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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호][소모임] 제2회 문학상상상 당선작 : '습관과 추억'
2024-05-30 오후 16: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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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5월 

 

[소모임] 제2회 문학상상상 당선작

: '습관과 추억'

 

 

안녕하세요. 문학상상은 2018년 2월에 시작된 소규모로 문학을 읽는 친구사이 내 소모임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여러 글을 읽어가다 보면 같이 책을 읽는 분들이 어떤 글을 쓸까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런 호기심이 증폭되어 4년 전 열렸던 ‘제1회 문학상상상’이라는 행사와 동일한 컨셉으로 제2회 문학상상상이라는 퀴어소설, 수필 공모전을 열게 되었습니다. 제2회 문학상상상에는 총 일곱 분이 참여하여 일곱 개의 퀴어 소설, 수필을 발표해 주셨고, 참가자들의 투표로 장원을 선정하였습니다. 장원작 <습관과 추억>을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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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과 추억

 

 

 

“넌 나한테서 완전히 아웃이야.”

 

정민은 회의실 한 켠에서 김차장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정민은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라 황망한 마음에 눈을 내리깔다 불안한 눈으로 정면을 보기를 반복했다. 김차장은 옆으로 돌아앉아 팔짱을 낀 채 정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민이 영업팀에 입사한 뒤 얼마 후에 가진 술자리에서 정민이 너무 얌전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던 김차장이었다. 근래에 김차장에게 거리를 뒀던 것은 사실이었다. 업무 차 동행했던 박람회에서 사무실 여직원들이 듣는 중에 이중에 누가 제일 예쁜지 정민에게 물어보았고, 정민은 그 질문이 불경스러워 일그러진 웃음으로 눙쳤다. 거나하게 취한 김차장은 정민을 짐꾼으로 삼은 채 박람회 부스를 돌아다니며 타사 영업사원들에게 꼬부라진 혀로 발음을 뭉개며 술냄새를 풍겼다. 그런 중에 정민이 부스에서 받아온 물건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면 센스 없고 굼뜬 자식이 되었다. 정민은 그날 잠자리에 눕고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존 본능이었을까, 정민은 어느새 김차장에게 꼭 필요한 말 말고는 하지 않게 되었고, 김차장도 묘하게 거리를 두는 정민을 드잡이할 구실을 벼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오늘 정민이 회의 때 발표할 자료에 경쟁사의 신제품 그림을 첨부하는 것을 깜빡한 것은 좋은 구실이 되었다. 김차장은 쏟아내듯이 말했다.

 

“장표만 실수하면 내가 말을 안 해. 사무실 앞에 발 매트, 그거 완전 꼬질꼬질하더라? 너 전임자 지훈이는 그거 이 주에 한 번은 화장실 가져가서 빨았어. 그리고 시간 날 때 선배들 영업 차량 세차 좀 할 시간이 없냐? 네 선배 은호는 그런 거 다 했어. 넌 아무 것도 안 하잖아. 내 말이 틀려? 네가 술을 잘 먹기를 해, 장표를 잘 만들기를 해, 선배들 뒤치다꺼리를 잘 해? 아직도 네가 선배들한테 미움을 받는 이유를 모르겠어?”

 

정민은 김차장이 지시하는 업무를 힘겹게 다 해냈지만 김차장은 새로운 일을 들먹이며 왜 이건 하지 않았냐고 나무랐다. 김차장은 더 할 말이 없는지 아무튼 지켜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정민은 억울했다. 내가 선배들한테 미움을 받는다고? 회식 때 다른 선배들이 김차장에게 정민을 좀 살살 다루라는 말도 했지만 김차장은 그럴 때마다 콧방귀를 뀌었다.

