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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호][커버스토리 'HIV/AIDS' #1] 20년의 PL 커밍아웃 : 러브포원 대표 광서님 인터뷰 (1)
2018-11-30 오후 18: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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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11월 

[커버스토리 'HIV/AIDS' #1]

20년의 PL 커밍아웃

: 러브포원 대표 광서님 인터뷰 (1)

 

 

 

1990년대 초 종로의 게이업소
1994년의 교통사고와 HIV 감염 확진
1998년의 PL 커밍아웃 : <시사저널> 및 KBS 2TV <영상기록 병원24시>
1990년대 말엽 언론과 사회의 HIV/AIDS 이슈에 대한 태도
1998-99년 감염인 쉼터 생활
1999년과 2002년, 두 번의 태국 HIV/AIDS 유관기관 방문
게이커뮤니티의 HIV/AIDS 혐오
2014년, HIV 감염 20주년 파티
1999년 9월 러브포원 창립
2000년대 초반의 러브포원 회원모임

2004-2007·2009년, 감염인 인권회복을 위한 음악회
HIV 감염인과 비감염인 '사이'라는 화두
2005년, <HIV 감염인 및 AIDS 환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공동연구
러브포원의 전화상담
HIV/AIDS 운동에 있어 정부와 자본이라는 화두
감염인 진료 거부 사례와 운동 단체의 투쟁
수동연세요양병원 사건
2017년, <건강하게 생활하는 TIP> 책자 발간
20년의 PL 커밍아웃, 달라진 것과 그대로인 것
게이커뮤니티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

 

 

 

 

터울 :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자기 소개를 간단히 해주시죠.

 

광서 : 음...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미분류의, (웃음) 게이이고, HIV 바이러스가 몸 속에 있는, 그리고 러브포원에서 활동하고 있는 광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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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게이 전용 "까페&단란주점 YOU"의 광고. "매일밤 11:30-12:00 봉고 대기"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1998년 8월 1일 심야영업 제한이 해제되기 전까지, 이렇게 자정 이후 문을 닫아놓고 영업하는 업소가 많았다.
(『친구사이 소식지』 7, 1994.12., 8쪽.)

 

 

 

1990년대 초 종로의 게이업소

 

 

터울 : 흔히 술번개 나가면 꼭 물어보는 거 있잖아요. (웃음) 게이인 걸 언제 알게 되셨어요?

 

광서 : 1991-92년 쯤인 것 같고, 사실 그 전에도 학교 다닐 때 친구들 보면 되게 약간, 그 당시에 흔히 '건드린다'는 말을 많이 하죠. 친구들끼리 막 장난치면서. 그렇게 하던 친구가 있었고, 그게 싫지는 않았던 거죠, 그 당시에도.

 

터울 : 많은 게이들이 그런 경험을 하죠.

 

광서 : 싫지 않으면서도, 왠지 걔하고 뭔가 긴밀한 관계가 된 것 같고, 알고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웃음) 그러다가 92년쯤 서울에 와서 떠돌다가, 어떤 분을 만나게 됐고, 그 분 때문에 이쪽 문화를 알게 된 거죠.

 

터울 : 그 때 종로에 나오셨던 거죠? 처음 가신 게이업소는 어디였나요?

 

광서 :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 '유토피아'나 그런 쪽, 지하에 있던 가라오케였던 것 같고, 그 때는 12시 지나면 문을 닫고,

 

터울 : 그렇죠, 그 땐 심야영업 금지가 있었죠.

 

광서 :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게, 나는 그 때 당시에 업소를 처음 와봤으니까 거기의 모든 남자들이 신기했는데, 나보고 "식성이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어본 거예요. 나는 뭣도 모르고, "아 저 뭐든지 잘 먹어요"라고, (일동 폭소) 그래서 다들 빵 터져가지고 그 때, 나중에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선 되게 뻘쭘하더라고요.

 

터울 : 형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웃음)

 

광서 : 순수하던 때가 있었죠. (웃음)

 

터울 : 그렇게 종로를 나오시게 되고, 다른 업소들도 혹시 기억나세요?

 

광서 : 그 때 업소를 미친 듯이 다녔던 것 같아요, 1994년부터. 내가 92년 쯤에 알게 돼서, 그 때 친구사이도 가보고 그랬었어요.

 

터울 : 진짜 초창기 때네요.

 

광서 : 네, 친구사이가 그 때 신촌쪽인가 홍대쪽인가에 있을 때, 그 때도 한번 갔었고, 그리고 너무 그 때 웃겼던 게, 친구사이에 그 때 활동하던 언니들? 형들? 그 분들이 초짜 나왔다고, '너 뭐 하지 마라, 뭐 하지 마라' 그러는 거예요. 뭔지 알죠? (웃음) 극장 가지 말아라, 사우나 가지 말아라, 그랬는데 막상 거기 가보면 거기서 그 사람들 다 만나고, (웃음)

 

터울 : 네, 전설같이 떠도는 얘기들이죠.

 

광서 : 그 때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약간 좀 못하게 하고, 거기 가면 약간 떨어지게 보는?

 

터울 : 네, 그 때만 해도 운동이 처음 만들어질 때니까요.

 

광서 :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일 다니고, 그 때 내가 일하던 곳에 약간 높은 사람이 이쪽이어서, 주말마다 게이업소에 끌려다니고, 그러면서 전국의 게이업소를 그 사람하고 다니고 그랬죠.

 

 

 

1994년의 교통사고와 HIV 감염 확진

 

 

터울 : 1994년에 HIV 감염 확진을 받으셨는데요.

 

광서 : 1994년에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해 있던 중에 HIV 감염 사실을 알게 되고, 알고 나서 그 때 보건소에서 나한테 해준 얘기가 하나밖에 없었거든요. 자기 사무실 전화번호를 적어주면서, 요만한 메모장에 적어주면서, 절대로 죽을 때까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네가 감염인인 걸 얘기하면 안되고, 살고 싶으면 내 말만 잘 따라라-라고 얘기를 하는데, 그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가 나한테 되게 소중했던 거예요. 그리고 감염되면 죽는다고 하는데 죽지를 않으니까, 퇴원하고 나서 저녁 7-8시쯤 되면 그 때부터 게이업소에 가서 새벽에 문닫을 때까지 술 마시고, 그 다음날 또 그렇게 마시고 마시고, 계속 그런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그 때는 그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주변에선 내 감염 사실에 대해 모르니까, 돈없고 술먹고 싶을 때 나한테 연락하면 다 사준다, 그렇게 소문이 났었죠.

