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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호][칼럼] 남들 사이의 터울 #11 : 부활의 슬픔
2026-04-03 오후 16:12:56
45
기간 3월 

 

 

[칼럼] 남들 사이의 터울 #11

: 부활의 슬픔

 

 

 

성소수자들은 흔히 무당이나 배우 할 팔자라는 소리를 듣는다. 살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 가면을 바꿔쓰는 일이 잦아서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 다른 가면을 쓰면서 살기는 하지만, 성소수자는 그 가면의 정도와 깊이가 남다르다. 커밍아웃을 안한 은둔이면 내 성정체성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 늘상 연기를 하는 셈이고, 커밍아웃을 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거기에 걸맞는 프라이드를 연기할 역할이 주어진다. 그렇게 가면을 바꾸며 사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재밌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피곤한 일일 수 있다. 

 

물론 연기가 사람의 인생에서 바람직한 맥락에 놓였을 경우,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바람직한 맥락에 놓였을 때의 이야기다. 성소수자의 삶에서 연기란 대체로 내가 원해서 선택한 배역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내가 동해서 하는 연기와 남이 강제로 시킨 연기가 같을 수는 없다. 그렇게 강제로 시킨 연기는 그걸 매번 수행하는 사람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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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에게 주로 강제되는 연기를 말하기 전에, 먼저 TV나 영화나 유튜브 예능에서 쉽게 대하는 직업적 연기의 세계에 대해 알아볼까 한다. 각 대학 연극영화과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이, 연기란 배우 개인의 매력이나 어사무사한 영감에 기댄 요행이 아니라, 체계적인 배우 육성법과 연기 지도법을 거쳐 수행되는 예술 활동이다. 

 

먼저 직업 세계의 연기란 누구나 겪는 삶과는 다르게, 작가의 대본과 연출자의 지침이 첨예하게 교차하는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무대 위 배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마치 그 사람이 겪는 삶처럼 해내야 하는데,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삶을 사는 것과 작가·연출자가 만든 배역을 사는 것이 같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사람이 살면서 으레 숨쉬듯 수행하는 자연스러운 말과 행동을, 배우는 마치 그것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새로 익히고 적응하게 된다. 

 

역할에 몰입해 그것을 내 삶처럼 연기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몰입과 감정이입을 위한 다양한 기술들을 익힌다. 제시된 상황을 살아내기 위해 만약이라는 허구의 가정이 마치 내 것인 양 몸을 던지는 일이 그 중 일부다. 여기서 그 설정된 상황에 보다 손쉽게 감정 이입하고, 한 사람의 자연적 상태를 모사한 배역을 내 것처럼 수행하기 위해, 배우는 역설적으로 감정 이입의 단서를 어떤 뿌리나 줄기가 아니라 지나가는 아주 사소한 편린과 잎새에 의지하여, 그것에 착안한 반응과 표현이 가능하도록 스스로를 연마한다. 즉 처음부터 어떤 믿을 만한 감정 이입의 대상에 온전히 접신하는 방식이 아니라, 배우는 아주 사소한 가짜 설정과 나 사이 관계의 진실성을 스스로 믿고, 그것을 실마리 삼아 배역을 풀어나간다. 

 

이 원리를 통괄하는 말이 바로 의식을 통해 무의식·잠재의식에 도달한다는 연기 격언이다. 배우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배역의 내면과 무의식에 도달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것에 도달하는 통로를 처음부터 무의식으로 설정하지 않고 의식적인 것, 만져지는 것에서부터 잡아나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의식적인 것보다 의식적인 것에 배우가 접근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감정을 구현하기 위해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살면서 내가 겪어온 어떤 감정의 구체적 경험과 조건, 혹은 어떤 지엽적인 신체 행동을 떠올리는 것이 그에 해당된다. 이런 의식적이고 물질적인 실마리와 방법론이 있기에, 연기 기술은 무의식의 모호한 영역에서 벗어나 배우·연출가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자각해 연마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지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거쳐 배우가 도달하길 바라는 것은 바로 그 배역이 하나의 살아있는 인간의 삶으로 배우 개인에게 체현되는 경지다. 거기에 다다르는 것은 쉽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그 경지에 이르러야 배우는 자기를 억지로 짜내지 않고 역할에 걸맞는 다양한 연기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수월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유능한 영화배우들이 자기의 배역을 매 테이크마다 각기 다르게 연기하면서 그 모든 테이크의 연기가 배역과 작품에 정합적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배우 스스로 맡은 배역을 어떤 유기적인 인간의 삶으로 상상하고 구현했을 때, 그는 마치 그 배역의 인간이 했을 법한 여러 자연적인 언행들을 대신할 수 있게 된다. 한 사람의 자연적 상태를 무대 위에서 새로 구현하는 일에 필요한 준비가 이러하다. 