 

여느 금요일 밤의 정민은 넷플릭스를 보았지만, 김차장에게 잔뜩 혼이 난 오늘은 복잡한 마음에 어디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렇게 마음이 헝클어진 날엔 연인 승관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승관은 아침에 정민이 보낸 안부 메시지에 여전히 답이 없었다. 승관과 만난 지는 벌써 3년이 넘었다. 3주년이 되었을 때 정민은 부산을 떨며 커플 운동화를 구매해서 심드렁한 표정의 승관에게 선물했다. 장기 연애를 꿈꾸던 정민 자신을 위한 소소한 기념품이었다. 막상 배송된 운동화는 사이즈가 조금 작아 발 볼이 아팠지만, 반품 후 재수령하기가 귀찮았고 신다 보니 적응이 되기도 하여 그냥 신었다. 꿈에 그리던 오랜 연애였지만 승관의 얼굴을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승관이 벌써 몇 개월 동안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이직을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오래 못 보는 것에 서운함을 표하는 정민에게 승관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난 독한 사람이야. 어떤 거에 한 번 꽂히면 다른 건 안 보여.”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길 바랐지만 승관은 본인의 성격만을 거듭 말할 뿐이어서 일부러 정민의 기분을 더 망치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연애를 하긴 하는데 마음엔 점점 더 큰 구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승관의 적극적인 대시로 교제를 시작했고, 그의 목표에 대한 저돌적인 모습이 멋스러웠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시작된 뒤 과녁이 정민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는 데는 몇 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둘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맞대면 다행이었다. 장기연애로 안정감을 획득했다고 믿는 정민은 이 관계가 지지부진하더라도 깨고 싶지 않았고, 오랜 연애를 한다고 주변에 말할 때 뭇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을 받는 건 오래된 재미였다. 이제는 승관이 별 위안이 되지 않았지만 습관처럼 관계를 이어갔다. 오후 8시, 여전히 답장은 없다. 속상한 마음에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정민은 고개를 벌떡 들고 동네 술번개를 나가 술이라도 원 없이 마시기를 결심했다. 핸드폰을 꺼내 성소수자 커뮤니티 게시판을 뒤졌고 정민이 사는 지역의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모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신청의 메시지를 보냈고 몇 분 후 초청의 답장을 받았다.

 

모임 장소는 어느 스시 집이었다. 한겨울의 칼바람이 매서웠지만 정민의 마음에서 마른 볏짚을 태우듯이 일어나는 불길을 꺼뜨리진 못했다. 패딩을 껴입고 가게로 향했고, 도착한 뒤 직원이 안내하는 룸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6인 테이블에 또래로 보이는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모임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지 접시에 회가 절반 정도 남아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그런 뒤 옆 사람이 술을 따라주자 한 번에 전부 들이켰다.

 

“입장 주는 원 샷인데 알아서 잘 드시네요.”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근데 룸 번호는 아직 말씀을 안 드렸는데 어떻게 찾아오신 거예요?”

 

검은 옷이 물었다.

 

“입구에서 직원이 묻지도 않고 여기로 데려오던데요?”

 

“헐, 나도 그랬어요. 우리 게이인 거 다 들켰나 봐. 하긴, 이렇게 음기가 강한데.”

 

검은 옷 옆에 앉아있던 파란 모자를 쓴 남자가 말을 얹었다. 검은 옷이 모임의 주최자인 듯싶었다. 옆 사람이 따라주는 술을 빈 속에 몇 잔 들이켜서 취기가 훅 올라온 정민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난방이 잘 되어 바깥의 추위를 대번에 쫓아버리는 룸 내부의 포근한 습기, 가게의 다른 룸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취기에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는 고갯짓. 낮에 있었던 김차장과의 일은 쉬이 잊히는 듯했다. 검은 옷이 정민에게 여기서 가장 맘에 드는 사람이 어느 쪽에 있는지 물었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묻는 질문인 것 같았다. 그제서야 룸 안을 간신히 한번씩 둘러본 정민은 별 생각 없이 검은 옷과 파란 모자가 있는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딱 봐도 우리 과 같은데, 우린 언니예요.”

 

검은 옷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야, 저 분한테 왜 그래. 아닐 수도 있지.”

 

친구로 보이는 파란 모자가 검은 옷에게 핀잔을 주었다. 짓궂은 농담도 상관없던 정민은 그냥 웃었다. 많이 웃어서 얼른 분위기에 녹아들고 싶었고, 낮의 기억을 뇌리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나저나 한 분이 더 오시기로 되어 있는데 아직도 안 오시네.”