 

터울 : 그럼 확진 이전에 HIV/AIDS에 대해 정보를 접하신 적은 있으신가요?

 

광서 : 일단 이전에는 개인적으로 HIV/AIDS에 대해 전혀 몰랐고, 기억에 남는 건 그 포스터였어요. 해골 그려져 있고 '에이즈 걸리면 죽는다', 그걸 봤던 기억이 나요. 그 이전에는 나랑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거고, 그 때 홍보도 어떻게 했냐면 "동성연애하거나, 외국인과 성관계하면 감염된다"라는 식으로 했었기 때문에. 나는 또 그 때까지만 해도 '동성애'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를 잘 몰랐었어요. '동성연애'하고 '동성애'하고 헷갈렸던 거죠, 그 때는.

 

터울 : 그럼 확진 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광서 : 확진 후에는, 일단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병원에 너무 오랫동안 있었으니까.

 

터울 : 아, 그 때 병원에 오랫동안 계셨던 거군요.

 

광서 : 교통사고 나서 한 8개월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터울 : HIV 이전에 굉장히 큰 사고를 당하셨던 거네요.

 

광서 : 큰 사고였고, 거기에 또 HIV까지 있으니까 더 고립되게 되고. 내가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게, 사서함으로 무슨 점 보듯이 HIV/AIDS 정보를 듣는 게 있었는데, 그 사서함의 사람들은 대부분 감염을 걱정해서 상담을 하는 건데, 나는 사실 이미 감염인이 된 거잖아요. 그 다음에 내가 듣고 싶은 정보는 거기에 없는 거예요.

 

터울 : 그렇죠, 감염 후에 어떻게 살아야 되고,

 

광서 :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병원도 어떻게 다녀야 하는지, 아무 것도 없고, 나는 뭔가 기계가 아니라 사람 목소리를 통해 이런 정보를 얻고 싶은데, 심지어 보건소에서도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안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94년도에 감염이 되고 나서 98년에 HIV/AIDS에 대한 정보를 처음 들을 수 있었어요.

 

터울 : 아 그러면 그 4년동안 관련 정보를 아무 것도 모르셨던 거군요.

 

광서 : 아무 것도 몰랐죠. 그 누구도 얘기를 안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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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DS 환자 얼굴 공개하는 다큐", <조선일보> 1998.11.25.

 

 

 

 

1998년의 PL 커밍아웃 : <시사저널> 및 KBS 2TV <영상기록 병원24시>

 

 

터울 : 1998년의 <시사저널> 기사를 보긴 했는데요. 그 기사 뿐만 아니라 2005년 <매일신문> 기사에서도 되게 선정적으로 형의 사연을 그려놨더라고요. 그 4년동안 엄청나게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다는 내용을 매우 선정적으로 묘사해놔서 그걸 굳이 이 자리에서 반복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HIV에 대한 정보를 몰랐던 그 4년의 시절을 떠올리시면 지금 어떤 느낌이 드세요?

 

광서 : 그냥 느낌보다는 색깔로 치면 블랙이었던 것 같아요. 블랙이었고, 사람이 HIV/AIDS 뿐만 아니라 어떤 다른 질병에 감염되게 되면, 그 질병에 대해 좀 알아야 뭔가를 할 수 있는데, 알 수 있는 방법도 하나도 없었고, 그냥 보건소에서도 되게 협박처럼, 연락이 안되니까 '연락 안되면 격리수용 시키겠다'는 그런 연락만 오고. 그러니까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내가.

 

터울 : 그 때 생활이 불안정했다고 하셨는데, 그러면 HIV/AIDS 관련 투약은 그 때 혹시 하셨었나요?

 

광서 : 약을 아예 안먹었어요. 전혀 병원에 가보지 못했죠.

 

터울 : 그러셨군요. 그러시다가 1998년 12월 2일 KBS 2TV <영상기록 병원24시>에 나오시게 되고, 1998년 11월 12일 <시사저널> 기사를 통해 인터뷰도 하시게 됐던 건데, 그러면서 본인의 얼굴과 실명 공개를 감행하셨던 거잖아요. 사실 현재의 기준에도 PL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이 잘 없고, 큰 용기를 내셨던 건데, 어떤 경위로 그런 용기를 내시게 됐는지,

 

광서 : 일단 나는 그 당시에 자살을 계획하고 있었어요, 죽으려고.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고, 내가 방황하던 시기를 어느 정도 지나고 정신을 약간 차리고 보니까, 내가 사회생활을 전혀 할 수 없을 만큼 망가진 거예요. 월세였던 것이 하숙집으로 갔다가 고시원으로 갔다가 그것도 없어지고,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더라도, 그 때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던 상태니까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터울 : 주민등록이 말소된 상태였어요?

 

광서 : 네, 거주지가 없다보니까 말소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거고, 뭔가 이렇게 하려고 했다가도 부딪쳐서 포기하고 포기하고 하다보니까. 보건소에다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그 쪽에서는 요즘 흔히 말하는,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도 신청을 안해주는 거였어요. 그러면서 나보고 계속 격리수용시키겠다는 말만 하고.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물론 내가 주의하지 않고 내가 몰라서 HIV에 감염됐지만,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HIV를 천형(天刑)이라고 했거든요.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해서.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감염이 됐어도, 이건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상황이 너무 가혹하고, 그 때 내가 유일하게 믿었던 곳은 보건소였거든요. 그 쪽에서 나한테 하는 모습들을 봤을 때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내가 죽음을 생각하고 가방에 농약을 한 병 넣어갖고 다녔어요, 그 때 항상. 물론 죽지는 못했죠. 그런데 그걸 딱 넣어갖고 다니는 순간부터 뭔가 약간 뿌듯하고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뭔가 있다는 게 의지가 되면서, 그 이후로 내가 언론에 다 연락을 해가지고,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인터뷰에 응할 테니까 실명으로 얼굴 다 드러내고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세요, 그렇게 얘기했었죠.

