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간 |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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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27일 오후 7시, 삼각지 서울시 공익활동공간 모이다홀에서 가족구성권연구소,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언니네트워크, 전남대 인문학연구원 HK+ 가족커뮤니티사업단 공동주최로 "다양한 몸/관계의 돌봄 드러내기 : 퀴어남성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연구 중간발표가 개최되었다. 3명의 발제자와 3명의 지정토론자가 함께 한 이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장내를 채웠고, 해당 연구에 활용된 10명의 퀴어남성 인터뷰 중에는 친구사이 회원들이 다수 참가하였다. 사진은 발제에 사용된 표제 슬라이드 및 지정토론 당시의 모습이다.
(사진 : 가족구성권연구소)
관객으로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우선 이런 연구 기획해주시고 진행해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질의응답 과정에서, 인터뷰이 구성 열 명 중 여덟이 연구자의 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회 맡으신 분이 섭외의 어려움을 말씀하셨는데요. 이 연구의 인터뷰 구성 자체가 '남성 퀴어 돌봄'을 말하기엔 지나치게 친구사이라는 특정 커뮤니티 중심으로 작동한 것은 아닌지요. 게다가 연구자로서 어떤 시도를 통해 표본을 넓히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애초에 표본을 다양하게 두기 위한 기준이 무엇이었나요? 퀴어 섭외가 어려워서 특정 커뮤니티 중심의 섭외가 어려웠단 말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지만, 그 어려움을 느끼셨다면 그 속에서 어떤 시도가 있었나요? 혹 편하게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요? 커뮤니티 내에서 공지 돌리는 방식이었나요? 왜 발표 때 섭외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나요? 질적 연구에서는 연구자와 참여자와의 관계 또한 무척 중요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이런 비판에 '그것은 해당 연구의 한계입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 또한 연구자로서 적절한 태도인지 의문입니다. 기획 때부터 예견된 한계 같은데요, 연구 과정에서 그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넘어서기 위한 시도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연구의 한계는 과정에서 인지하고 그것을 부수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게 되는 것이지, 애초에 한계가 예상되는 기획의 반복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전 이 댓글에서 조금 두서없이 크게 두 가지의 한계를 말했는데요, 그것들은 연구를 비롯한 각종 재현의 현장에서 늘 '한계'라고 반복 언급됩니다. '한계'가 가상으로 고정된 느낌이에요. 이 한계가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해당 기획이 워낙 중요하다 생각하는 마음에 비판적인 의견이지만 애정을 담아 댓글 남겨봅니다.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는지 수정이 안 되네요,
혹 전달에 오해가 생길까 하여 몇 가지 더 첨언해봅니다. 그리고 발표가 워낙 순식간에 지나가 제가 오해했거나 아예 잘못 들은 내용도 있을까 걱정도 됩니다. 저 또한 댓글로 간단명료하게 써보려고 하다보니 비교적 거칠고 직관적인 단어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위 댓글에서 문제 삼아보려고 언급한 접근방식은 연구를 떠나서 각종 재현 현장에서 자주 목격됩니다. 발표자 분 중 한 분이, 퀴어남성과 커뮤니티는 분리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한 '커뮤니티'란 무엇인가요. 곳곳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여러 크고작은 공동체인가요, 아니면 종태원과 같은 특정 지역이나 대표 단체인가요? 만약 후자라면, 돌봄이란 이슈 앞에서 오히려 특정 지역과 단체 바깥의 이야기 또한 듣기 위한 시도(혹은 노력)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치 모든 남성 퀴어가 특정 커뮤니티를 경유한다는 식의 이야기나 혹은 특정 커뮤니티 바깥의 삶은 존재하지 않고 소속원이 남성 퀴어의 전부인 양 이야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분량에 비해 짧은 시간이었기에 전달이 잘못되었을 수 있겠습니다. 위의 질문은 종종 '선긋기'처럼 단순하게 전달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특정 커뮤니티 중심의 일반화나 커뮤니티 바깥 삶의 생략(의 반복), 이를 '한계'로 고정시키고 목도하는 태도 등이 담론의 확장에 도움을 주지 않는 상황에 대한 비판입니다. 오히려 커뮤니티 바깥의 삶도 돌봄 연구 대상에 포함시켜달란 요청입니다. 특히 이 연구가 '돌봄'에 관한 것이라면 일반화-생략-목도 등은 돌봄과 거리가 멀어보입니다. 해당 연구가 더 원활히 마무리되길 기원하며, 내년 상반기 출간 시 꼭 구매해서 읽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소식지팀장 터울입니다. 포럼 현장에서 발제자·토론자의 관계로나마 잠시나마 말씀 나누어 반가웠습니다.