 

검은 옷이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그때 룸의 문을 열고 회색 후드티를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두꺼운 후디(hoody) 위로 드러나는 몸이 다부졌고, 처음 봤을 때는 흰 피부에 평범한 얼굴 같았다. 근데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정민은 후디를 몇 번 더 힐끔 살피다가 그가 잘생겼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유 없이 자꾸 눈길이 갈 리가 없었다. 회색 후디는 단언컨대 청일점이었다. 후디가 테이블에 앉자 술자리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는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것은 유쾌한 긴장감, 묘한 경쟁심, 저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일종의 전투 태세였다. 편하게 앉아 있던 다섯은 저마다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술자리 중 정민을 제외한 사람들이 후디에게 관심을 갖고 말을 붙였다.

 

“어디서 왔어요?”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왜 잔에 맥주만 따라요? 사케는 안 먹어요?”

 

후디는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은 듯 간신히 대답을 해내며 맥주만 홀짝였다. 관심 없는 상대에겐 넉살 좋게 농담도 하는 정민이었지만,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는 상대에겐 한 마디도 뱉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며 정민은 정종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술잔에 시선을 고정한 정민은 시야 속의 후디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느꼈다. 정민은 그러거나 말거나 후디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술만 연거푸 마셨다. 그에 화답하듯 술자리는 활기를 띤 채 계속 진행되었다. 검은 옷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뚱뚱한 남자는 술번개에서 애인 말고 친구를 만들기로 마음먹은 것인지 문장의 끝마다 ‘오빠’ 단어를 붙이며 분위기를 띄웠다. 사람들은 ‘나 오늘 집에 안 가, 오빠’ 따위의 문장을 내뱉는 뚱뚱한 남자의 재담에 자지러졌다. 술자리가 무르익는 와중에 정민은 후디를 제외한 사람들에겐 이야기를 곧잘 하다가도 후디에겐 유독 말을 아꼈다. 그때 검은 옷이 후디에게 물었다.

 

“아 맞다, 이걸 안 물어봤네. 여기서 마음에 드는 사람 있어요? 말하기 부끄러우면 어느 라인에 앉아 있는지 만이라도.”

 

후디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검은 옷이 앉은 쪽을 가리켰다. 그 방향엔 정민, 검은 옷, 파란 모자가 앉아 있었다. 검은 옷과 파란 모자는 서로 자신을 가리키는 거라며 악다구니를 놀렸다. 저 둘은 원래부터 저러고 노는 거 같았다. 정민은 자신은 절대 당첨되지 않는 행사장 제비뽑기 상자를 멀리서 바라보듯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참 부럽다고 생각하며 술을 홀짝였다. 어느덧 술자리는 파장 분위기에 접어들어 다음 술집으로 갈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다. 자기 몫의 계산을 하고 가게 밖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정민에게 후디가 다가와 산뜻한 말투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요?”

 

정민은 후디가 잘생겼으면서 남을 챙기는 매너도 있다고 생각하며 웃으며 대답했다. 술도 적당히 마셨겠다, 충분히 즐겼다 싶어서 이제 자기는 집으로 간다고, 재밌게 놀라고. 후디는 안주가 너무 부실해서 배고프다며 정민의 집으로 가서 뭘 좀 더 먹자고 했다. 정민은 당황하며 술자리에서 후디가 정민에게 혼자 사는지 물었던 것과 자신이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했다. 단순히 주워 섬기는 질문이 아니라 계획의 복선인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순간 승관이 떠올랐다. 밤 열한 시가 넘었지만 승관에게선 아직도 답장이 없었고, 김차장에게 시달린 정민은 그날만큼은 누구의 온기라도 느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었기에, 심지어 그 누군가가 후디이기에, 못이기는 척 주소를 알려줬다. 후디는 목소리를 낮춘 채 말했다.