 

터울 : 그 농약을 지고 다녔던 게 오히려 힘이 되셨다는 거군요. 말하자면 죽을 용기로 언론의 인터뷰에 임하셨던,

 

광서 : 그러니까 지금 내가 그 상황에서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런데 없는 살림에 돈을 모아서 농약을 사갖고 가방에 넣고 다니니까, 그게 힘이 되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에이즈 감염자 박광서씨(26·서울)가 자살 유혹과 사회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심에서 비로소 ‘해방된’ 날은 10월19일이었다. 그날 그는 에이즈 감염자들에게 천형처럼 따라다니는 ‘감염 사실 노출 공포증’을 스스로 벗어 던지는 길을 택했다. 양심 선언과 사회와 보건 당국을 향한 절규라는 두 가지 카드를 들고 <시사저널> 편집국을 찾아온 박씨는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내쫓길 곳도 없는 삶을 유지하고 싶지 않다. 감염자의 밥과 잠자리와 인권, 무방비 상태에 놓인 일반인들의 감염 방지를 위해 ‘에이즈 감염자 박광서’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해 줄 것을 요청한다.”

 

- "[심층취재] 짐질방 동성애 실태를 고발한다", <시사저널> 1998.11.12.

 

 

 

 

1990년대 말엽 언론과 사회의 HIV/AIDS 이슈에 대한 태도

 

 

터울 : 그런데 그 해당 연도의 기사를 보면 현재의 기준으로 봤을 때 굉장히 문제적인 논조로 작성되었더라고요. 이를테면 찜방에서 에이즈에 감염돼서 사람이 망가졌다는 식으로 굉장히 선정적으로 묘사돼 있고, 그래서 지금 이 인터뷰도 그 때의 일들에 대해 선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요. 어쨌든 인터뷰이가 언론 기사에 대한 편집권이나 논조에 대해 일반적으로 개입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래서 그런 논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해당 언론사에 있는 것일 텐데, 그 때 당시에 언론사들이 HIV를 취재하는 태도에 대해서 당사자로서 어떤 느낌이 드셨고, 지금 돌이켜보면 어떤 소회가 드시는지 궁금하네요.

 

광서 : 일단 그 때는 HIV와 AIDS에 대한 단어조차 정립이 안되었던 때였고, 그냥 '동성애=에이즈', 이런 식으로 무조건 자극적으로 때리는 게 기본이었던 시대였던 것 같고요. 그리고 사실 나도 그 때는 그냥 그게 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 때는 약간 출발하는 마음이 잘못되었던 것 같긴 한데, '나같은 사람이 안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인터뷰에 임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어쨌든 남성동성애자가 HIV 취약집단인데, '취약집단이니까 예방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취약집단이라서 감염됐다'는 식으로밖엔 말할 수 없었던 것 같고.

 

터울 :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외부의 프레임을 그냥 받게 되셨던 거군요.

 

광서 : 그러다보니까 강의를 나가도 사람들이 '어떻게 감염됐어요?'라고 물으면 예전에는 '동성애 때문에 감염됐다'고 얘기했었어요. 그 대답이 나와야지만 사람들이 수긍을 하는 분위기였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성접촉으로 감염됐습니다'라고 얘기하게 됐는데, 아무튼 그 때는 사람들이 그런 자극적인 걸 더 원했던 것 같고, 그런 것들이 지금 봤을 땐 내가 왜 그랬을까-하는 후회가 많이 되죠.

 

터울 : 나름대로 절박하셨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까지 신경을 쓸 정신이 나는 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가능하셨을 것도 같아요.

그럼 HIV/AIDS에 대한 정보는 언론 인터뷰를 계기로 접하게 되셨던 건가요?

 

광서 : 그 때 언론사를 만나면서, HIV/AIDS라는 걸 처음 알게 되고, HIV/AIDS 관련 민간단체를 처음 알게 되면서 병원도 이 사람들이 처음 데려가줬고,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거였죠. 민간단체에 비치된 책을 읽으면서 정보를 알게 되고.

 

터울 : 그럼 그 때부터 투약을 하시게 된 거군요.

 

광서 : 투약은 되게 늦게 했어요. 나하고 어떤 애 하나가 더 있는데, 진짜 종로 바다에서 약 안 먹기로 유명한 년이었어요. (웃음) 그러니까 일단은 몸이 괜찮으니까, 내가 약을 왜 먹어야 되는지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내가 이후에 HIV/AIDS 관련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약 먹으라고 하고 병원에 데리고는 가면서 정작 나는 안 먹는다고 주치의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어요. 그래서 쭉 안 먹다가, 어느 날 면역수치가 58인가로 뚝 떨어진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대상포진이 막 오고,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 먹게 되더라고요.

 

터울 : 그 시점이 언제였을까요.

 

광서 : 한 2002-3년?

 

터울 : 당장에 딱히 몸에 이상이 없으니까,

 

광서 : 네, 안 먹게 되고, 그 때는 내가 이걸 왜 먹어야 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난 멀쩡한데.

 

터울 : 그렇죠, 뭔가 현재에 정식화된 정보대로, 본인의 건강을 위해 약을 먹으라는 식이 아니라, 격리수용 협박처럼 사람을 괴롭히는 과정 속에서 의료기관의 서비스를 받으셔야 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약 투여가 긍정적인 의미로 인식되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 같아요.

 

광서 : 그렇죠.

 

터울 : 그럼 칵테일 요법(HIV 감염이 죽음으로 직결되지 않기 시작한 상징과 같은 약제 투약법-편집자 주)이 적용된 약제를 2002-3년에 처음 투약하시게 된 거군요.