 

물론 그런 몰입에 다다르는 일은 쉽지 않고, 무대 위 어떤 우발적인 계기로 쉽사리 깨지기도 한다. 거기서 배역에 대한 감정 이입으로 되돌아오는 계기를, 그와 마찬가지로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기대어 그로부터 몸과 마음을 열어버릇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게 포착한 아주 작은 실마리가 때로는 배우로 하여금 배역 전체의 몰입으로 되돌아오게끔 만든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한 사람이 순간의 깨달음으로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바꾸는 경험과 비슷하다. 사람의 인생에 어떤 단서가 되는 감정과 경험을 느낄 때, 그 순간 내 몸과 마음을 회돌던 유기적 반응을 기억해내는 식이다. 그것은 배역 속 인간의 행동과 감정이 마치 실제 사람처럼 유기적일 것임을 믿고, 배우 스스로 그 배역이 진짜여서가 아니라 배역과 나 사이 관계를 진짜라고 믿기에 가능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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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배역과 나 사이의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배우 스스로 배역과 나를 엄정히 구분한다는 뜻과 연결된다. 배우와 배역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어떤 작품이 잘된 후에 그 배역의 매력을 배우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사석에서 휘두르고 다니지 않아야 한다는 스캔들의 범주를 뛰어넘는다. 배우가 작가의 대본과 연출자의 지침을 거쳐 무대 위 한정된 공간에서 어떤 배역의 자연을 연기한다는 것은, 배우 스스로 배역과 자기 자아를 혼동해서는 달성할 수 없을 무게의 과업이다. 가령 극중 하나의 상황 속 배역은 그 다음 씬에서 누굴 만나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는 상태지만, 대본을 다 읽은 배우는 극중 배역이 이후에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 될지를 미리 알고 있다. 따라서 배우는 그 상황 속 배역이 마치 이후의 일을 아는 것처럼 연기해서는 곤란하고, 극 전체를 통괄하는 가운데 그 씬 그 상황에 적합한 배역을 따로 연기해야만 하며, 그 상황 속 배역의 모름을 연기할 때 그것을 내가 알고 있는 극 전체의 흐름과 연결지을 의무가 주어진다.

 

이 말은 곧 배우 스스로 배역에 대한 몰입만큼이나 그 배역을 내 감정으로 연기한다는 감각, 내가 내 배역을 건사한다는 감각이 중요함을 환기한다. 배역을 인간의 자연적 삶으로 구현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배우는 그 배역과 나 사이의 거리를 반드시 확보해야만 한다. 연기는 어디까지나 배역 스스로가 아니라 배우의 몸과 감정으로 하는 것이고, 배우가 살면서 수행하게 될 숱한 배역들은 모두 내 경험과 감정의 창고를 통해 내 손으로 조합한 결과물이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 마치 7개의 온음계와 12개의 반음계로 수많은 선율과 리듬을 만드는 것처럼, 작품마다 달라지는 배역의 모습은 모두 배우 개인의 삶 속에서 느낀 파편적 감응과 정서, 행동의 수천 가지 조합으로 구성된다. 나아가 어떤 배역의 감정이 내 안의 무엇으로부터 구성되었는지를 알고 있으면, 배우는 그것을 무대 위에서 적절히 통제할 수도 있게 된다. 

 

삶 가운데의 배우와 무대 위의 배역을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일은,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배우가 연기할 때 자기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거나, 나 스스로 나의 매력을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판매한다는 생각을 배우 스스로 가져서는 곤란하다. 무대 위에서 빛나야 할 것은 내 매력이 아니라 나를 관통해 구현되는 배역의 무대적 매력이고, 그걸 인식했을 때 배우도 비로소 자신이 맡은 배역을 관객에 끌려다니지 않고 운용해나갈 수 있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몰입을 위해 배우 스스로 주의를 끌 대상을, 객석이 아닌 무대 위의 어떤 요소로 잡거나 관객 그 자체가 아닌 관객과 관객 사이 공간으로 잡는 팁이 그래서 중요하다. 무대 위 배우가 몰입하고 관객과 교류할 대상은 배우의 몸을 통해 구현되는 배역이지 배우 자체가 아니고, 관객과 농밀한 정서적 관계를 맺는 주체 또한 배역이지 배우가 아니다. 