 

“그럼,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그는 성큼성큼 계단으로 1층을 향해 내려갔다. 행동이 빠른 타입이었다. 정민은 사람들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집에 들어가 보겠다고 말한 뒤 원룸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후디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초행길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냐며 놀라자 후디는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정민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놀라웠다. 술자리에서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을 직접 본 것도 신기했지만 그 사람이 자신의 집으로 따라온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집으로 들어가자 후디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더니 피곤하다며 정민의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정민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배고프지 않냐며, 먹을 것을 좀 만들어 줄까 물었고 후디는 배고프단 말을 믿었냐고 말하며 웃었다. 정민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가 터졌다. 그러더니 후디는 옆에 누우라는 듯이 침대를 팡팡 두드렸고 그 기세에 눌린 정민은 후디의 옆에 누웠다. 후디는 정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궁금해져서 둘이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왜 이렇게 나한테 말이 없지? 그러니까 호기심이 막 생기더라고. 너가 전략을 잘 짰어.”

 

어느새 말도 놓아버린 후디였다. 정민은 이것이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격인가 싶었다. 말을 못 한 이유는 너에게 호감이 있어서라는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후디는 대답엔 관심이 없었는지 이내 온수매트가 따뜻해서 좋다, 이 방은 월세가 얼마냐, 너네 동네 술번개는 원래 이렇게 재미가 없냐 같은 말들을 내뱉더니 급기야 정민에 관해 물어보았다. 키가 몇인지, 담배는 피는지, 전공이 무엇인지. 정민은 성실히 대답하다가도 후디가 본인에 관한 질문엔 일절 함구하는 모습에 기분이 살짝 상했지만 그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지금 이 순간 육체적, 정신적 권력자는 후디였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고 불편할 수 있는 질문도 서슴없이 해대며 사람의 이야기를 끌어낼 줄 알았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정민은 자신이 몇 달 전부터 새벽에 회사로 출근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도 털어놓았다. 후디는 사장도 아니고 월급 받는 직원인데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말했고, 정민은 이 모든 것이 김차장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술 영업을 하는 정민은 김차장에게 업무에 관해 물어볼 때마다 대답 대신 곰곰이 잘 생각해보라는 핀잔을 들었다. 김차장에게 아쉬운 소리를 조금이라도 덜 하기 위해 정민은 이를 갈며 새벽에 출근해서 기술 자료를 공부했다. 그래서 실력이 부쩍 늘기도 했다. 정민은 김차장이 잘난 척 못하게 해줄 거라는 다짐을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디는 어둠 속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뒤 자신은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좋다며, 대부분 말만 하고선 실천을 하지 않는데 이렇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며 정민을 칭찬했다. 정민은 후디를 술번개에서 만난 터라 그를 다소 가벼운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꽤 진중한 삶의 태도를 지닌 것에 조금 놀랐다. 후디는 물어보지도 않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의 이름은 주혁이었다. 주혁은 정민의 옆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가더니 자신의 번호를 눌렀다. 서로의 연락처를 저장함과 동시에 둘은 주중의 누적된 피로가 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말을 하던 주혁은 눈을 감더니 금세 작게 코를 골았고 정민은 긴장이 되어 잠들지 못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정민은 주혁이 옆에 누워있었던 지난 밤을 되새겼다. 주혁이 사라져버린 지금 모든 것이 꿈 같았고 숙취만이 남아 어제의 일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했다.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연인 승관에게서 온 답장이었다. 어제 아침에 정민이 보낸 안부 인사는 승관의 이번 주말에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말로 돌아왔다. 만나자고 할까 싶어 선수를 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속이 썼다. 정민은 조바심이 났다. 승관은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고, 더 나이가 들기 전에 승관과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은데 승관은 자꾸만 멀어지는 것 같았다. 이유를 모르게 마음이 조급했다. 아쉬움을 토로하면 부담이 될까 싶어 힘내라는 표시의 이모티콘만 한 개 보내고 화면을 껐다. 그때 한 번의 진동이 또 울렸다. 승관이 또 뭐라고 보냈나 싶어 서둘러 화면을 보니 주혁이었다.

 

- 아직도 온수 매트 따뜻해?

