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98년 친구사이에서 진행된 세미나 중 '세계 동성애 역사'의 2장 발췌본입니다. 이미 5년이나 흘렀고 이 글에 대한 필자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수정 없이 이곳에 계속 연재할 생각입니다.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진화
과연 동물들에게도 동성애가 존재할까? 액면 그대로 관찰하자면 분명 동물들도 동성간 성 행위를 한다.
1997년 미국 캐럴대 앤 퍼킨스 교수(동물행동학)는 동성애는 즐기되 이성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 수컷 양이 전체의 10%에 이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수컷 타조의 2%는 바람둥이 암컷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안 자기들끼리 커플을 맺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조류(닭, 갈매기, 황새…), 설치류(쥐, 토끼…), 고등 영장류(침팬지, 원숭이, 우랑우탄…) 등에서도 동성애적 행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짐에 따라 동물학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특히 영장류들에게서 보이는 동성애적 성 행위의 양상은 우리에게 많은 곤란과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조류나 설치류의 동성애적 행위는 대개 상황적 조건에 기인한다. 알을 부화시키다 수컷이 도망간 탓에 다른 암컷과 짝을 짓는 경우(갈매기, 황새), 수컷끼리만 모아놓은 폐쇄 실험실 안에서 빈번히 동성과 교미 흉내를 내는 경우(쥐, 토끼)처럼 조류 및 설치류에서 보이는 동성애적 관계는 짝을 구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때문에 빚어지게 된다. 만일 구속적인 상황이 없어지게 되고 이성의 짝을 찾는 조건이 수월해지면 타조의 경우처럼 그들 역시 즉시 평범한 이성애적 동물들로 귀환될 것이다.
영장류의 경우는 이보다 한층 복잡한 면모를 보인다. 이따금 젊은 암컷 우랑우탄은 우두머리 암컷의 성기를 애무하거나 자신의 성기로 마찰시켜 성적 흥분을 이끌어낸다. 또 피그미 침팬지의 젊은 수컷은 연장자 수컷이 뒤로 다가와 교미 흉내를 내도 가만히 굴복하는 자세를 취한 채 일이 끝나길 기다리곤 한다.
그리고 최근 동물학자들을 아연케했던, 인간 유전자와 98%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보노보 원숭이는 암컷 수컷 가릴 것 없이 동성애적 행위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노보 원숭이는 동성끼리 인류가 몇 천년 동안이나 금기시했던 오럴 섹스마저 서슴치 않는다.
이러한 관찰 결과는 우리의 통념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동물들의 성은 종種 유지 본능 속에 결박되어 있다는 통념. 아니면, 동물들의 본능 속에도 동성애적 욕망의 자리가 할당되어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그리 여의치 않다.
동성애적 행위를 벌이는 우랑우탄이나 피그미 침팬지의 경우, 대개는 그것이 성적 의미보다는 '권위와 복종'의 의미가 더 크다. 모계제로 구성되어 있는 우랑우탄 사회에선 젊은 암컷 우랑우탄이 우두머리 격의 암컷 우랑우탄의 성기를 만지거나 애무함으로써 존경의 표시를 드러내고, 강력한 가부장제를 보이고 있는 피그미 침팬지 사회에선 연장자에 대한 복종의 뜻으로써 젊은 수컷의 엉덩이가 예의 바르게 낮춰지는 것이다.
보노보 경우에도 그들의 동성애적 성 행위는 '갈등 해소'가 주된 목적이다. 먹을 것이 적다거나 다른 원숭이의 침략이 있을 때 그들은 갑자기 몰아닥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옆에 있는 동성과 관계를 맺곤 한다. 지금 보노보 원숭이는 절멸 위기에 놓여 있다. 갈등 해소를 위해 섹스를 하다 적들에게 잡혀 먹혀 그 숫자가 계속 줄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권위에 굴복한 젊은 우랑우탄 암컷과 피그미 침팬지 수컷이 성적 흥분을 느꼈는지 어땠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권위와 복종' 관계를 빌려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것들은 '동물들의 성 본능과 행위가 종족 유지에 한정된다'고 하는 기존의 자연에 관한 가설을 뒤흔들어놓기에 충분하다. 특히나 보노보 원숭이의 '갈등 해소'를 위한 동성간 성 행위는, 다른 영장류들이 위계 관계에서 파생되는 장애와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성적 행위를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영장류에서 볼 수 있는 동성애적 표현의 가장 세련화되고 평화적인 방식일 것이다.
성적 만족과 갈등 해소는 비교적 명확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생식과 성 행위가 분리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동성애의 가능적 조건은 생식으로부터의 성 행위 이탈이다. 이탈이 가능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또, 생식 본능에 결박되어 있다고 믿어 왔던 동물들의 성이 어떻게 그로부터 이탈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인간이 양성성兩性性을 지니고 있다거나 이성애를 포함한 다양한 성적 욕망의 저장소로서의 무의식이 존재한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양성성이나 무의식은 인간들이 자신의 행위와 욕망의 관계를 설명하는 어려움 때문에 부득이하게 직조해낸 픽션에 불과하다.
사실 양성성은 인간을 포함한 고등 동물들의 성이 여러가지 진화적 조건으로 생식본능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형성되는 '다양한 성행위들의 가능성'이다. 우리는 자연적 진화의 섬세한 분화와 다양성 속에서 동성애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다. 근대 생물학주의와 유전공학의 결정적인 취약점은 자연의 진화상태가 이미 종착점에 도달했고, 현재의 유전자 지도로 모든 생명계의 진화 과정을 해독해낼 수 있다고 보는 귀납적 오류를 범한 점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까지 영장류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성 행위를 생식으로부터 이탈시켰는지 알지 못한다. 젊은 수컷 피그미 침팬지가 복종의 뜻으로 연장자에게 엉덩이를 들이미는 순간에 떠올릴 느낌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 젊은 수컷의 제스추어는 우리에게 값진 의미를 선사한다.
영장류의 고도 지능, 다른 동물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견고한 협력 관계, 긴 수유授乳 기간, 젊은 수컷들의 추방을 통한 절묘한 인구 조절…… 이 모든 과정이 권위에 대한 복종을 표현하는 데에 성적 행위를 끌어오도록 조직화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동성애적 욕망과 성 행위도 인간의 성이 생식본능으로 환원되지 않는 상황에서 빚어진 진화적 결과물인 셈이다. 아마도 영장류에게서 막 구성되기 시작한 생식과 성의 분리, 그리고 이로 인해서 가능해진 동성애적 성 행위는 영장류 사회의 위계 질서 안에서, 강요↔순종의 맥락 안에서 펼쳐졌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영장류로부터 진화되어온 인류 초기의 몇몇 부족 사회에서 권위와 동성애적 성 관계가 보다 구체적인 윤곽을 띠고 진행되었기 때문에 한층 현실적인 의미를 지닌다.
1998.9 이송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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