 

한 학과와 학제에서 가르치는 연기의 기법을 짧은 글로 정리해보았는데, 이렇게 손쉽게 말로 축약한 각각의 기술들은 굽이굽이마다 배우 자신의 막대한 신체적·정서적 훈련을 필요로 한다. 무의식과 감정을 구현하는 연기 활동의 핵심에는 이처럼 명징한 지성적·육체적 수련의 몫이 개재한다. 직업적 연기 활동이 배우 스스로 주도권을 잃고 매번 각각의 배역에 접신하거나 빙의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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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직업적 연기의 면모와 비교해, 성소수자의 일상에서 강제되는 연기의 결은 그것과 어떻게 같거나 다를까.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인지하였을 때부터 이성애 사회의 역할을 몸소 연기한다. 많은 성소수자들은 자기 성정체성을 직감한 순간부터 그것이 내 주위의 세상과 불화한다는 걸 깨닫고, 바깥 세상이 자연이라 여기는 역할에 어떻게든 몸 맞추려 노력한다. 그것이 훗날 내가 정체화한 성정체성과 맞지 않아서 견딜 수 없다는 감각은, 그 견딜 수 없는 연기를 나도 모르게 한참을 수행하고 난 이후에 찾아온다. 

 

이 상황은 성소수자 개인에게 심각한 신체적·정서적 부하로 다가온다. 앞서 보았듯 한 사람의 배역을 자기 역할로 받아들여 그것을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일은, 여느 베테랑 배우들도 가끔씩은 그에 실패할 만큼 실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어떤 배역을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이미 그렇게 정해놓았기에 연기하는 일은 막대한 품이 든다. 성소수자 스스로 종종 존재하는 것만으로 힘들어지는 까닭이 이러하다.

 

결정적으로 성소수자의 연기는 무대 위에서의 연기가 아니다. 이성애 사회에 동화되려는 성소수자의 연기는 어느 대본과 작품과 무대의 연기가 아니라 그것 그대로가 그 사람의 삶이다. 이는 배우 개인과 배역을 분리하는 연기 수련법의 전제를 흔드는 문제 상황이다. 벽장을 벗어나 이성애자인 척하는 성소수자의 연기는 정해진 무대가 없고, 정해진 관객도 없다. 그것이 설령 성공하더라도 그 연기에는 조명도, 갈채도, 보수도, 보람도, 예술적 고양도 없다. 그저 그것을 해내고 돌아온 벽장 안에서의 초라한 안도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그 끝없는 연기를 바라보는 관객이 누구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고, 그것은 쉽사리 내 머릿속에서 83억 인구 전체로 불어난다. 작품을 보러 짐짓 호의적인 마음으로 객석에 앉은 관객과 다르게, 이성애자를 연기하는 성소수자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을 전혀 알 수 없다. 정해진 무대와 관객이 없기에, 성소수자의 일상적 연기는 직업적 연기와는 다르게 알 수도 없는 관객의 눈에 들고 싶은 유혹에 좀더 쉽게 빠져든다. 

 

이 모든 사태는 성소수자에게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의 자아가 허락되지 않기에 발생한다. 배역의 처음과 끝을 가늠하고 연기할 배우 자신의 몫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성소수자의 일상적 연기에는 그런 배우로서 주체성이 체계적으로 탈각돼 있다. 앞서 보았듯 배우가 수십 수백명의 배역을 연기할 수 있는 이유는, 내 안에서 내가 겪은 체험과 감정의 재료들을 스스로 엮고 구성해내는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의 나와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배우는 그 다르게 살 수 있는 원리적 가능성에 착안해 배역을 풍부하게 구현하지만, 다르게 사는 가능성이 이미 내가 아닌 남에게 쥐어진 채 성소수자에게 강제되는 연기는 그와 같은 주체적인 역할 창조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렇게 배역들의 중심을 잡을 배우의 자아가 사라질 때, 그 모든 배역의 편린들은 고스란히 배우 자신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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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기한 모든 배역이 내 자아의 중재 없이 모두 내 삶으로 육박해오는 상황은 성소수자의 실존에 다음과 같은 난점을 남긴다. 