 

간밤에 주혁이 침대에 깔린 온수매트가 따뜻하다며 오른쪽 뺨을 대고 엎드린 채 죽은 개구리처럼 몸을 침대에 밀착시켰던 것이 생각났다. 정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술자리에서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던 주혁은 정민과 단 둘이 있게 되자 기세가 살아난 건지 초등학생들이 쓸 법한 유행어를 쓰며 장난기 어린 모습을 잔뜩 드러냈다. 정민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쉴 새 없이 웃었다. 번호를 교환한 후 보낸 첫 메시지가 참 주혁 답게 엉뚱하다 싶었다. 주혁의 메시지를 읽으니 승관으로 인해 아픈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답장을 뭐라고 보낼지 고민하다가 주혁 덕분에 더 따뜻해서 좋았다고,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았냐고 주혁에게 물었다.

 

- 밤새 누가 코를 고는 바람에 한 숨도 못 잤어.

 

정민은 놀라서 자기가 코를 고냐고 물었다.

 

- 뻥이야. 이따 친구들이랑 노는데 지장 없을 정도로 푹 잤어.

 

- 놀랐잖아. 약속 있었구나.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다 와.

 

- 말투가 왜 그래? 네 선생님!

 

정민은 주혁의 아이 같은 무례함에 웃음이 터졌다. 주혁은 친화력이 좋았다. 타인을 만나면 긴장부터 하는 정민의 마음 속 장벽을 단번에 무너뜨린 건 선을 넘나드는 주혁의 장난 덕분이었고, 정민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주혁에게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 선생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 선생님이 학생한테 이상한 마음을 품잖아요!
 

정민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린 채 주혁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주혁과 죽이 잘 맞는다고 느꼈다. 주혁도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대뜸 정민에게 MBTI 타입을 묻고 대답을 듣더니 자신과 잘 맞는 타입은 오늘부터 그 타입이라고 해서 정민의 마음은 더욱 들떴다. 그날부터 주혁은 정민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매일 전화를 걸었다. 주로 주혁이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말하고 정민은 들으며 반응을 하는 대화였지만 정민은 이렇게 재미있는 통화를 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정민은 주혁과 통화를 수차례 하다보니 그에 관해 더욱 잘 알게 되었다. 나이가 서른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자신이 게이인 것을 뒤늦게 자각한 뒤 게이 라이프를 즐긴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쪽 문화에 관해 경험해 보고 싶은게 많다는 것. 그 말을 들은 정민은 주말에 할 것도 없던 터라, 주혁을 데리고선 게이 스팟을 돌아다녔다. 신림, 종로 3가로 주혁을 데리고 가서 게이바, 클럽, 술집을 소개해주었다. 주중엔 정민과 주혁은 같은 핸드폰 게임을 하며 더욱 친해졌다. 어느 날 통화에서 주혁은 정민에게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고 싶은데 잘 안 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돈 버는 것에 관심이 많던 주혁은 성공한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는데 자신은 잘 안 된다며, 독서를 소설로 시작해보는게 좋을지 정민에게 물었다. 이 순간 정민은 주혁에게 무엇을 해줄지 잘 알고 있었다. 술 모임이 열렸던 한겨울 밤 주혁이 자신에게 주었던 웃음과 위안에 보답하고 싶었다. 정민은 책을 한 권 선물해주겠다고 했고 주혁은 반색했다. 정민이 퇴근한 어느 저녁, 주혁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민에게 왔다. 명목은 책을 받아서 같이 도서관에 가서 읽자는 것이었지만 막상 차에 타니 데려간 곳은 영화관이었다. 정민은 달빛이 비치는 밤의 도로를 미끄러지듯 운전하는 주혁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해본 적이 얼마만인가 싶어 정민은 마음이 아리면서도 한편으론 뭉클한 행복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날의 만남을 마무리할 때쯤 정민은 주혁에게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건넸다. 심상하게 책을 챙기던 주혁은 다음 날 아침 댓바람부터 정민에게 이 책 왜 이렇게 재미있냐고, 책을 읽으면 원래 이렇게 머릿속에 그 상황이 전부 그려지는 거냐며 호들갑을 떠는 메시지를 정민에게 보냈다. 주혁은 자신이 책을 재밌게 읽었을 때가 초등학생 때 선생님이 강제로 읽혔던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고 했고, 그 때 선생님의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누군가가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눈빛, 사랑의 눈빛이었다. 책을 주던 정민에게서 그 눈빛이 보였다는 주혁의 말에 정민은 무엇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정민은 말을 돌릴 겸 주혁의 독서에 대한 의지를 북돋고자 과장하여 주혁을 칭찬했다. 정민은 자신은 책을 읽을 때 의식적으로 장면을 상상하는데 너처럼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거면 타고난 거라고, 독서를 앞으로 쭉 해보면 좋겠다고. 그 말을 들은 주혁은 역시 자신은 못하는 게 없다며 뽐내는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냈다. 주혁의 마지막 메시지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던 정민은 서둘러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그날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출근한 정민은 제일 먼저 노트북을 열어 여느 때처럼 회사 인트라넷 게시판을 확인했고 진급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미 팀장에게서 진급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사내 게시판에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한 것은 새로운 설렘이었다. 이 소식을 며칠째 연락이 없는 승관에게 알릴까 하다가 그만두고 진급자 발표 화면을 찍은 사진을 주혁에게 보내며 진급턱을 쏘겠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곧 주혁에게서 답장이 왔다.

