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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호][칼럼] 딱, 1인분만 하고 싶어 #4 : 개똥 밭이 내 밭이라면
2024-10-04 오후 15: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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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9월 

 

 

[칼럼]

딱, 1인분만 하고 싶어 #4

: 개똥 밭이 내 밭이라면

 

 

 

 

# 수십 개의 원서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내가 꿈꿨던 곳에 뛰어들어 승부를 보겠다는 다짐과 함께 국회 의원실에 보좌진 원서를 넣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지역 유지 혹은 성공한 부모의 자식도 아니었지만, 보좌진 업무와 관련된 책도 여러 권 읽고 건너 건너 조금이라도 국회와 관련이 있다는 사람들의 조언을 받으며 원서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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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국회 첫 출근 날, 정문에서>

 

 

국회 홈페이지 내 의원실 채용 게시판을 보며, 나와 무언가 조금이라도 겹친다는 생각이 든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원서를 넣었다. 가족이며, 친구들이며, 연구실이며 온갖 곳에서 철없게 커밍아웃하고 살아온 그간의 삶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한 의구심도 들었지만 30대 중반이라는 나이 때문이었을까? 남들은 20대 중후반에 의원실 인턴부터 시작한다는데 지금이라도 빨리 국회 의원실에 들어가 업무를 익혀야겠다는 생각에 정당을 가릴 처지도 급수를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 잠깐의 환상

 

 

그렇게 원서를 쓰기 시작한 지 두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원서를 넣은 수십 개의 의원실 중 마치 이곳만이 나의 운명인 양 국민의힘 의원실에서만 하나둘 면접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결국 그렇게 국민의힘 모 의원실 정책 보좌진으로 채용되었다. 국회 내 실무도 깜깜한 와중에 의원의 정책까지 담당해야 했기에 매일 밤을 국회에서 지새웠다. 바로 민주당 의원실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웠다. 축사, 보도자료, 법안 작성, 필리버스터, 의원실 행사, 국정감사와 예산 질의서, 의정 보고회 등 상상만 해오던 국회의원 보좌진의 ‘일’이라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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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어느 날, 국민의힘 원내대책회의 풍경>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게 극히 일부분일 줄이야. 물론 예상이야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내 개인적인, 또 매우 특수한 사례일 수도 있겠지만 국회의원 의원실에 채용된 보좌진 9명은 국회의원과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혈연, 지연, 학연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국회 내 상임위 질의서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관계자들까지. “충성(혹은 상명하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런 연도 없는 주제에 이곳에 들어온 것부터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다는 잔소리마저 들려왔다.

 
 
 

 

# 고고한 학

 

 

수많은 신세계 상품권은 도대체 왜 필요하고 어디로 전달되는 것인지, 질의서부터 PPT까지 기승전결 완벽하게 작성된 국정감사 질의서는 왜 기업 협력관을 통해 의원실에 전달되는 것인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왜 새벽 4시에 전화를 걸어와서 대뜸 내일 아침 우리 의원의 질의 내용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떠오르는 수많은 왜 속에서 괜히 이 일로 인해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닐까? 진짜 겁대가리를 상실한 사람이 누군인지 분간이 가질 않아 무섭기도 했다. 어디에다 함부로 물어볼 수도 없다는 생각에 친한 바이(자칭 레즈비언) 변호사 친구에게 연락해 정말 문제가 없는 것인지 짧게나마 상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래, 이 정도쯤이야. 여기에서 성장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그 알량한 다짐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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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에서 꼬박 밤을 샌 어느 날 새벽 6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물론 다짐만으로 버티기 어려운 것들도 존재했다. 국회 내에는 같은 지역 출신 모임부터 대학 동문 모임, 같은 나이 모임, 해병대 혹은 ROTC 모임 등 업무의 효율성 혹은 치열한 수싸움을 위해 1) 현직 보좌진과 2) 이전에 보좌진을 경험하고 현재 공공 및 민간에서 국회 관련 협력(혹은 로비?)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 간의 다양한 사적 모임들이 존재했다. 그 수많은 모임에서 이뤄지는 밤의 업무에는 알코올과 성(性)이 빠지지 않았다(물론 밤에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이성애자인 양 연기하는 거짓말은 둘째치고, 내가 뭐라고 억지웃음을 팔며 이 비싼 접대를 받고 있는지…. 바람쐬러 나온 척 이 접대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묻는 나에게 보좌관은 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묻냐는 표정으로 담뱃재를 털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고작 석박사 했다고 고고한 학인 양 살고 싶은 거면 진지하게 연구기관 다시 생각해 봐”

