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간 | 11월 |
|---|
1.
내가 처음 남자의 몸을 좋아한단 걸 알았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것이 나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지향과 이런 삶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런 성적 지향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삶을 꾸려보자는, 짐짓 '정답'에 가까운 생각을 처음부터 하는 행운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세계 속에 누군가는 불운하게 마련이고, 나나 여러분 또한 어쩌면 운이 좋지 못했을 수 있다.
구태여 남자이고플 필요도 없는 남자아이들과, 굳이 여자이고플 필요조차 없는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네들이 멋대로 남녀 한 쌍을 짝지어서 쟤네가 서로 좋아한다고 놀려대는 풍경을 대하면서, 드라마에서 주야장천 방영되는 남녀간의 연애담과, 연거푸 싸우고 헤어지거나 끝내 헤어지지 못하는 이성애 부부의 사연에서, 나는 세상 가운데 내가 처할 거처가 생각보다 좁을 수 있다는 걸 예감한다. 그건 분명하거나 예리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는개 깔리듯 삶 가운데 낮게 깔리는 쎄한 무엇에 가깝다. 물론, 운이 좋아 그것도 내뿔 내 삶이니 하고 태연히 사는 사람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 누구에게나 운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 몸 속에 큰 비밀을 안고 사는 이가 되면서, 그리고 그것을 남모르는 이와 조금씩 남모르게 풀어보기도 하면서, 나는 그 속에서 잠깐 느꼈던 쾌감 만큼이나 그것을 둘러싼 천 근의 공기를 예감한다. 이 쾌감은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나아가 이해하려하지도 않을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고 몸과 마음이 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하나 이해시킨다 해도, 저 많은 수의 사람을 어느 천년에, 어느 세월에 모두 설득한단 말인가. 대답이 어찌됐든 자신을 이해받고자 최대한 발버둥치고 싸우는 선량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운이 좋질 못했다. 나는 내가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특별한 결심이라기보다 내 삶을 전제하는 깊은 수맥처럼 내 안에 자리잡았다.
하나하나 싸워 물리칠 수 있든지 앞으로 변할 여지가 있든지 없든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 분명한 저 세상 앞에서 운 나쁜 이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애초에 세상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적대적일 것 같은 세상을 향해 내가 먼저 내 방문을 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 대한 일종의 복수이자, 한편은 세상에 대한 배려이기도 했다. 남들 살던 대로 사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지 내가 아는데, 남더러 그걸 알아달라고 소구할 수 있을까. 내가 네 평화로운 삶을 굳이 건드릴 만한 자격이 있을까. 너라도 저 거대한 세상에 기대 행복했으면 좋겠다. 기실 역지사지에 가장 능한 이들이야말로 무언가의 소수자들이다. 나도 나를 이해하기 힘든데, 세상이 어떻게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지내다보면, 세상이 뭐 조금 변한다 싶어도 별반 감흥이 없게 된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희망을 품는 이들을 보면 한편으론 생소하고, 한편으론 뭘 모르는 이들 같아보였다. 내가 무서워했고 싫어했고, 연민했고 종내엔 배려했던 그 세상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고, 그 세상에 대한 기대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것이 분명했다.
_
어느날 누군가가 내 꿈에 대해 물었고, 나는 무심결에 "꿈 없이 사는 게 꿈"이라고 대답했다. 명확한 지향점은 없어도 어디로든 뻗치는 열기는 있었기에, 나는 한동안 닥치는 대로 눈앞의 노동과 당장의 봉사를 하고, 바로 옆에 있는 인간들에게 인정받는 데 이상스레 집착했다. 그러면서도 딴에는 언제든 이 모든 것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고,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 인간들과 노동과 봉사가 모두 제 갈 곳을 찾아간 후에, 나는 하고 싶은 것이 모두 사라진 채로, 사실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몇 가지 경험과 능력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나를 발견했다.
너무도 임의적인 채 괴이하게 구성된 내 지난 날을 복기하면서, 나는 꿈이란 걸 꾸어본 적이 퍽 오래라는 것을 알았다. 내 꿈을 뉘일 세상을 믿을 수가 없었으므로, 나는 차츰 적당한 꿈을 꾸는 것에 익숙해졌고, 세상과 나에게 무언가 큰 기대를 걸고 높은 꿈을 꾸던 시절은 어느새 나에게서조차 잊혀져, 이제는 이 모든 것이 그저 황망하고 새삼스레 여겨졌다. 입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남몰래 다짐해온, 가슴팍에 내려앉은 체념과 낙백의 거대한 암반을 만지며, 나는 이 돌덩이같은 침묵의 역사가 궁금했다. 남자를 좋아하는 낯선 내 몸의 나보다, 그것을 싫어할 세상을 더 연민하고 그에 대한 기대를 끊던 그 시절의 나는 과연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2.
