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잘 지내시죠?
드디어 태국 체류를 오늘로서 끝냅니다.
그동안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인터넷을 못하는 게 젤 답답했어요...
연결되지 않는 노트북만 원망스럽게 노려보면서 한글프로그램만 열심히 써댔죠.
그 중 하나... 제 일기를 살짝 발췌해서 공개합니다.
2003.1.21
이 곳은 태국의 서남쪽에 위치한 수린 주를 행정중심지인 수린이라는 도시입니다. 방콕에서는 기차로 여덟 시간 걸리고 캄보디아 국경과 비교적 가까운 곳이지요. 이 지방을 대표하는 도시이긴 하지만 그다지 크거나 번잡하진 않습니다. 이십년 전 한국의 지방도시와 비슷한 분위기라 할까...
아프리카에 간다더니 태국 시골에서 뭘 하고 있냐구요? 좀 지루하겠지만... 알려드리지요.
우선 새벽 닭소리를 들으며 일찍 잠에서 깨어납니다. 여기는 집집마다 왠 닭을 그렇게 많이들 기르는지, 그리고 그 닭들은 어찌나 경쟁적으로 울어대는지... 깨지 않을 수 없지요. 잠에서 깨어나면 아침공기를 마시며 마당에서 스트레칭이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부엌으로 가서 아침 준비를 합니다. 콘프레이크와 달걀프라이, 토스트, 약간의 채소 등이 전부이지만 몇 년만에 아침을 챙겨먹는 기분이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할 즈음 룸메이트인 까미유와 또, 스위스에서 출장 나와서 며칠간 같이 지내는 필립이 일어납니다. 그네들은 누군가가 아침을 챙겨주는 걸 신기해하며 내가 챙겨준 아침을 먹습니다. 물론 나도 좋아서 해주는 건 아니지요. 다만 혼자 먹기 미안하니까 그러는 거죠.
걸어서 삼분도 안 되는 거리인 사무실에 여덟시까지 가면 하루가 시작됩니다.
대개 오전에는 출장을 다닙니다. 근처 병원의 에이즈 클리닉에 가서 환자를 보거나 환자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환자를 돌보는 일들에 대해 다른 병원의 의사들과 회의도 합니다. 물론 내가 하는 건 아니고 여기로 배정받은 의사인 까미유가 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 따라다닙니다. 까미유는 스물여덟살의 오리지날 빠리지앵인데 여기 온지 여덟 달밖에 되지 않은 햇병아리 의사입니다. 사실 근처라고 해도 대부분 육,칠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 한 시간 넘게 시골길을 차로 달려서 가야 합니다. 매일 소풍을 다니는 기분이죠. 너른 들판에는 야자수 나무 아래로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있고 짚단이 쌓여있는 사이사이로 소 떼들이 돌아다닙니다.(007 언리미티드에 나오는 소 떼들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태국의 시골 집은 대개 땅에서 일미터 이상 높게 지어져 있습니다. 더운 곳이라 사방에 큼직한 창문이 있거나 문이 없는 집도 많고 대나무로 엉성하게 엮어 바람이 숭숭 통하게 지은 가건물처럼 보이는 집도 많지요. 하지만 막상 방안은 아늑하게 이불도 깔고 태국왕조 사진도 걸어놓고 하더군요.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시골 사람들은 친절합니다. 방콕의 닳고 닳은 사람들과는 다르지요.
