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민주화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한국. 하지만 민주주의의 또다른 평가 척도라고 할 수 있는 다원성은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다. 좌와 우가 있고 진보와 보수가 있지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평가하지 않는 ‘2008년 대한민국’에서 다원성이란 그저 형식적인 언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008년 4월9일 총선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성소수자 정치 참여’의 화두가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레즈비언인 진보신당 최현숙 후보의 종로구 출마가 ‘성소수자 정치 참여’라는 화두가 전면에 등장하는 계기가 됐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당선 가능성을 떠나, 그 자체로 한국 사회가 열린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표”(폴컴 이동구 이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성소수자의 출마를 ‘헌정 사상 처음’이란 선언적 의미를 부여하는 수준에서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성 문제를 학문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킨제이 보고서’는 남성의 4%, 여성의 3%를 완전한 동성애자로 추산했다. 수치가 과장됐든 아니든, 이들이 사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중권 중앙대 교수는 아예 저서인 ‘폭력과 상스러움’을 통해 “남이 동성을 사랑하든, 이성을 사랑하든 내가 거기에 찬성하거나 반대해야 할 이유는 없다”면서 “그걸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찬반을 표하는 그 행위 자체가 해괴하고 괴상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독교 장로이기 이전에, 인간은 남녀가 결합해서 서로 사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동성애는 반대 입장”이라는 뜻을 밝히는 등 주류 세력의 시선은 곱지않아 보인다. 왜 정치 참여인가 호의적이지 않은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금이 정치 참여의 적기라고 주장한다.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란, 성소수자의 성별 전환, 군대 내 동성애자 학대 등 사회 곳곳에서 동성애를 둘러싼 다양한 쟁점이 논의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이다. 국회에 직접적인 창구를 마련, 정책입안자들에게 자신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겠다는 주장이다. 최 후보의 선대본부격인 ‘성소수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네트워크’는 정책자료집을 통해 “차별금지법이 성소수자를 제외한 채 국무회의를 통과하고 국회로 넘어간 상황에서, 국회에 (우리를 대변해 줄) 커밍 아웃한 성소수자 국회의원 한 명 없는 것이 너무 아쉽다”면서 “몇몇 인권에 민감한 국회의원들이 도와주고 있지만 자신의 삶을 걸고 맞짱 뜰 성소수자 한 명이 절실하다”고 토로했다. 명지대 신율 교수(정치학)는 “(성소수자들의 정치 참여는) 자신의 권리를 제도권에서 찾는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성소수자들과 정치권의 연결 지점이었던 민노당도 한계를 노출했다. 성소수자위원회까지 뒀지만, 실상 당내에서도 성소수자와 관련된 의제는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었다는 전언이다. 성소수자 관련 공약은 일반 공약과 떨어져 별개로 다뤄지다 보니 실천력이나 집행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군대 내 동성애자들의 인권침해가 심각함에도, 민노당이 마련한 군인권법 제정에는 이 문제가 빠진 채 성소수자 관련 공약에서만 따로 다뤄졌다는 지적이다. 신율 교수도 “민노당은 지나치게 통일운동에 집착하는 등 성적소수자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고 했다. 성소수자 운동진영 내부에서 기존의 소극적 운동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도 강하게 제기됐던 터다. 민노당 내 ‘진보적 성정치 연구모임’의 황두영 연구원은 지난해 ‘성적 시민권과 성소수자 운동’이라는 글을 통해 “성소수자 운동은 사회의 다른 모순들과 연계되지 못했고 고립됐다”면서 “그 결과 성소수자 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을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만들었을 뿐, 성소수자 문제를 협상과 투쟁이라는 정치적 공간으로 들여보내지 못했다”고 했다. 무엇을 요구하고 있나 숙원 과제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 등을 명시한 차별금지법의 국회 통과를 이뤄내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받아 정부가 마련한 차별금지법에서는 성적지향·학력·병력 등 7개 차별금지 사유가 삭제돼, 성소수자위원회 및 인권 단체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그나마 이 법도 지난 2월12일 법사위 법안심사소위로 넘어간 뒤 진척이 없어 17대 국회에서의 처리가 불가능하다. 