1957년 심리학자 커트 리히터Curt.P.Richter는 한 가지 실험에 착수한다. 들쥐를 두 군으로 나누어, 한 군의 들쥐는 그대로 두고, 한 군의 들쥐는 손에 쥐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움켜쥐었다 풀어주고는, 들쥐들을 모두 따뜻한 물에 집어넣었다. 전자의 들쥐들은 맹렬히 헤엄치며 평균 63시간을 버티다 죽은 반면, 후자의 들쥐들은 기운이 빠진 채 첨벙이다 평균 30분만에 모두 익사했다. 이 실험을 통해 그는, 들쥐들이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 이른바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을 갖게 되었고, 이는 보다 쉽게 삶을 포기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졌다고 설명했다.1)
또한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이 학습된 무력감이 "자신이 무엇을 하든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경험"을 통해 생겨난다고 밝혔다.2) 이러한 현상은 학습 능력이 있는 동물은 물론, 인간에게도 나타나며, 주로 동기부여가 안되고 인지능력이 왜곡되며 정서적인 혼란 및 우울증이 동반된다고 설명했다.3)
나아가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런 무력감과 우울에 오래 노출되다 보면, "말이라는 것이 역겹고 무가치한 것으로 변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말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별안간 또 무언가 토로하고 싶은 양가적 욕구를 지니게 된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이러한 경우 드러난 말보다 앙다문 침묵이 "훨씬 더 두껍고", 또 "위험"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한편 그는 이러한 우울의 증상이 치료되어야 할 질병이기에 앞서, 그 자체로 수용되어야 할 반응이자 세상에 대한 체험이며, 이러한 감정이 "깨져 열리는" 가운데 때로는 또다른 삶, 또다른 정치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4)
1) 박경숙, 『문제는 무기력이다』, 와이즈베리, 2013, 63-64쪽.
2) 마틴 셀리그만, 우문식·최호영 역, 『낙관성 학습』, 물푸레, 2012, 132쪽.
3) 김홍중, 「마음의 부서짐 - 세월호 참사와 주권적 우울」, 『사회와 이론』 26, 2015, 168-169쪽.
4) 김홍중, 「마음의 부서짐 - 세월호 참사와 주권적 우울」, 『사회와 이론』 26, 2015, 154-155, 160-161, 145쪽.

* 소식지에 관한 의견이나 글에 관한 피드백, 기타 문의 사항 등은 7942newsletter@gmail.com 으로 보내주세요.
* 소식지 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해당 게시판에서 신청해주세요. ☞ 신청게시판 바로가기
*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친구사이의 활동을 후원해주세요.
후원참여 바로가기
[커버스토리 ‘나이듦’ #1] 디어 마이 프렌즈 – 왕언니 '갈라'와의 데이트
[커버스토리 '나이듦' #1] 디어 마이 프렌즈 - 왕언니 '갈라'와의 데이트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
기간 : 11월
루빈카
디어마이프렌즈라는 부제와 왕언니라는 명칭을 보고서 세상과는 이제 등을 지고 황혼을 여유롭게 즐길 계획...
박재경
ㅋㅋㅋ 잘 읽었어요크리스 고생했네녹취 푸느라 ㅎㅎㅎ갈라 언니는 좀 더 세게 말할 줄 알었는데 어머 어디...
블루베리v
미래에 대한 팩트폭력(?)ㅡ이럴때 사용하는 거 맞나여ㅡ넘 시원했어욬ㅋㅋㅋㅋㅋㅋ
코러스보이
소위 활동가들이 차마 말하기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워 하는 부분들을 시원하게 긁어주셨네요. 몇몇 부분은 밑...
카아노
읽다가 저도 모르게 울컥했는데 이 대화가 내 등짝을 치면서 동시에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이 느껴져서 그랬나...
[커버스토리 ‘나이듦’ #2] 디어 마이 프렌즈 – 꽃중년 '구야'와의 데이트
[커버스토리 '나이듦' #2] 디어 마이 프렌즈 - 꽃중년 '구야'와의 데이트 대화 속에 예상치 못 했던 반짝임을 발견했다. 보통의 인생 선배, 유...
기간 : 11월
[커버스토리 '나이듦' #3] 미래 그리고 나 - 친구사이 회원들이 그리는 미래의 꿈
[커버스토리 '나이듦' #3] 미래 그리고 나 - 친구사이 회원들이 그리는 미래의 꿈 친구사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아론입니다. 크리스마스에 홀로 지내는 ...