출장을 다녀와서 점심을 먹고나면 오후에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출장을 다녀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무실에 있습니다. 까미유나 다른 현지 직원들은 다들 각자 서류정리나 문서작업, 회의 등으로 바쁘고 나에게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지요. 대개 그늘진 테라스에 앉아서 늙은 떠돌이 개를 벗 삼아 공부를 합니다. 이렇게 공부할 시간이 많을 줄 알았더라면 한국에 있을 때 좀 더 실컷 놀다 올걸... 싶더군요. 하지만 시간이 많아도 의학공부라는 것이 직접 환자를 보면서 익혀야 하는 것인지라 책을 보면 잠만 올 뿐입니다. 줄창 커피만 마셔대며 졸기도 하고, 모뎀이 연결된 컴퓨터가 비었을 때면 눈치껏 메일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은 느려터진 데다가 한글 입력도 안 되어 아쉽긴 하지만 그나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유럽어나 다른 언어를 입력하는 패치는 깔려 있는데 유독 한글은 없더군요. 케냐로 가서도 같은 상황이라면 기필코 한글입력 패치를 달아야겠습니다. 현지 직원들이 퇴근할 시간 쯤 나도 까미유나 필립을 남겨두고 먼저 집으로 옵니다. 그네들은 항상 늦게 퇴근을 하니까 내가 먼저 가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집에 오면 대충 집안 정리를 하고 시장을 보러 나가지요.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쎄븐 일레븐도 있고 한국의 시골장날을 연상케 하는 시장도 있습니다. 퇴근 무렵에는 이 곳도 제법 붐비지요. 이 곳의 주요 교통수단은 오토바이입니다. 차도 있지만 오토바이가 훨씬 많아서 길을 건너기가 힘들 정도 입니다. 마치 폭주족의 행진을 연상케 합니다. 대중교통은 인력거처럼 생긴 이륜차가 주요 수단입니다. 버스는 있긴 한 거 같은데 자주 없어서 거의 보기 힘들고 택시는 없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면 상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봅니다. 자기들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인데 말을 못하니까 의아할 수밖에 없겠지요. 태국말로 '태국말 할 줄 몰라요'라고 한 다음 겨우 익힌 숫자나 손가락을 사용하면 대충 계산이 끝납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더라면 간단한 말이라도 익혀서 올걸 하는 후회가 듭니다. 야채들은 값도 싸고 처음 보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사고 싶어도 어떻게 요리하는 건지 몰라서 대개 구경만 하지요. 주로 허브 종류나 생강처럼 향이 강한 야채들이 많습니다. 또 한국시장에서 반찬을 팔 듯 여기서도 그런 걸 파는데 아주 싸고 맛있습니다. 점심은 주로 그런 걸 먹습니다. 어쨌든 내가 사는 건 결국 오이와 양배추, 파 같이 눈에 익은 야채들과 식빵, 달걀이 전부이지요.
집에 오면 사온 것들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 후에 다시 책을 보며 다른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한국에서 가정부 노릇 하던 걸 여기까지 와서 또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요. 까미유나 필립은 요리를 하지 않습니다. 까미유는 청소도 안 하고 빨래도 사람을 부려서 씁니다. 집은 넓기만 했지 군데군데 개미군단과 도마뱀들이 기어다니는 등 폐가를 연상케 합니다. 식사는 늘 나가서 사먹는 데 그것도 매일 여덟시 쯤 되어야 저녁을 먹습니다. 지금 부엌에는 쓰다 남은 조미료들과 벌레먹은 쟈스민쌀만 잔뜩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그네들의 늦은 만찬은 근처 우아한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며 먹는데 솔직히 나로서는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입니다. 어찌나 자기들끼리 잘난 척 하며 토론을, 혹은 수다를 떨어대는지... 하다하다 안 되면 자기들끼리 프랑스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내가 째려보면 다시 영어로 바꾸구요. 아무리 이 곳 물가가 싸다지만 매일 저녁마다 고급 레스토랑을 찾아다니는 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현지인들 입장에선 결코 싸지 않고 좋은 시선으로 봐줄 순 없으니까요... 아시아의 작고 어정쩡한 나라에서 온 나는 입장이 묘합니다. 마치 제국주의의 시녀가 된 것 같은 고약한 기분이 들거든요. 그렇게 배가 터지도록 먹고 마신 다음에 집에 오면 밤 열시나 열한 시... 텔레비전도 없고 인터넷도 안 되니 결국은 잠만 자게 되는데 엠에스에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전부 올챙이처럼 배만 볼록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사실 방콕에서 그네들을 만났을 때 받은 첫인상이 전부 배가 나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실제 나이보다 젊고 개방적이며 얼짱 축에 속하는 남자들도 있긴 하지만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면 실망 뿐이지요. 오늘은 삼십분 가까이 걸어 번화가로 가서 줄넘기 줄을 샀습니다. 나도 그네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부지런을 떠는 수밖에 없습니다.
잠을 자면 악몽의 연속입니다. 한국을 도망치듯 나온 탓에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은 탓도 있고 말라리아 예방약 부작용 때문인 듯도 한데 매일 밤마다 괴기 소설 한 권씩 읽는 기분이지요. 어젯밤엔 세 편의 악몽이 연속되는 데 너무 놀라서 자다가 깨어 한국에 분명 무슨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정 못 견디면 말라리아 예방약은 포기해야지요. 모기에 안 물리면 되니까...
이상... 나는 거창한 구호안에 교묘하게 가려진 국제구호단체나 엔지오의 실상을 톡톡히 체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