 

- 오 정말? 정민 대리 축하해! 똑똑한 정민 대리가 사준다니 마음껏 먹어야지.

 

주혁의 너스레에 기분이 좋아진 정민에게 팀장은 오늘은 이정민 대리가 진급했으니 조직 운영비로 고기를 먹으러 가자고, 팀원 전부 갈 거라는 말을 했다. 정민은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날 저녁, 기쁜 마음으로 참석한 회식 자리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김차장이 정민에게 자꾸 면박을 주었다. 술 한 잔 들이켤 때마다 안주로 삼으라는 듯이 한 마디씩 던졌다.

 

“야, 이제 대리 되면 전부 알아서 해야하는 거 알지? 지금은 영 눈에 안 차서 하는 얘기야.” 

 

그런 뒤 또 한 잔 들이켜고선, 

 

“이정민, 너는 성격을 좀 바꿀 필요가 있어.” 

 

김차장은 할 말이 많지만 정민의 후배가 있어서 참겠다고 하다가도, 술을 몇 잔 더 들이켜자 정민의 언제 저질렀는지도 모를 과오들을 팀원들 앞에서 소상히 밝혔다. 다른 팀원들은 정민이 쓴 웃음을 지으며 고기만 연신 굽는 것이 안쓰럽게 느껴졌지만 가장 연차가 높은 김차장을 말리지 못하고 불편한 웃음만 지었다.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정민은 옆에 앉은 후배가 자신을 어떻게 볼까 생각했다. 김차장의 관심이 다른 곳을 향하자 그제서야 정민은 자신만 들리게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계속 고기를 집게로 뒤집었다. 

 

주말이 되어 정민은 약속대로 식사를 사기 위해 주혁을 중국 코스요리 전문점에서 만났다. 주혁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보여 어젯밤 뭘 하고 온거냐 장난스레 농담을 던지니, 이태원에서 놀다가 새벽에 들어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제 막 종로3가와 이태원의 게이 스팟을 알게 된 주혁은 오랜 목마름을 해갈하듯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에 새롭게 사귄 친구들도 있는 것 같았다. 피곤한 얼굴로 있다가도 전채요리로 나온 매생이 죽을 한 숟갈 떠먹자 주혁은 눈이 커지며 여기 진짜 맛있다고, 탄성을 내지르며 그 뒤로 나오는 탕수육, 유산슬, 칠리새우를 맛있게도 먹었다. 다 먹고선 배를 두들기던 주혁이 식사 중에 말수가 적던 정민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요새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정민은 처음엔 별 일 없다고 하다가 거듭 묻는 주혁에게 회식 때의 김차장과의 일을 털어놓았고 말문이 트인 정민은 김차장과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듯 다 말했다. 곰곰이 듣던 주혁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까다로운 아저씨들 마음을 얻으려면 일단 앞에서 죽는 시늉을 해줘야 해. 그 러니까 비위 좀 맞춰주라는 얘기야.” 

 

그리고 주혁은 정민이 하는 일들을 곰곰이 듣더니 모든 일을 다 열심히 할 필요는 없다며, 주어진 일 중에 이건 열심히 해야하는데 어떤 건 조금 힘을 빼도 되겠다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봐, 지금도 이렇게 요리로 배를 채운 다음에 마지막에 나오는 자장면은 배가 다 부를 때 먹으니까 간만 잘 맞으면 조금 덜 맛있어도 용서가 되는거야.”