 

광서 : 네. 그리고 칵테일 요법에 적용된 약이 지금과는 달리 초창기에는 너무 독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커밍아웃하고 쉼터에 있을 때, 어떤 분들 보면 약 먹을 시간에 약 먹으러 방에 들어가면 약냄새 때문에 역겨워서 토하고, 약이 되게 독했고 먹기 힘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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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V/AIDS를 위한 한국범종교연합 편, <같은 하늘 아래에서>, KINHA, 2014.
(「감염인 쉼터에 마음 더하기 - 전국 HIV/AIDS 감염인 쉼터 인터뷰」, 『친구사이 소식지』 54, 2014.12.)

 

 

 

 

1998-99년 감염인 쉼터 생활

 

 

터울 : 그럼 PL 커밍아웃 이후에 쉼터에서 생활하셨던 건가요?

 

광서 : 나는 쉼터도 힘들게 들어갔어요. 커밍아웃하고 나서 내 상황이 어땠냐면, 다 말아먹고 나서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저녁만 되면 오늘은 어디 가서 자야 되나-라는 고민이 있는 거고, 가장 먹고 싶었던 게 컵라면 말고 끓인 라면에 밥 말아먹는 게 너무 먹고 싶었거든요.

 

그 와중에 내가 방송하면서 알게 된 한 쉼터에 들어간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쉼터에서는 도망쳐 나왔어요. 그 쉼터의 관계자 중 한분이 비감염인이었는데, 내가 <현장기록 병원24시> 방송 나오고 나서 그쪽으로 후원물품이나 후원금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 프로그램의 특징이 그렇대요. 그걸 다 그 때 있었던 쉼터에서 받았는데, 물론 거기서 같이 생활하는 감염인도 여러 명 있으니 같이 쓰는 건 문제가 안되는데, 나를 너무 식모 취급하는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면 청소, 밥, 빨래, 한겨울에 막 산의 무덤 지나서 담배 심부름까지 혼자 다 해야 되는 거예요. 다른 애들도 있는데 안 시키고 나만 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싫은 티를 내면, 집도 절도 없는 오갈 데도 없는 놈 데려왔더니 뭐라고 한다고 욕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서 도망나왔어요.

 

그리고 그 쉼터에 있을 때 방송을 보고 어떤 분이 연락을 했었는데, 사기꾼이었어요. 증류수 가지고 암이나 당뇨가 치료된 바 있는데, 그걸로 에이즈를 고칠 수 있다고 증류수를 매일 갖다주는 분이 있었어요. 거길 나오고 나니까 갈 데도 없고 하니 이 사람과 연락이 닿았는데, 이 사람이 방을 며칠간 구해주면서 나한테 일본에 가지 않겠냐고 제안한 거예요. 그래서 얼떨결에 일본을 갔는데, 히로시마 현에서 차로 한 두 시간 더 들어가는, 구다마츠라는 곳이었는데, 거기서 비자 때문에 계속 왔다갔다 한 거죠. 그런데 하다보니까 또 날 소개해준 사람도 나를 빌미로 맡겨두고 돈을 계속 뜯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도 도망쳐 나오고. 그렇게 하다가 한국에 와가지고는 대한에이즈예방협회에서 쉼터를 만들 때였어서 거기에 들어가겠다고 얘기를 한 거죠.

 

그래서 99년에 그 쉼터에 내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한번 커밍아웃을 했기 때문에 쉼터가 노출될까봐 우려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각서를 썼어요. 앞으로는 이런 활동할 때 얼굴 사진을 모자이크 처리할 것이며, 커밍아웃은 자제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쉼터에 들어가게 된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협회에서도 내가 PL 커밍아웃을 했다는 게 사업하는 데 있어서 일정한 장점이 되기도 했던 거예요. 나와 연계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감염인이랑 같이 일합니다', 그런 걸 내세울 수 있는 기회잖아요. 그런데 내가 쉼터에 들어가는 건 그쪽에서 망설였던 거예요. 노출 문제도 있고 하니까. 이제 그렇게 해서 들어가서 6개월을 있다가, 다시 혼자 독립해서 그 때부터 죽 혼자 사는 거죠.

 

터울 : 결국 쉼터에 대한 기억이 별로 안좋으시군요.

 

광서 : 네, 별로 좋지가 않아요.

 

터울 : 아까 말씀하시던 중에 HIV/AIDS 관련 대체의학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검색하던 중에 저도 본 내용이었어요. 'HIV/AIDS가 아예 없다'는 식의 음모론이 2000년대 초반에도 있었고, 지금도 친구사이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가끔씩 올라와요. '에이즈는 없다'는 식의 글이. (웃음)

 

광서 : 네, 엄청 싸웠어요.

 

터울 : 그 때 얘기를 잠깐 해주시면 어떨까요.

 

광서 : 그 때 내가 민간단체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떤 사람이 계속 '에이즈는 없다'는 글을 올리는 거예요. 그 사람과 통화도 몇번 했었어요. 하도 말이 안 통하니까, 내가 나중에는 '정 HIV 바이러스가 없다고 생각되면 내가 내 피 뽑아줄 테니까 당신이 한번 혈관에 주입해보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걔가 처음에는 좋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말을 바꿔서 '나는 피는 필요없으니 거기서 바이러스만 빼갖고 나한테 달라'고 하는 거예요.

 

터울 : 무슨 베니스의 상인도 아니고, (웃음)

 

광서 : 그러니까요. (웃음) 그래서 그 친구랑 엄청 많이 싸웠었어요.

 

터울 : 이게 사실은 어떤 변형된 형태의 HIV/AIDS 혐오잖아요. 에이즈란 병이 없다는 식으로 현실을 호도하는.

 

광서 : 많은 감염인들이 거기에 혹 하기도 해요. 그래서 거기에서 아무 치료도 안하고 있다가 건강이 많이 안좋아져서 죽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리고 지금은 그런 친구들이 드문데, 민간요법하는 친구들이 되게 많았어요. 물론 마음은 이해가 돼요. 뭔가 지푸라기도 잡고 싶은 마음에, 미꾸라지 중탕, 호박 중탕, 심지어는 자기 오줌 받아먹는 것까지. 한 친구는 모임만 하면 아침저녁으로 자기 오줌을 받아먹었어요.

