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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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퀴어영화 #19
: <숏버스Shortbus>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두 개의 영화제가 열릴 때면 부산과 전주로 날아가고, 퀴어영화만을 상영하는 두 개의 영화제에도 매년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는, 나름의 영화 팬이다. 퀴어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리가 있나. 두꺼운 카탈로그를 샅샅이 뒤져 퀴어영화를 발견하고 전쟁 같은 예매에 성공했을 때의 희열이란. 그런데 막상 ‘내 인생의 퀴어영화’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려니, 일단 어떤 영화를 골라야 하는 지부터 막막했다. 인상 깊게 봤던 영화라면 <메종 드 히미코>, <브로크백 마운틴>, <해피 투게더>처럼 차라리 클래식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즐비하고, 그간 영화제에서 마주친 기발하고 재미난 세계 각국의 영화들도 수없이 많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나쁜 교육>, 톰 포드의 <싱글 맨>도 그 미친 영상미에 보는 내내 아주 돌아버릴 뻔했지. 그리고 고민 끝에 <숏버스>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왜?
‘내 인생의 게이영화’가 아니라 ‘내 인생의 퀴어영화’이기 때문에, 다시 한번 저 단어를 검색해보았다. ‘기묘한’, ‘괴상한’. 다들 주지하다시피, 이 뜻에서 출발해 현재는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이성애적 관점에서 보기에 우리는 ‘기묘하고 괴상한’ 사람들이니까. 자신의 퀴어함을 스스로 배척하지 않고 정체화하는 것이 퀴어 커뮤니티, 정치, 문화, 예술의 시작이라 할 것이다. 자신 안의 고정된 틀을 깨고 나오는 것, 자신과 다른 타인의 퀴어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들과 소통하고 공유하고 새로운 퀴어함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 면에서 <숏버스>는 2006년 당시 내게 가장 퀴어한 영화였다. 다른 퀴어영화들이 벽장에서 막 나오는 게이, 고통 끝에 그들을 받아들이는 가족, 재기 넘치는 게이 친구들의 스토리 등 ‘나의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었다면,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공감’에 방점을 찍을 수 있었다면, 이 영화는 게이로서 정체화가 어느 정도 완료되었다고 생각하던 나의 틀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특히 섹슈얼리티 면에서.

5년 된 커플 제이미와 제이슨은 (각기 다른 이유로) 관계를 오픈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의 관계에 세스가 추가된다. 제이슨을 스토킹하는 캘렙도 얽힌다. 세브린은 SM 플레이로 돈을 벌며 취미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다. 오르가즘을 느껴본 적이 없는 섹스 테라피스트 소피아가 제이미와 제이슨을 만나 숏버스라는 공간을 소개받는다. 드랙퀸이 마담을 맡고 있는 숏버스는 정치, 문화, 예술, 섹스가 모두 섞여 있는 공간이다. 한 쪽에서는 술을 마시며 자유로이 담소를 나누고, 다른 쪽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난교를 하며, 영화를 보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하고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지금은 익숙해진 데이팅 앱도 등장한다.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가 모두 열린 채 뒤엉켜 있는 곳, 마치 60년대처럼. 눈을 사로잡는 영화 자체의 수위도 대단했다. 모든 인물들의 섹스를 실제로 보여준다. 실제 성행위 논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했다. 제이슨은 누운 채 다리를 들어 접힌 상태로 자위를 하고 본인의 입에 사정한다. 소피아는 남편 롭과 온갖 체위로 격한 오르가즘을 연기한다. 누운 채 세브린의 채찍질을 받아내던 남자는 침대 위 벽화까지 정액을 쏟아낸다. 제이슨, 제이미, 세스는 뒤엉켜 오랄 섹스를 하며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오르가즘에 목마른 소피아가 그 느낌을 찾고자 열심히 자위하는 장면은 무척 여러 번 나온다. 숏버스의 Sex-Not-Bombs 방에서 펼쳐지는 난교도 실제 섹스 그대로이다. 이것은 이전까지 보던 퀴어영화와 너무나 다른 ‘퀴어’였다. 즉, 다른 퀴어영화는 퀴어 당사자인 내게 전혀 ‘퀴어’하지 않았으나, <숏버스>는 어느새 내게 규격화된 게이 라이프를 부숴버리는 ‘퀴어’한 힘을 갖고 있었다.

이 숏버스가 이들에게 단순한 바 또는 난교의 장을 넘어 유토피아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은 그 공간과 사람들이 서로를 쓰다듬어주는 덕이다. <숏버스>의 인물들은 각자의 공허함을 지니고 있다. 소피아는 오르가즘을 천착하고 제이슨은 자살을 준비하며 제이미는 그런 제이슨을 불안해한다. 세브린은 본명을 밝히기도 꺼리는, 관계에 영 서투른 인간이다. 그런 이들이 숏버스에 모여 어우러지며 해답을 찾아나간다. 당연히 실수도 있고 틀어지기도 하고 예상치 못하던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숏버스 마담의 노래와 마칭 밴드의 협연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그 우여곡절의 모든 과정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라는 듯 퀴어 전반을 끌어안는 스탠스를 취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음악과 술과 섹스와 이야기로 풀어헤쳐진 어딘가 감동적인 관계. 물론 나이브한 결말이다. 911 이후 뉴욕 한복판의 비밀스런 퀴어 유토피아를 그려내려면 판타지 같은 면모가 있을 수밖에 없겠다. <숏버스>의 이론적 깊이나 학문적 성찰이 얕다는 비평도 많다. 개인적으로는 오픈 관계에 대해 둘의 착한 마음 말고, 좀더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자신이 죽고 나면 혼자 남을 제이미를 위해 관계를 여는 제이슨 말고, 제이슨이 떠나버리는 상황을 막기 위해 관계를 여는 제이미 말고. 서른 넷의 게이인 나에게 이런 아쉬움이 남는다면, 소피아의 오르가즘도 여성 퀴어 관객에게 어떤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지 궁금해진다.

<숏버스>를 보고 나면, 고작 ‘차별하지 말라’는 법 하나를 둘러싸고도 온갖 혐오가 넘실대는 이 땅에서도 이런 유토피아를 그려보게 된다. 나의 유토피아가 숏버스와 참 닮아 있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시끌벅적한 포차에서 이 친구 저 친구 만나면서 자리를 합치고 테이블을 뛰듯이, 나는 그렇게 섹스를 하면 좋겠다. 얘는 내 친구 누구야. 안녕하세요. 와서 앉아요. 한 잔 해요. 한 번 해요. 응 거기요. 어, 너도 와서 같이 해. 이모 여기 콘돔 좀. 익명성의 가면을 쓰고 서로 살덩이 대 살덩이로 얽히는, 싸고 나서 혹시라도 상대방이 내 얼굴을 기억할까 아니면 이름이라도 물을까 싶어 후다닥 나가 버리기 바쁜 사우나 말고, 훤히 밝은 곳에서 서로 응시하면서, 옆 사람들과 더 얽히고 설키면서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곳. 그러다 정치 얘기도 하고 지루할 것 같은 영화도 보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고민도 나누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곳.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커뮤니티의 모습은 그런 것이다. 그 때는 이 영화가 ‘퀴어’해보이지 않겠지. 지금 나에게 게이 모노가미 관계가 너무나 익숙해 하나도 ‘퀴어’하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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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77 34 B / Jay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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