고, 거절당하고도 비참해하는 시간이 짧아졌다. 아니 짧아지리라고 기대한다. 의지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는, 이제 의지로 나를 (조금이지만) 바꿀 수 있다,고 믿어 본다. 노력도 한다.(담배 끊어야겠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집착을 버리면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들도 버리게 됐다.
집착을 버리면서 잃어버린 분실물의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진보정당`주의자'로 나의 정체성, 소비주의에 대한 결벽증, 제도에 대한 혐오, 평생의 파트너에 대한 기대, 가족에게 냉정해지기 등.
나를 지탱하던 기둥들이 무너지니까 사소한 것들도 달라졌다.
엄마와 놀아주기, 운동에 목숨걸기, 옷사기의 즐거움, 못된 말하기의 달콤쌈싸름함, 일 대충하기의 편안함, 일요일날 집에 틀어박히는 것의 달콤함 등.
새로 습득한 물품의 목록들이다. 남들이야 진작에 갖고 있었을 물건들이지만, 이제서야 갖고서도 챙피한 줄 모르고 떠든다. 그게 나다.
이제서야 '개인'으로 귀환하고 있다고 느낀다. 안다. 이제서야 그것들과 결별하다니, 늦되도 한참 늦되다.
이제는 거리에서 함께 하는 운동이, 헬스클럽에서 혼자 하는 운동 보다 즐겁지 않다. 그것이 나의 선택이다. 최소한 당분간. 정말 이제는 집회도 별 흥미가 없고, 회의는 정말 회의스럽다.
이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인 것 같다.
이것은 성장의 증거이며 또한 늙어가는 징후다.
나의 올해의 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고, 올해의 남자는 <조제..>의 주인공 츠마부키 사토시다. 도저한 성장영화인 <조제>에서 우리의 조제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그런 대로 나쁘지 않다, 이 부정형의 문장이 어쩌면 최상급의 행복이라는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는다.
P.S. 토요일날 <조제>를 보고 회사에 왔더니 여자친구 2명도 같은 날 그 영화를 봤더군요. 셋이 둘러서서 손뼉 짝짝 부딪히며 영화이야기로 수다를 떨었답니다. 만리녀 3명이 모두 '말로 형언키 어려운 감동', 영화인지 츠마부키인지 모르겠으나, 을 받았다고 입을 모았답니다. 꼭 보세요. 아직 시네코아에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족관에 갔다가 문이 닫혀 버려서 좌절하던 조제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보너스로 누군가가 만든 뮤비를 올립니다. 너무 좋아 너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