 

터울 : 요료법(尿療法)이라고 하죠. (웃음)

 

광서 : 그러면 냄새가 나잖아요. 그걸 또 권해요. (웃음) 그런 일도 있었어요.

 

터울 : 혹시 쉼터에 있으셨을 시절 만난 다른 동료 감염인들 중에 기억나는 분들이 있으세요?

 

광서 : 한 분은 여자분이었는데, 그 분은 남편 때문에 감염된 경우였어요.

 

터울 : 여성 감염인의 경우는 거의 그렇더라고요.

 

광서 : 그런데 남편이 중환자실에 있고, 아내도 자신의 감염 사실 때문에 힘든 와중에 남편 뒷바라지를 다 한 거예요. 그게 이 시댁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나봐요. 자기 아들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까. 그래서 그 당시 살던 집을 이 여자분 이름으로 전세를 돌려준 거예요. 그런데 이 남편이 딱 사망을 하고 나니, 바로 얼굴 바꾸고 이 아파트 뺏으려고 햇던 적이 있었어요. 그게 어떻게 보면... 그 당시에 나는 충격이 컸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안해하고 그러던 사람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뀔까-그런 게 있었고.

 

또 다른 남성 감염인은, 감염사실을 동네에서 알게 된 거예요. 서울 어디에서 가게를 크게 하셨던 분인데, 동네에서 이사가라고 전기 끊고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나중에 부인을 통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결국은 이사를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경우는 보통 게이들이 가족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부모님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은 때가 많은데, 이 형 같은 경우는 내가 봐도 성질이 좀 유별났어요. 되게 깐깐한 스타일인데, 어느 날 걸어가다가 갑자기 주저앉으면서 감염 사실을 알게 됐거든요, 병이 진행돼서. 그래서 쉼터에 있다가 건강이 많이 안좋아져서 집에 엄마 보고 싶다고 연락을 했는데, 가족들이 안 오는 거예요, 아무리 연락을 해도. 여동생만 왔다 가고. 임종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할 수밖에 없어서 입원을 했는데, 그 때도 몇 번 연락했는데 안 오는 거예요, 부모님들이. 그래서 우리는 이 분이 워낙에 성격도 좀 그러니까 못된 짓을 했나보다, 가족과의 관계가 틀어질 만큼 틀어졌나보다 싶었는데, 나중에 사망하고 나서도 안 오는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여동생과 통화했는데, 여동생을 통해서 부모님이 시신포기각서를 팩스로 보낸 거예요. 우리는 이거 신경 안 쓸테니까 너네가 알아서 하라고.

 

그걸 보면서,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내가 쉼터에 몇 개월 있으면서 한달에 한 열댓번은 장례식장에 간 것 같아요. 돌아가시는 분들이 워낙 많았고, 그 때는. 그게 그 당시에 큰 충격이 됐어요. 가족들에게도 버림받는구나, 죽어서까지도.

 

터울 : 듣다보니 이야기들이 너무 가슴아프네요.

 

광서 : 내용들이 옛날 것들이 다 세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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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오픈한 ‘러브포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HIV 감염인 사이트다. 한국에이즈예방협회나 에이즈퇴치연맹 등 민간단체가 운영하는 에이즈 관련 사이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HIV 감염인이 주체가 돼 감염인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은 처음이다. ‘러브포원’ 운영자 박광서씨가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국제에이즈회의에 참석한 것이 사이트 개설의 계기가 되었다.

 

“남아공의 11살짜리 감염인 소년이 개막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타이도 17살 청소년이 감염인 대표로 왔고요. 우리와 달리 그들은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박씨는 귀국하자마자 사이트 개설을 서둘렀다. 다행히 주변의 도움을 받아 10월에 ‘러브포원’을 개설했고 변변한 홍보 한번 한 적 없지만 문을 연 지 석달 만에 방문 횟수가 5만3천건을 넘겼다. ‘러브포원’은 이메일을 통한 상담뿐 아니라 감염인들이 언제든 들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채팅창을 열어놓고 있다. 채팅창에는 매일 밤마다 항상 10여명 이상이 북적인다. 강원도에 사는 감염인 김정현(35·가명)씨는 “러브포원에 들어와 마음을 털어놓는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된다”고 말한다. 러브포원은 앞으로 소식지 발간, 사무실 개설 등도 추진할 계획이다.

 

- 신윤동욱, "차별 딛고 세상 속으로!", <한겨레21> 2001.2.27.

 

 

 

 

1999년과 2002년, 두 번의 태국 HIV/AIDS 유관기관 방문

 

 

터울 : 90년대 말-00년대 초 태국에 HIV/AIDS 기관 방문을 두 번 다녀오시기도 했는데요.

 

광서 : 네, 1999년과 2002년 두 번 다녀왔어요.

 

터울 : 그 때 감염인 관련 기관과 단체를 보셨을 텐데, 어떠셨어요?

 

광서 : 처음 갔을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1999년에는 대한에이즈예방협회랑 서울시 관계자랑 같이 갔었는데, 거기서 말기 요양소에 가게 된 거예요. 롭부리(ลพบุรี, Lopburi)에 있는 말기 요양소에 갔는데, 거기는 진짜 말기 요양소다보니까 이 사람을 케어해갖고 퇴원시키겠다-가 아니라, 이 사람을 여기서 편안하게 잘 보내겠다는 게 되게 큰 기관이었고, 하루에 5-6명씩 매일 죽어나가고. 그 때 시신을 화장시킬 수 있는 시설이 5-6개 있었는데, 어떤 날은 하루종일 돌려도 화장을 다 못한다고 얘기를 들었었거든요. 그리고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미라로 해둔 것도 있고, 화장한 시신을 쌓아서 전시도 해놨고,

 

터울 : 그걸 왜 그렇게 해놓은 거예요?

 

광서 : 그러니까 가족들도 안 찾아가고,

 

터울 : 그 나라도?

