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이런 부제가 근사하게 어울렸던 영화 '지중해'.
가브리엘 살바토레 감독은 1991년, 고적한 섬으로 여덟 명의 군인들을 데려가 자신만의 독특한 낭만주의를 구현하는데 성공했고, '지중해'는 네오 리얼리즘 이후 계속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던 이태리 영화의 새로운 부흥을 알리는 신호탄인 것처럼 받아들여졌지요. 허나 살바토레 감독이 '너바나'와 같이 야릇한 졸작을 만들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였고 이후 그의 영화들은 한국에도 제대로 소개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너바나 이후에 그의 영화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중해'가 도시 사람들의 가슴을 헤집어놓고 도피와 여행에 대한 낭만적 아나키즘마저 자극하던 판타지로 기록된 지 십여 년만에 살바토레 감독의 신작이 한국 땅을 밟았네요. 반가운 일입니다.
아임 낫 스케어드 (Io Non Ho Paura / I'm Not Scared, 2003)
53회 베를린 영화제 관객들을 술렁이게 했던 수작입니다. 살바토레 감독 특유의 낭만주의가 진하게 배여 있는 영화더군요. 그는 영화를 배경 속에 녹여내는 몇 안 되는 재능의 소유자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아름다운 이태리 시골 마을은 필름의 질감 속에 용해되어 영화 내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정교하게 배치된 카메라는 밀밭 위를 바람처럼 달리거나 나무 잎사귀 호흡에 맞춰 살랑거리며 움직이기도 합니다. 또 주인공인 아이들 시선으로 카메라 높이가 낮춰져서 위악적인 어른들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관객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구원에 관한 영화입니다. 유괴로 잡혀와 동굴에 갇힌 소년과 마을 소년의 우정을 통해 타락한 어른들의 세계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밀밭 아래, 숨겨진 땅굴이 있습니다. 마을 어른들이 절박한 가난 때문에 비밀리에 도시로부터 유괴해온 소년이 갇혀 있는 땅굴. 더러운 오물과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땅굴은 구원의 빛이 닫힌 지옥이지요. 눈이 먼 필립포는 빵과 물을 동굴 속으로 내려보내는 미카엘에게 말합니다. "난 죽었어." "넌 내 수호천사니?"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이 소년을 살리고픈 미카엘이 아니었다면 필립포는 죽었겠고 구원은 더 이상 소용없는 외침이 되었을 겝니다. 살바토레 감독은 폭력과 절망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계가 어떻게 아이들의 우정을 파괴하는지 눈 부시도록 아름다운 시골 마을의 풍경과 현악 4중주 위에 꼼꼼하게 뜨개질해놓고 있습니다. 동정 없는 세상이 아름다운 역설.
컷 연동 실수 때문에 곁들여진 잦은 페이드 아웃과 헐리우드 문법에 기댄 흔적들 때문에 다소 흠이 존재하긴 하지만, '난 두렵지 않아 I'm Not Scared' 라고 말하지 못하는 참혹한 우리 세계의 이면을 출렁이는 밀밭 속의 스릴러로 재현해낸 살바토레 감독의 신작은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가슴을 찡하게 저며내는 마지막 장면.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하니 은근히 흥분 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