 

배우의 자아가 없이 수행되는 연기는, 내 이름이 걸린 배역들 가운데 성소수자 스스로 자기를 제대로 편들어보는 경험을 빼앗아 간다. 가령 모든 것이 대체로 객관적으로 보이고, 욕심없이 사는 것이 어렵지 않고,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거리두는 것이 의외로 쉬운 성소수자가 있다면, 그것은 수도자의 미덕을 가져서이기 이전에 자기를 진정으로 편들어본 적이 적어서일 가능성이 높다. 그 모든 게 나이고 나여야 함에도, 자기가 연기하는 역할을 배우가 나서서 구성하고 중재하지 않을 때, 파편으로 휘날리는 각각의 역할들은 성소수자 개인에게 그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된다. 물론 그런 상태가 누적되는 것은 배우 개인에게 엄청난 부담이고, 그렇기에 무언가 견딜 수 없다고 느끼는 성소수자는 많은 경우 거기에서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시작한다. 

 

하여 어떤 성소수자는 어느 날 이제까지 못 챙겼던 자신을 확실히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복받친다. 이는 주로 커밍아웃해 활동하는 성소수자에게 즐겨 나타난다. 성소수자가 자신에 대한 애착을 어렵사리 가지고 난 다음에는, 여느 사람들이 그랬던 대로 자기에 대한 무분별한 감정 이입의 함정을 다시금 객관화해야 할 과제가 주어진다. 팔불출이란 말이 있듯이 자기에 대한 애착은 모름지기 남 앞에 무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남과 더부는 삶 속에 적절히 조정되어야 한다. 사람의 세상살이는 메타버스가 아니기 때문에, 이제까지 나를 안 챙기는 역할의 유니버스에 있다가 이제부터는 나를 챙기는 역할의 유니버스로 갈아타는 식으로 자아를 경영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배우의 자아 없이 수행되는 성소수자의 연기란 이런 식으로 흐르기 쉽고, 평소 자기를 편들어보지 않은 성소수자는 정작 자신을 편들 때도 분열적으로 편든다. 

 

모든 역할의 창조가 그렇듯이,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한다고만 생각했던 그 모든 연기에는 이미 배우 자신의 마땅한 몫이 거기에 들어가있다. 그것을 배우 개인이 인지하지 못하면, 아까와 같이 아예 내 편을 안 들었다가 아예 확 내 편만 드는 식의 양가적인 태도가 등장한다. 이제껏 남 편을 들었으니 이제 내 편을 좀 들어도 그 남들이 이해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스스로 메타버스 건너뛰듯이 자아를 경영해왔다는 고백임과 동시에, 자신이 여태 무슨 역할의 연기를 해왔고 그것이 남과 나에게 무슨 의미였는지에 무지했다는 자백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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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문제도 있다. 성소수자들은 일반들에 비해 어른이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는 말이 있다. 물론 그 어른됨의 기준은 이성애자의 생애사에 맞춘 것이다. 이성애자들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생애 주기는 사람들에게 친숙하고, 성소수자의 삶은 대체로 거기에 들어맞지 않는다. 아이를 안 낳으면 어른이 안된다는 격언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어른이 못된 채로 살아가는 삶도 그리 나쁠 것은 없다. 남들은 가정 꾸리는데 아직도 눈앞의 멋진 남자와 섹스하고 연애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스스로가 못내 비참한 느낌이 들 때는 있겠지만 말이다. 문제는 그 말의 일리와 더불어 성소수자들이 일반들에 비해 조숙하고 조로(早老)한 부분도 분명 있다는 것이다. 어떤 성소수자들은 상대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를 말하기를 그치지 않고, 남에게 정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정을 베푸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내면이 조숙하고 단단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오히려 너무 일찍 그런 체념을 해버린,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내면의 일부를 걱정할 판이다. 이런 양면의 면모는 어째서 생겨나는 것일까. 