민노당 성소수자위원회 등이 정부법에서 삭제된 7개항을 복원한 별도의 차별금지법을 마련해 노회찬 의원을 통해 발의했으나, 역시 국회 법사위 법안심사소위에 계류돼 있다. 성전환자의 성별 변경 법안 및 동성간 결혼 등을 법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동반자 등록법도 우선 처리법안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성소수자 문제를 별개로, 전반적인 현안에 대해서는 진보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장애인·이주노동자 등 차별받는 계층과의 연대는 물론 이들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현 정부에 대해선 ‘반인권적 정부’라고 규정하고 강력한 투쟁을 벌이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성소수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네트워크’는 정책자료집에서 “극우 개신교를 비롯한 보수 세력은 호모포비아(Homophobia·동성애 혐오증) 대통령을 등에 업고 무자비한 공격을 가해올 것”이라며 “보수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 성소수자 정치를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성소수자 정치 참여의 역사, 해외 사례
성소수자위원회는 그해 9월 국회 국정감사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성소수자위원회는 인권단체 등과 함께 성소수자와 관련된 질의 자료를 준비해 민노당 의원들에게 제공했다. 이 자료에 기초해 교과서 및 방송 등에서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문제와 학교에서의 성소수자 아우팅(outing·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타인에 의해 본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 문제 등에 대한 질의가 이뤄졌다. 군대 내 동성애자들에 대한 인권침해 상황 등에 대해서도 사례별로 대응했고, 그 결과 국방부는 병역내 동성애자 관리지침을 만들었다. 노회찬 의원실에서 발의한 ‘성전환자 성별 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도 성소수자위원회 등이 주도했다. 2006년에는 성소수자 정치캠프를 열었으며, 지난해엔 성소수자 사회의식에 대한 실태 조사를 최초로 벌였다.
해외라고 편견의 벽이 없는 건 아니다. 미국 최초로 커밍 아웃한 하비 밀크 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이 당선 이듬해인 1978년 동성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동료 의원에 의해 살해된 게 단적인 예다. 그래도 일찌감치 쟁점화된 탓에 성소수자가 현실정치에 성공적으로 착근한 사례가 적지 않다. 2006년에는 미국 뉴욕시 의장 선거에 동성애자로 출마한 크리스틴 퀸이 당선됐다. 캐나다에선 최초의 레즈비언 국회의원인 리비 데이비스가 신 민주당의 원내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에선 민주당 소속으로 지역의회 선거에 출마해 최연소 오사카부 지방의원으로 선출됐던 오쓰지 가나코 전 의원이 유명하다. 2001년 3월 실시된 프랑스 지방선거에선 베르트랑 들라노에 사회당 상원의원이 파리 시장으로 당선돼 파란을 일으켰다. 독일에서도 동성애자임을 공개해 파란을 일으켰던 클라우스 보베라이트가 베를린 시장으로 선출됐다. 영국에선 성전환수술을 받은 제니 베일리가 최근 케임브리지 시장으로 뽑혔다. 헝가리 인적자원부 장관 가보르 체티도 커밍아웃한 게이다. 정치 참여 전망 당장의 선거구도에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 당장 성소수자들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사회 분위기는 크게 변화가 없어 보인다. 대중이나 언론의 시선은 그야말로 관심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차별금지법과 관련해서 ‘동성애반대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를 주도적으로 결성한 기독교단체 측의 반대도 예상된다. 실제 최 후보 측에선 “선거가 본격화되면 기독교계가 반대운동을 벌이지 않을까 우려한다”고 했다. 한나라당·통합민주당 등 거대 정당들이 정치 1번지인 종로에 각별히 신경쓰고 있는 것도 현실적인 당선 가능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그래도 전문가들도 긍정 평가를 했다. 당장의 성과는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출마를 계기로 적어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의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것이다. 정재훈 서울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사람들이 성소수자 문제를 머리로만 인식하지, 가슴으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가슴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정치학)는 “처음에는 굉장히 사소한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효과가 나올 것으로 본다”고 했고, 목진휴 국민대 교수(행정학)는 “과거 기득권층이나 특수집단에 의해 정치권이 움직였던 관행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용욱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