 

정민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혁이 알려주는 처세술을 머리에 새겼다. 주혁은 말을 하도 열심히 했더니 몹시 피곤하다고 생색을 내며 오랜만에 정민의 온수매트에서 몸을 지지고 싶다고 했다. 정민은 잠시 승관이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주혁은 단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불편한 마음을 외면했다. 둘은 식사를 마친 후 주혁의 차를 타고 정민의 원룸으로 이동했다. 같이 침대에 누워 환담을 나누다가 주혁은 차에 두고 온 게 있어서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며 집을 나갔다. 몇 분 뒤 벨을 눌러서 문을 열어주니 주혁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케잌을 들고 있었다. 진급 기념 축하 케잌이었다. 정민은 놀라며 눈이 조금 뜨거워지는 걸 느꼈지만 눈에 힘을 주어 눈물을 삼켰다. 케잌을 한 조각씩 나눠먹은 뒤 정민과 주혁은 함께 다시 자리에 누웠다. 정민은 옆으로 누운 채 반팔을 입은 주혁의 차가운 팔을 매만졌고, 주혁도 눈을 감은 채 팔을 뻗어 정민을 품에 안았다. 배불리 점심을 먹은 주말의 오후는 달콤한 오수에 빠지기 좋은 시간이었다. 껴안은 둘의 숨소리는 처음엔 저마다의 리듬을 유지하다가 점점 같은 파형을 그렸다. 잠시 후 달콤한 꿈의 세계로 서로 손을 잡고 들어갔다. 

 

정민은 한동안 주혁이 알려준 대로 김차장을 대하고 업무를 처리했다. 업무의 경중을 나눠서 힘을 배분하는 것, 그런 중에도 1순위는 김차장에게 아부까진 아니더라도 열심히 비위를 맞추는 것이었다. 김차장은 처음엔 미심쩍은 눈빛으로 정민을 보았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정민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혁이 시킨 대로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차장은 어느날부턴가 정민에게 전에 없던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민은 김차장이 그리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김차장의 무례한 말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 정민의 기분을 망쳤다. 그래도 정민은 이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전보다 김차장과의 관계가 좋아져서 정민이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넘어가는 순간이 많아졌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나 허탈하면서도 주혁의 방법이 참 신통하다고 생각했다. 퇴근한 금요일 밤, 주혁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한참 뒤 주혁에게서 자신은 지금 이태원에 있다며, 새로 사귄 게이 친구들이랑 노느라 연락을 이제 봤다는 답이 왔다. 그 메시지 뒤에도 주혁에게 보낸 메시지에 관한 답은 오랜 뒤에 돌아왔다. 여전히 주혁의 메시지는 장난기 많고 다정했지만 정민은 앞으론 주혁을 보기가 어려울 것이란 걸 어렴풋이 느꼈다. 주혁과 자신이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걸 다 주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금 울적했지만 마냥 슬프기만 하진 않았다. 오히려 추억의 책장이 몇 장 추가된 느낌이었다. 인생이 조금 더 농밀해진 듯했다. 짧은 기간이더라도 자유로움 속에서 서로에게 좋은 것을 주고받았던 사람, 주혁. 내일은 토요일이고 승관을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다. 며칠 전 이직하려는 기업의 인적성 시험을 보고 여유 시간이 조금 생긴 탓이다. 승관은 바쁘다며 식사만 같이 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한 뒤 정민과의 일정을 잡았다. 정민은 문득 승관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잠시 뒤 그 생각은 내일은 승관과 꼭 헤어지겠다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다음날이 되어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려고 신발을 고르려니 신발장에 승관과 만난 지 3주년이 된 기념으로 샀던 운동화가 보였다. 오랜만에 한 번 신어보았지만 여전히 사이즈가 작아 발 볼이 조금 아팠다. 신발을 벗으니 발이 한결 편했다. 다른 신발로 갈아신은 뒤 정민은 대문을 나서며 크게 한걸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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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상 / 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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