 

나이가 들었는데 아직도 아이 신세를 못 벗어난 것 같은 느낌과, 한 사람 몫의 삶을 이미 다 살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동시에 드는 것은, 앞서 말한 배우의 자아 없이 수행되는 연기의 요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 사람이 여러 배역의 연기를 강요받고 그것이 고스란히 내 삶으로 치고 들어왔을 때, 그 각각의 레이어에 있는 배역의 성숙도는 자연히 한 사람 몫의 성숙도에 미달된다. 알 수도 없는 눈앞의 타인을 의식한 복수의 면피는 진짜 몰입해서 공을 들인 한 배역의 연기와 다르다. 게다가 그 각각의 배역은 모두 각자의 타임라인을 갖고, 거기에는 크든 작든 개인의 노고가 들어간다. 그렇게 어떻게든 애써서 각 배역으로 살아온 경험의 절대시간을 합치면, 한 사람의 수명을 일찌감치 뛰어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의 수명이 80년이라고 했을 때, 많은 역할을 가장하며 살아온 약관의 성소수자는 어느날 문득 내가 수행한 배역의 시간이 도합 200년이 넘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 그 사람은 남들이 한번 사는 인생을 이미 다 살아버린 듯한 기분을 겪는다. 내가 연기하는 배역이 배역이 아니라 그 모두가 내 삶이 되었을 때 생기는 치명적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이 내 역할들의 총합에 해당하는 수백년의 시간을, 평균 수명의 몇 곱절 인생을 몸소 사는 일은 당연히 태산처럼 버겁다. 이렇게 스스로 건사할 새 없이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연기의 레이어가 또 한번 얹히는 계기가 있다. 바로 동료 성소수자의 자살이다. 한 성소수자가 맥없이 죽으면, 그 사람 곁의 성소수자는 내 존재 중 일부도 그이들을 따라 매번 죽었다 새로 태어나는 걸 느낀다. 그건 어느 속류 기독교도들이 말하는 부활의 은총일지 몰라도, 다시 태어나 살아가는 삶과 이전의 삶이 내 안에서 얽히고 설키는 일을 어떻게 풀어나갈 지는 그리스도도 쉽게 해결할 수 없을 삶의 질곡이다. 다른 배역이 아닌 내 배역의 삶이기 때문에, 내가 겪은 모든 삶과 죽음은 고스란히 내 안에 지층으로 남고, 그것들은 내가 공들여 잊든지 애써 모른척하든지 거기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들이 한 몸으로 살아갈 나에게 어떤 나이테와 무게를 안기는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고, 그 무게를 삶 가운데 녹이는 법은 세월 가운데 어렵게 체득된다.

 

사람들은 종종 부활의 기쁨만을 말할 뿐, 그렇게 부활하여 살아갈 앞으로의 삶이 어떨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성소수자들에겐 이미 내가 원하지 않은 채 살아온 겹삶의 무게가 있고, 내 일상은 이미 내가 원하지 않은 채 서게 된 연극 무대에 가까우며, 그 무대와 객석의 너비는 때로 세상 끝까지 뻗어나간다. 거기서 내 뜻대로 고른 것이 아닌 채 내게 주어진 모든 배역을 각각 한 사람의 일관된 자연인 양 구현해내는 일은 힘들고 고되다. 그 고됨 위에 또다른 고됨이 난데없이 얹힐 때, 사람은 때로 정녕 죽고 싶어진다. 아무리 살아도 어른과 같은 성숙에 이르지 못할 바에는, 살면 살수록 내 평균 수명의 깜냥을 이미 넘은 노역이 뒤따를 바에는, 그 모든 걸 이제는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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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로 살면서 여러 번 마주하였을, 내가 수행할 배역이 매번 다시 태어나는 삶이 무럭무럭 부풀어오르는 광경이란, 사람이면 당연히 두렵고 버거워해 마땅한 것이다. 사람들은 무거운 걸 가볍게만 말하면 그것이 가벼워질 것이라 착각한다. 나라고 내 마음을 아는 게 아닌 것처럼, 무거운 건 때로 무겁다고 말해야 그 무게가 비로소 나에게 제 값 제 이름으로 와닿는다. 목회자가 아무리 영광스런 신의 은총을 말하며 부활 다음의 일을 신에게 돌린다 한들, 한 사람의 몸으로 여러 겹 여러 사람의 삶을 다시 겪는 일은 기본적으로 힘든 일이다. 더구나 그것을 중재할 자아가 좀처럼 허락되지 않은 채, 싫어도 연기해야 했을 내 배역이 모조리 내 삶으로 다가올 상황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부활이란 영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 슬프고 화나고 진절머리나는 일이다. 한 사람이 왜 한 사람 바깥의 몫을 짐져야만 하는지 유독 괴로운 것은 무리가 아니다. 동료의 삶과 죽음을 견디고 새로 태어나 다시금 웃으며 살아오기까지, 그 겹삶의 무게가 무엇인지에 대해 성소수자들은 보통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 채 눈앞의 인생을 살고 거듭 주어진 연기를 한다. 어느 날 스스로 너무 많은 걸 보고 너무 많은 걸 겪은 탓에, 마치 이미 헌 것이 되고 폐물이 되어 하나뿐인 삶과 몸을 망친 것 같은 공포가 밀어닥친다면, 그것은 높은 확률로 내가 살아오고 연기해온 인생이 나에게 얼마나 막심한 부담이었는지를 나를 포함한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까닭에 그러하다. 