 

광서 : 네, 거기에 오는 사람들에게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거예요. 거기에 실제로 에이즈 교육도 듣고 시설을 보러 사람들이 많이들 왔었어요. 그래서 그런 걸 보고 나서 오히려 되게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나요.

 

터울 : 그러니까 그 때 당시 칵테일 요법이 본격적으로 나온 게 98년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의료 현장에 적용되는 데엔 시차가 있으니까...

 

광서 : 그리고 두 번째 간 건 2002년인데, <시사저널>하고 같이 태국에 HIV/AIDS 관련 기관을 방문하자고 해서, 연락이 와서 같이 갔었어요. 그 때는 거길 안 가고, Mercy 센터라고 있는데, 거기는 고아들이 있는 곳이었어요. 그 때 갔을 때는 거기에 자원봉사자도 많이 있고, 아이들과 프로그램하는 것도 많이 보고 그래서, 뭐랄까 이전과는 다른 느낌? 이 운동에 같이 하려는 사람들이 좀 생기는 기분이었어요. 물론 애들을 보면 안쓰럽긴 한데, 거기에 자원봉사자들도 많이 와서 일하는 걸 보면서 좀 힘을 얻었죠.

 

그런데 가서 또 불미스런 일이 생겼었죠. 98년에 커밍아웃하고 나서 내가 얼굴 공개에 대해 되게 조심을 많이 했거든요. 워낙에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런데 2002년 태국 방문 관련해서 <시사저널>에서 기사가 나갈 때 또 한번 내 사진을 내게 된 거예요, 나는 안 내는 걸로 얘기했는데.

 

터울 : 아, 본인 동의 없이,

 

광서 : 네, 그래서 나중에 재판으로까지 가고 그래서 서로간에 마무리가 됐고,

 

터울 : 그 때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애초에 <시사저널> 측에서 연결해줘서 태국에 가셨던 건데, 사진이 무단으로 나가게 됐던 상황이었던 거군요.

 

광서 : 네, 그 때 관련 일 하는 여자분하고, 기자랑 셋이서 갔었어요.

 

터울 : 안그래도 되게 의아했었어요. 왜냐하면 98년의 <시사저널> 기사가 지금도 검색이 되는데, 제가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악의적인 논조로 작성된 기사였고, 그러다가 어쨌든 <시사저널>측과 같이 태국에 가셨다는 게. 그런데 결국은 또 결과가 안좋았던 거군요. 그 때 이후론 해당 언론사 측과 별로 인연이 없게 되셨던 거였고,

 

광서 : 네.

 

 

 

 

게이커뮤니티 내에는 앞서 말했듯 실제로 감염인이 적지 않음은 물론, 게이커뮤니티가 가지는 HIV/AIDS에 대한 공포 또한 이성애자들의 그것보다 높은 편에 속합니다. 더불어 이렇게 질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기에, HIV/AIDS 문제를 내 지인, 내 커뮤니티의 일로 인지하지 않고, 나와 얽힌 일로는 아예 생각하기조차 싫어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자연히 감염인들 스스로가 게이커뮤니티에서 자신의 감염사실을 드러내는 것을 극히 꺼려하게 됩니다. 감염인 커뮤니티가 1990년대 초반부터 생긴 이유도, 사실은 그들이 동성애자 커뮤니티와 잘 섞일 수 없었던 까닭이 있었을 것입니다.
  
- 「담론팀 기획토론 #2 : 동성애인권운동과 HIV/AIDS」, 『친구사이 소식지』 57, 2015.3.

 

 

 

 

게이커뮤니티의 HIV/AIDS 혐오

 

 

터울 : 제가 태국 이야기를 여쭤본 건, 많은 게이들이 태국을 되게 좋아하기도 하고, 형도 태국을 되게 좋아하시니까,

 

광서 : 마음의 고향이죠.

 

터울 : 네, 그 고향이 되셨던 계기가 궁금해요.

 

광서 : 고향이 됐던 계기는, 내가 커밍아웃하고 나서 사실 한국 내에서 내 게이라이프는 완전히 죽었거든요. 심지어 어느 술집에 가서 거기 스탭들하고 먼저 친해질 때, 나 여기 와도 되냐고 물은 다음에 술을 먹고 그랬거든요. 그러다보니까, 편하지가 않은 거예요, 어딜 가도. 내가 A란 술집에 가서 술을 먹고 오면 그 다음 날 무슨 얘기 나올까 걱정하게 되고. 심지어는 바에서 일하는 어떤 친구한테 술 따라줬다가 내가 엄청 욕먹었거든요.

 

터울 : 왜요?

 

광서 : 어떻게 술을 따라줄 수 있냐고, 감염시키려고 술잔을 돌리냐면서. (일동 한숨) 그래서 그런 것들이 너무 싫고,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안좋게 알려져갖고 생활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너무 싫었는데. 태국을 가게 됐는데 그 때만 해도 많이들 안갔거든요, 지금처럼. 너무 자유로운 거예요.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니까. 그러다보니까 자주 찾게 되고.

 

터울 :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되었던 게, PL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 지금 기준으로도 열 손가락 안에 꼽잖아요. 그런데도 초창기에 커밍아웃을 하셨고,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제가 볼 때 과하게, 감당이 안될 정도로 받으셨던 것 같고, 그러다보니까 아까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한국의 게이커뮤니티, 종로에서 생활하는 게 거의 어려웠다고 말씀해주셨는데,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청해듣고 싶어요. PL 커밍아웃을 한 다음에 어떤 고초를 겪으셨는지에 대해서,

 

광서 : 일단은 친구들이 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게, 게이들 중에서 PL인 사람은 나랑 같이 있으면 바로 감염인이라는 것이 알려진다고 두려워하고, 비감염인 친구들은 나랑 같이 있으면 감염인이라고 오해 받는다고 해서,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누군가와 같이 있을 수가 없었어요.