기간 : 11월
[활동스케치] 2016 책읽당 4회 낭독회 & 문집발간회 참여기
[활동스케치] 2016 책읽당 4회 낭독회 & 문집발간회 참여기 예능보다 뉴스가 재밌어지던 11월 5일, 책읽당 낭독회가 있었답니다. 작년에는 보기만 했고, 그...
기간 : 11월
[활동스케치] 2016 친구사이 인권지킴이 교육 “실제상황! - 나를 지키기, 친구에게 도움주기” 후기
[활동스케치] 2016 친구사이 인권지킴이 교육 “실제상황! - 나를 지키기, 친구에게 도움주기” 후기 올 한해도 친구사이 인권지원팀은 ‘친구사...
기간 : 11월
[기획] <新 가족의 탄생 #5>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산다 - '성북마을무지개' 사람들 이야기
<新 가족의 탄생 #5>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산다 – '성북마을무지개' 사람들 이야기 ‘피가 섞이지 않아도 괜찮아. 서로 의지하고 ...
기간 : 11월
[인터뷰] 우리들의 종로이모 이야기 #4 - 치OOO 사장 최형우님
[인터뷰] 우리들의 종로이모 이야기 #4 : 치○○○ 사장 최형우님 순재 : 안녕하세요, 친구사이 소식지 팀 순재라고 합니다. 재경 : 박재경입니다. 형우 : (웃음) 최...
기간 : 11월
1. 내가 처음 남자의 몸을 좋아한단 걸 알았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것이 나에게만 오는 것이 아니고, 이런 지향과 이런 삶도 얼마든지 가능...
기간 : 11월
[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16 - <아이다호> * 수만 개의 삶과 사랑, 아픔과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매력에 빠져,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즐겨봅니다. 특...
기간 : 11월
* 소식지에 관한 의견이나 글에 관한 피드백, 기타 문의 사항 등은 7942newsletter@gmail.com 으로 보내주세요. * 소식지 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해당 게시판...
기간 : 11월
2016년 친구사이 10월 재정보고 *10월 수입 후원금 정기/후원회비: 7,594,525 일시후원: 360,000 정기사업 지보이스: 390,000 비정기사업 음원: 368 기타 이자: ...
기간 : 11월
[알림] 한국 성인 성소수자(LGB) 건강연구 설문조사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
* 포스터를 클릭하시면 설문조사 창으로 넘어갑니다. 레인보우 커넥션 프로젝트 : 한국 성인 성소수자(LGB) 건강연구 설문조사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기간 : 11월
[이달의 사진] 다큐 <위켄즈> 국내 최초 상영 - 친구사이가 제작한 다큐 <위켄즈>가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 최초로 상영됐다. 이번 부산국제영화...
기간 : 10월
아! 대한민국...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 이종걸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우린 여기 함께 살지 않아)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기간 : 10월
[커버스토리 '군대' #1] 군형법 상 ‘추행’죄 폐지를 위한 1만인 입법청원운동에 돌입하며!!!
군형법 상 ‘추행’죄 폐지를 위한 1만인 입법청원운동에 돌입하며!!! 이종걸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 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 ...
기간 : 10월
[커버스토리 '군대' #2] 존재와 정체성을 위한 시험대, 양심적 병역거부와 군 복무에 대하여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성소수자 '이정식'님 인터뷰
[커버스토리 ‘군대’ #2] 존재와 정체성을 위한 시험대, 양심적 병역거부와 군 복무에 대하여 - 양심적 병역거부를 한 성소수자 '이정식'님 ...
기간 : 10월
[커버스토리 '군대' #3] 군대, 커밍아웃, 성공적 - 군대에 간 대한민국 청년의 숨기기와 드러내기
[커버스토리 ‘군대’ #3] 군대, 커밍아웃, 성공적 - 군대에 간 대한민국 청년의 숨기기와 드러내기 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국내의 한 포털사이트에...
기간 : 10월
[활동스케치] 2016 지_보이스 공연 <전체관람가>, 그 뒷이야기
[활동스케치] 2016 지_보이스 정기공연 <전체관람가>, 그 뒷이야기 선선해지는 날씨, 언제 썸을 탔는지 갑자기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커플들... 네, 그래요, 올...
기간 : 10월
1. 목욕탕 남탕, 속칭 '일반 사우나'에도 게이들은 있다. 그 일반 사우나의 수면실에도 물론 게이들은 있다. 그리고 그 수면실에서는 종종 남자와 남자...
기간 : 10월
[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15 - <파리는 불타고 있다/ Paris is Burning>
[에세이] 내 인생의 퀴어영화 #15 - <파리는 불타고 있다/ Paris is Burning> * 수만 개의 삶과 사랑, 아픔과 감동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매력에 빠져, 많은 사...
기간 :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