 

실은 사회적 소수자가 아니라도, 한 사람의 삶은 그 정도를 달리할 뿐 한 사람 몫의 비중을 반드시 몇 곱절은 넘기게 되어있다. 누구나 자라면서 나 아닌 누군가를 연기하듯이, 한 사랑이 지고 다음 사랑을 꿈꾸는 일, 한 지인을 여의고 또다른 지인을 만드는 일, 죽고 싶음을 지나쳐 어제와 다른 살고 싶음을 만나는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경험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매번 다시 태어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그 삶과 이제까지의 삶을 엮을 당연한 의무가 주어진다. 사람의 삶이란 본래 얼마간 그러하다. 서사 위에 서사가 겹치고, 죽음 위에 죽음이 겹치고, 사랑 위에 사랑이 겹친다. 그 철옹성같은 나이테가 의외의 한 순간 한 가지 사건으로 꿰뚫릴 때, 배우들이 사소한 단서로 배역 전체의 삶을 구현해내는 것처럼, 우리는 그 속에 도사린 말랑말랑한 것이 남아있음을 알아채고는 그에 새삼 감동하고 안도한다. 

 

다만 그 범속함에 성소수자가 새삼 기댈 수 있으려면, 내 연기와 내 서사의 편집권을 누가 뭐래도 내가 쥐고 있어야 한다. 퀴어 삶의 전문가는 외주로 의탁한 어느 전문가이기 이전에 바로 퀴어 자신이다. 남들이 찬탄하는 부활 가운데 내심 새로 부활해 살아갈 내 배역의 남은 몫을 남몰래 걱정하곤 하였던, 빈소를 차리지 않은 지인의 죽음 앞에 이런 걱정을 대체 나 말고 누가 할까 막막하여 차마 눈물도 나오지 않던, 그 순간에도 내 의사와 상관없이 새로 태어난 내 배역의 머리맡을 쓰다듬으며 한숨짓던 그때의 퀴어 자신 말이다. 

 

 

* 이 글을 쓰는 데 다음의 책과 글, 영상을 참고했다.

Didier Eribon, La société comme verdict: Classes, identités, trajectoires, Fayard, 2013.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기선 옮김, 『브레히트, 연극에 대한 글들』, 지만지드라마, 2020[1967]. 
제인 갤럽, 김미연 옮김,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 섹슈얼리티, 장애, 나이 듦의 교차성』, 현실문화, 2023[2019].
Eve Kosofsky Sedgwick, Epistemology of the Close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24[1990].
K.S.스타니슬랍스키, 박상하·윤현숙 옮김, 『자신에 대한 배우의 작업 I : 체험의 창조적 과정을 통한 자신에 대한 작업』, 아카넷, 2024[1954].
K.S.스타니슬랍스키, 박상하·윤현숙 옮김, 『자신에 대한 배우의 작업 II : 구현의 창조적 과정을 통한 자신에 대한 작업』, 아카넷, 2024[1954].
K.S.스타니슬랍스키, 박상하·윤현숙 옮김, 『역할에 대한 배우의 작업 : 구현의 창조적 과정을 통한 자신에 대한 작업』, 아카넷, 2025[1957].
K.S.스타니슬랍스키, 박상하·윤현숙 옮김, 『나의 예술 인생』, 아카넷, 2025[1954].

터울, 「남들 사이의 터울 #7 : 섹스할 때는 왠지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친구사이 소식지』 167, 2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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