 

터울 : 그 때만 해도,

 

광서 : 네. 그러다보니까 철저히 혼자가 됐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혼자이지만, (웃음) 그 때만 해도 처음에는 내가 안가면 되지-라는 생각에 한 1년 정도는 종로의 게이커뮤니티랑 담을 쌓고 지냈었는데, 그게 나중에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한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소주 한 잔을 먹더라도 익숙한 공기가 있는 그 곳에 가서 술 한 잔을 먹고 오고 싶은데, 거기에 가기까지가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런 것들이 되게 많았고,

 

예를 들면 A란 술집에 갔어요. 거기 내가 아는 다른 PL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술집에 내가 먹고 간 다음에 어떤 손님이 '쟤 에이즈인데 왜 받았냐' 그래서, 앉은 자리를 락스로 다 닦고 식기를 장갑 끼고 다 버렸다는 얘기를 거기에 있던 다른 PL이 듣고 나한테 얘기를 해주는데, 자기도 그 앞에서 뭔가 얘기하고 싶은데 얘기할 수 없었다고,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터울 : 지금도 사실 이어지는 문제지만, 일반 사회보다 게이커뮤니티 내에서의 PL 혐오가 더 심한 문제를 몸으로 직접 겪으셨던 얘기를 듣고 있는데요.

 

광서 : 지금같은 경우야 사실 여러 단체들도 같이 활동하고 그래서, 뭔가 이런 방어막?-같이 이렇게 보호를 해주고 이런 게 있는데, 그 때는 그 단체들조차도 준비가 안되어있었기 때문에, 그냥 혼자 다 감당했던 것 같아요. 단체에 갔다가도 오히려 상처받아서 오기도 하고.

 

터울 : 종로와 게이커뮤니티에 나오는 이유의 9할이 실은 연애하고 섹스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PL의 연애와 섹스는 참 논쟁되지도 않고, 수행할 때도 굉장한 어려움을 겪는 것 같거든요. PL 커밍아웃 이후 형도 연애와 섹스로부터 많이 소외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광서 : 나한텐 사실 연애가, 아이돌 스타 만나는 일보다 더 어려웠어요. 가령 누군가와 데이트를 하는 자리가 있다고 쳐요. 만나면서 신뢰가 쌓이고 관계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서 내가 스스로 감염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만나고 나면 옆의 사람들이 꼭 얘기를 해요.

 

터울 : 먼저?

 

광서 : 네. 저 사람 누군지 알고 만나냐고. 그러면서 결국은 연락 오는 게, '미안하다, 형은 되게 좋은데 아직은 자기가 준비가 안된 것 같다, 형도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다', 라고 얘기하고 떠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만난 지 15일에서 한달 안에 관계가 다 깨지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러다보니까 연애를 13년 넘게 못한 거죠. 재작년에도 한 친구를 우연히 만났었는데, 그 친구도 다른 사람이 이미 얘기를 해버린 상태였고, 그래서 걔랑도 한 1년 만나면서 거의 그냥 애인 같지 않은 애인으로 1년 동안 만나다 헤어지게 됐고.

 

그러니까 누군가 괜찮은 사람을 봤을 때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 싶고, 까일 때 까이더라도 얘기를 해보잖아요. 그게 안되는 거예요. 얘가 마음에 들면 얘 주변을 맴돌기만 하고.

 

터울 : 그런 걸 많이 겪으시다보면 게이커뮤니티가 되게 싫으셨을 것 같거든요. 제가 만약에 그런 입장이었으면.

 

광서 : 그런데 싫은데도 떠날 수가 없으니까. (웃음) 그래서 이번 생은 글렀어-라고 우스개소리를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나 연애가 아니더라도 그 안에 속해서 어우러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게, 우리 때만 하더라도 초창기 때 문화가 별로 없었어요. 술집, 사우나, 극장, 그게 다였어요. 요즘은 되게 많잖아요. 그런데 그런 모임에 나가질 못해요. 나갔다가도 다 방장 통해가지고 안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 듣고.

 

그런데 이게, 단순하게 HIV/AIDS 문제일까란 생각도 드는 게, 또 어떤 친구들은 잘생기면 다 또 OK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일동 폭소) 웃긴 게 그런 게 있어요. (웃음)

 

터울 : 그렇죠. (웃음) 맞아요.

 

광서 : 너무 웃긴 게, 가끔 상담이 들어오면, HIV 감염에 대한 근거가 없는 거예요. 그냥 몸 좋고 잘생긴 사람들은 PL이 아닐 거라 가정하고, 자기랑 친하고 잘 아는 사람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은 감염인이 아닐 거라 가정해버리고. 어디서 그런 근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어요.

 

터울 : 요샌 또 반대의 근거도 있어요. 잘생기고 몸이 좋으면 PL일 것이다-라는, (일동 웃음) 역방향의 낙인이 생산되고 있죠. (웃음)

 

광서 : 그럼 나는 감염인이 아닌 건가? (웃음)

 

터울 : 저렇게 인기가 많으면 틀림없이 섹스를 많이 했을 것이고 그러면 뭔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웃음)

 

광서 : 그럼 나한텐 왜 아무도 안오는 거죠? 이래도 안 들어오고 저래도 안 들어오고. (웃음)

 

터울 : 게이커뮤니티의 중요한 종족성 중의 하나가 성적 활력인데, 그 섹스 속에서 PL을 포함한 누군가가 계속 집요하게 배제되고, 어떤 섹스의 형태가 끊임없이 배제되는 현상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존재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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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이(남성동성애자)잖아. 나도 속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퀴어문화축제 기간에 하는 거야.” 사실 이날 누구의 파티인지 모르고 갔다. ‘20주년 파티’라고만 들었다. 막상 가보니 그가 있었다. [...] 오래 만나지 못한 사이에 그가 후천성면역결핍증(HIV/AIDS)과 함께 살아온 지(Living with HIV/AIDS) 20년이 되었다.