'커뮤니티 기반 인권운동단체'를 표방하는 친구사이에서는 보통 커뮤니티란 까다로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여타의 사회 개념처럼 현재 존재하는, 그래서 재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특정 부분이 과대표되는 사실로서의 커뮤니티와,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당위로서의 커뮤니티 양쪽 모두의 레벨이 있다는 식으로요. 단체 외부뿐 아니라 단체 내부에서도 이미 커뮤니티를 그처럼 확장적인 개념으로 정초하고 있고, 따라서 특정 장소나 단체를 임시적인 거점으로 취급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의 커뮤니티의 개념은 늘 미완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특정 장소나 단체 바깥의 커뮤니티에 대한 접근과 재현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글쓴이의 말씀은 마땅히 옳습니다.
https://chingusai.net/xe/index.php?mid=newsletter&document_srl=461025&category=589629
다만 게이 남성만이 퀴어인 것은 아니지만 게이 남성 또한 퀴어인 것처럼, 게이업소와 게이인권운동단체로 표상된 거점만이 커뮤니티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 또한 커뮤니티라 부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제한된 범주로서 커뮤니티의 성격을 드러낼 때, 그 안에서 존재하는 돌봄과 쾌락 실천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 외에, 거기에 깔린 차이와 배제의 역학을 함께 드러내는 것이 연구의 중요한 방향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가령 친구사이 설립 초창기에는 단체가 정의하는 커뮤니티에 게이인권운동단체만 포함되고 게이업소는 제외되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선긋기"로 구획된 단체와 업소의 커뮤니티 역시 단일하지 않고 다양한 위계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연구 과정에서 저를 포함한 연구진들이 항상 염두에 두려 했던 지점입니다.
커뮤니티의 "한계"를 사유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커뮤니티 바깥의 삶"에 접근해 파고들어가는 방법에 중요한 역할과 미덕이 있겠지만, 저희 연구팀이 취한 접근법은 기존의 단체와 업소가 제공한 모종의 돌봄과 더불어, 그것조차 때로는 얼마나 제한적이거나 선별적인 역할에 그치는지를 함께 조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친구사이와 여타의 인권단체를 통한 인터뷰이 섭외였지만, 병력·계급·외모 자원·연령 등으로 인한 배제를 통해 단체와 업소의 인프라가 자신의 삶에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인터뷰이를 연구 과정에서 반드시 섭외하려 했고, 실제로 그와 관련된 내용이 연구에 활용된 것이 그 예입니다. 말씀해주신 "기획 때부터 예견된 한계"를 저희 연구팀은 그런 식으로 극복해보고자 했습니다.
포럼 현장에서의 제한된 발제 시간 덕에, 이에 대한 내용을 좀더 충실히 소개하지 못한 점 송구스럽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라도 추가로 관련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데에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더불어 써주신 댓글을 읽고, 위에 언급된 대로 커뮤니티의 개념을 좀더 명확히 정의하고, 지적해주신 커뮤니티의 한계에 대한 내용을 지금 수정중인 글에 더 분명하게 반영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논문 심사서에 준하는 중요한 질정을 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다른 현장에서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
[172호][활동스케치 #4] SeMA 옴니버스 《나는 우리를 사랑하고 싶다》 관람기 (1) : ‘친구사이’를 보는 친구사이, ‘지보이스’를 보는 지보이스
2024-11-04 19:08
기간 : 10월
관객으로 참여했던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질의응답 과정에서, 인터뷰이 구성 열 명 중 여덟이 연구자의 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사회 맡으신 분이 섭외의 어려움을 말씀하셨는데요. 이 연구의 인터뷰 구성 자체가 '남성 퀴어 돌봄'을 말하기엔 지나치게 친구사이라는 특정 커뮤니티 중심으로 작동한 것은 아닌지요. 게다가 연구자로서 어떤 시도를 통해 표본을 넓히려 했는지 궁금합니다. 애초에 표본을 다양하게 두기 위한 기준이 무엇이었나요? 퀴어 섭외가 어려워서 특정 커뮤니티 중심의 섭외가 어려웠단 말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지만, 그 어려움을 느끼셨다면 그 속에서 어떤 시도가 있었나요? 혹 편하게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요? 커뮤니티 내에서 공지 돌리는 방식이었나요? 왜 발표 때 섭외 과정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나요? 질적 연구에서는 연구자와 참여자와의 관계 또한 무척 중요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이런 비판에 '그것은 해당 연구의 한계입니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 또한 연구자로서 적절한 태도인지 의문입니다. 기획 때부터 예견된 한계 같은데요, 연구 과정에서 그 한계를 충분히 고려하여 넘어서기 위한 시도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연구의 한계는 과정에서 인지하고 그것을 부수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게 되는 것이지, 애초에 한계가 예상되는 기획의 반복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전 이 댓글에서 조금 두서없이 크게 두 가지의 한계를 말했는데요, 그것들은 연구를 비롯한 각종 재현의 현장에서 늘 '한계'라고 반복 언급됩니다. '한계'가 가상으로 고정된 느낌이에요. 이 한계가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것이라고 조금도 생각지 않습니다.
해당 기획이 워낙 중요하다 생각하는 마음에 비판적인 의견이지만 애정을 담아 댓글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