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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이분법이란 통념 속에 오늘도 계속되는 희생들… 11월20일 추모의 날 맞아 사진전 등 다채로운 행사 열려
성적 소수자 인권단체 회원들이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해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11월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DoR·Transgender Day of Remem-brance)이다. 트랜스젠더 혐오로 살해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트랜스젠더를 향한 폭력과 증오범죄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날이다. 1998년 11월28일 살해당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트랜스젠더 여성 리타 헤스터에 대한 추모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해마다 세계 곳곳에서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과 그에 앞서는 트랜스젠더 가시화 주간(11월 둘쨋주)에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드러내고 인권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한국에서도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가 사진전, 추모회 등 여러 행사를 연다.
1.3일에 한 명꼴로 트랜스젠더 피살
추모의 날을 새기는 것에서 볼 수 있듯, 혐오 폭력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주요 인권침해 중 하나다. 해마다 전세계에서 혐오로 살해당한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보고서를 내는 ‘트랜스젠더 유럽’(TGEU·Transgender Europe)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2017년 9월까지 전세계에서 2609명이 트랜스젠더 혐오로 죽었다. 트랜스젠더가 약 1.3일에 한 명꼴로 살해당한 셈이며, 알려지지 않은 사건까지 고려하면 날마다 전세계 어느 곳에서 트랜스젠더 또는 성별 이분법에 따르지 않는 누군가가 희생되고 있음을 뜻한다.
트랜스젠더를 향한 살해·폭력·혐오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된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는 성별 이분법이라 할 수 있다. 성별이 여성/남성 두 가지로 고정돼 변하지 않는다는 통념 속에서, 사람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의사나 부모에 의해 하나의 성별을 지정받고 그것에 따른 겉모습, 행동거지, 성역할 등을 요구받으며 자라난다. 그리고 이분법적 통념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이 어떤지, 옷은 왜 그렇게 입고 다니는지, 성격이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든지 등 여러 가지 사회의 간섭과 억압을 받는다. 억압이 극단적으로 가면 성별 이분법의 틀을 벗어난 트랜스젠더들을 향한 혐오와 증오범죄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트랜스젠더가 일상에서 겪는 성별 이분법 억압 중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 자신을 ‘설명’하라는 요구다. 트랜스젠더는 병원, 법원, 직장, 일상에서 끊임없이 자신이 왜 자신인지를 설명하도록 요구받는다. 예를 들어 법적 성별 정정을 하려는 트랜스젠더는 법원에 ‘자신이 유아기부터 현재까지 일관되게 반대 성에 귀속감을 느꼈음’을 소명하는 성장환경진술서 제출을 요구받는다. 이러한 설명의 요구는 결코 트랜스젠더 개인이 겪어온 복잡다단한 삶의 서사를 들으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 통념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확인의 요구며, 성별 이분법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준법 서약의 요구다. 트랜스젠더는 이 요구에 따르지 않으면 일상에서 끝없는 차별과 혐오를 당해야 하고, 따를 때엔 진정한 삶의 서사를 가공하고 지워내야 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마주한다.
억압에 대한 성찰 없는 공허한 논쟁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몇몇 인물에 의해 ‘트랜스젠더 여성이 진짜 여성인가’라는 논쟁이 벌어졌다. 이를 깊은 고민 없이 가십으로 소비하는 기사들도 쏟아졌다. 한편에선 생물학적·법적 근거를 들어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다른 한편에선 트랜스젠더가 자신을 설명하는 방식을 들어 성별 이분법을 강화한다고 비난한다. 이 논쟁에서 사회의 성별 이분법 구조가 트랜스젠더에게 가하는 억압에 대한 성찰이 과연 얼마나 담겨 있는가.
‘진짜 여성이 누구인가’란 질문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을뿐더러 차별적 위계 구조를 낳기 때문에 지양할 질문이다. 생물학적 염색체, 주민등록번호로 단일한 ‘여성’으로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서 완전히 동일한 사람은 없다. 신체 조건, 장애 유무, 피부색, 연령, 성적 지향이 다른 여성들이 존재하며, 각자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삶이 있다. 따라서 여성들 사이의 다양한 차이, 사람들 간의 다양한 차이를 성별이라는 단일한 범주로 묶어 차별적 위계를 만드는 이 사회의 ‘젠더 억압’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을 제쳐놓고 진짜 여성이 누구인지 다투는 건, 진정성을 인정받기 위한 끝없는 경쟁을 일으켜 모두를 불행하게 할 뿐이다.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꿔보자. 트랜스젠더 개인에게 왜 자신의 성별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이 어떤 이유로 요구되는지, 누가 그 질문을 할 수 있고 누가 답할 의무가 있는지, 질문의 결과가 만들어내는, 혹은 만들어내려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질문할 것은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아닌 그 존재가 불화를 겪는 ‘성별’이어야 한다. 그 질문은 미국의 트랜스젠더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수잔 스트라이커의 말처럼 트랜스젠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러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왜 어떤 사람은 동성애자이거나 트랜스젠더인지 궁금해할 수 있고, 트랜스젠더 되기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려고 모든 종류의 이론을 대거나 많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구의 소수는 (아마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받아들여야 한다.”(수잔 스트라이커, <트랜스젠더의 역사>)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