 
 
 

 

# 검증받지 못한 사람

 

 

“아들아, 지금 네 나이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남들이 다 가고 싶은 윤택한 밭이 아니다. 지금 널 원하는 곳은 남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 개똥 밭이라는 걸 명심해라. 근데 그 개똥 밭이 너한테는 최고의 밭이라는 걸, 그리고 그 밭을 발판으로 네가 성장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렴.” 아무런 연도 없던 내가 국회에 도전하겠다고, 그곳에서 성장하겠다고 말씀드릴 때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다. 물론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나라는 사람이 의원실 인력난인 요즘 잠깐 써먹고 버리기 좋은 그 정도의 가치라는 걸. 얼마나 많은 욕망들이 살아 숨 쉬는 곳이던가. 나 아니어도 내 자리에 오고 싶은 사람이 널린 곳이라는 걸, 인턴 채용 공고 하나만 올려도 적게는 수십 개, 많게는 수백 개의 원서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이곳 국회의원 의원실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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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비상대책위원장 수락 연설 중인 한동훈>

 

 

더군다나 내 사생활을 스스로 들춰가며 너와 내가 친하다는 것을,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을, 네가 필요로 할 때 나는 언제나 너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 없는 인연도 있는 것처럼 어떻게든 쥐어짜는 곳에서, 지난 세월의 인연을 다 숨기고 경쟁하기도 마냥 쉽지만은 않더라. 물론 게이로 커밍하고 살아온 10년 간의 일생이 보좌진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는데 방해가 될 거라고, 혹여나 내가 게이인 것이 소문이 나 스리슬쩍 잘리진 않을지, 아니면 특정 정책에 대한 지지 여부를 내가 게이이기 때문이라고 단순히 치부하고 무시하진 않을지, 스스로 체념하고 도둑이 제 발을 저린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국민의힘이 아닌 민주당에 가면 좀 나았을까?

 

 

 

 

# 사생활의 값어치

 

 

당당하게 사생활을 파는 것이 곧 능력이 될 수 있는 보좌진이라는 직무 특성상, 수많은 인연을 통해 먹고 사는 일에서 혈연, 지연, 학연, 군(軍)연 등 각자가 살아온 사생활이 지닌 값어치는 공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경력 따위로 넘어설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소수자(여성, 장애인, 이주민 등) 국회의원이 존재하지만, 그들이 고용하는 보좌진 중에서는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소수자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 우리가 정말로 마주한 진실일지도 모르겠다(물론 그 여성마저도 높은 직급으로 올라갈수록 찾기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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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어느 날, 의원실에서 바라본 국회 풍경>

 

 

김 모 의원을 통해 전 국민에게 알려진 빨간 어플을 통해 국회에서 근무하는 열댓 명에 가까운 MSM(게이, 바이 혹은 남자랑 섹스하는 자칭 이성애자)들을 만나보았지만, 추후에라도 본인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고 보좌진 업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치적인 성공(당선)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언젠가 그 많고 많은 사적 모임 중에 LGBTQ+ 성소수자 모임 하나 정도를 기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일까. 혹여나 지금도 있는데 아직 제가 모르고 있는 거라면, 아니면 나중에라도 생겼는데 이 글을 보시게 됐다면 꼭 연락을 주시면 좋겠다. 유명 디자이너 황재근 씨의 어록처럼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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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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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오전 11:14

17년째 차별금지법 하나를 통과시키지 못한 국회는 '그들만의 성역'이라 생각했고, 글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더 확고해졌어요. 다만 그곳에도 퀴어들이 존재하며, 입술을 깨무는 다짐들로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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