 

신윤동욱, "HIV와 함께 20년 살아낸 당신, 축하해요", <한겨레21> 2014.6.10.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2014년, HIV 감염 20주년 파티

 

 

광서 : 나는 전에 <Queer As Folk>라는 오래된 미드를 보면서 부러웠던 게, 드라마 속에서 게이들 대상으로 해서 HIV/AIDS 관련해서 파티도 열고 하잖아요. 그게 너무 부러웠거든요. 저런 게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내가 어설프게 따라한 게 있잖아요. 2014년에 한 HIV 감염 20주년 파티. (웃음) 그걸 했던 게 세 가지 의미였어요. 첫째는 게이들의 입지도 안좋지만 그보다 더 안좋은 게 감염인의 입지인데, 그런 상황에서 20년 동안 살아남은 나에 대해서 축복을 받고 싶었고, 또 하나는 그렇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이 있단 말이죠. 그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세번째는, 신규 감염인들에게, 것봐라, 감염돼도 이렇게 안 죽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결국은 많이들 와주셨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터울 : 2014년 언제쯤 있었던 행사였던 건가요?

 

광서 : 6월달. 퀴어문화축제의 이벤트로 진행했었던 행사였어요.

 

터울 : 전혀 몰랐었네요. 그 때만 해도 제가 '아기호모'였어서, (웃음) 아까 말씀하시기로 나를 여태까지 버티게 만들어준 사람이 옆에 있었다고 하셨는데, 꼽아보자면 어떤 사람들이 기억나세요?

 

광서 : 음... 막상 꼽으려니까 어렵네요. 일단 가장 생각이 나는 게, 그 당시에 보건소에 있던 간호사가 있었어요. 이 분도 처음에 나한테 접근한 마인드는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런데 만나고 나서 어떻게 보면 그 당시만 해도 사실 많이 두려울 수 있는데, 만나자마자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갔어요. 그리고 어쨌든 여러 가지 얘기를 많이 해주고 그랬죠. 이분 같은 경우는 교회 집사님이었어요. 여자분이었고. 그런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자기가 왜 간호사가 됐을까, 내가 왜 그 많은 병원 가운데 보건소에 가 있을까, 기도를 했대요. 그 때만 해도 보건소는 HIV/AIDS를 담당하니까, 감염인들을 내가 도우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셔서, 그 보건소의 담당관을 찾아가서 우리 관내에 어려운 감염인이 있으면 연결을 해달라고 해서 만나게 된 거예요. 그런데 어쨌든 만나서 뭐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고, 내가 아르바이트 할 때 친척인 것처럼 해서 보증도 서주고 그랬었거든요.

 

터울 : 정말 큰 도움을 주셨네요.

 

광서 : 그런데 안좋았던 건 그거죠. 성경말씀 공부해야 되는 거. (일동 웃음) 어쨌든 이분이 그렇게 접근하셨던 건데, 그것 빼고는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분이에요.

 

터울 : HIV/AIDS와 관련해서 일반 사회의 무지, 게이커뮤니티 내의 무지, 그리고 PL 커밍아웃을 하시면서 그에 따른 좋은 점도 있었지만 나쁜 점도 겪으셨고, 그래서 90년대 전체가 형에겐 힘겨운 세월이었을 것 같아요.

 

광서 : 그런데 한편으로 나는 커밍아웃하면서 많이 혜택을 받은 것 같아요, 다른 감염인들보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강의도 하고, 사실 내가 그 당시에 뭐가 잘나서 강의를 하고 그러겠어요. 그리고 같이 병원에 가면, 교수님이 먼저 진료를 봐주기도 했어요. 그 때는 지금처럼 전산시스템이 없으니까 먼저 진료 봐주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을 많이 배려해주셨던 것 같아요.

 

터울 : 그렇지만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커밍아웃하신 이후로 사기 피해를 겪기도 하시고, 사회적으로 HIV/AIDS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어떤 의미인지를 체감하셨던 세월이었을 것 같거든요.

 

광서 : 지금도 기억나는 게, 같이 활동하는 성소수자 단체들이 있잖아요. 거기에서 나를 초대해서 갈 때, 그게 당일이 아니고 1박 2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인 경우가 있잖아요. 그러면 강의할 때만 앞에 와서 앉아있고 그 다음부턴 내가 거기서 철저하게 혼자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가 더 크게 아프더라고요. 아예 모르는 사람이 그럴 때보다 더 소외당하는 느낌이 들고. 그런 것 때문에 나도 안 가기도 했지만, (웃음) 서로 안 부르고 그랬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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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포원 홈페이지(2001.9.25)

 

 

 

1999년 9월 러브포원 창립

 

 

터울 : 1999년 9월에 러브포원을 창립하셨는데요. 1998년에 언론을 통해 PL 커밍아웃을 하시고 난 다음에 1999년 상반기에 PL 자조모임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하시게 됐던 셈인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광서 : 일단 가장 컸던 건 방송 나가고 나니까, 이게 죽는 병이 아니라는 걸 그 때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내가 겪었던 그 시간이 너무 힘들고 길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조금 단축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되게 컸었어요. 나 같은 경우 너무 긴 시간 동안 방황했었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아무 것도 없게 되었던 거잖아요. 그 때만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좀 많았고. 그래서 그냥 우리끼리 모여서, 다른 거 안하고 모여서 밥을 먹더라도 큰 힘이 되고 그랬던 시절이었거든요.

 

러브포원을 처음에 만들 당시에는 '스타포유'라는 사이트가 있어서, 그 안에서 무슨 까페를 만들 수 있었어요, 다음까페처럼. 거기다가 감염인들의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당시에 5명 정도가 들어왔던 것 같아요.

 

터울 : 그럼 PC통신 동호회가 아니라 인터넷 사이트였던 거군요.

 

광서 : 네, 거기에 그렇게 만들어뒀다가, 2001년 7월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열린 제13회 국제에이즈회의를 갔다왔어요. 될 거라고 생각을 안하고 러브포원 이름으로 써서 신청을 했는데 덜커덕 스칼라십이 된 거예요. 그리고 초대장이 우편 티켓으로 날아오고, 그 때만 하더라도 e-티켓이 없어서 우편으로 직접 보내줬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국제회의에 갔는데, 사실 내가 그 동안에 커밍아웃하고 나서 만났던 감염인들이 다 쉼터에 있는 분들이다보니까, 색깔이 진짜 블랙 아니면 짙은 그레이밖에, 흑백 TV 보는 것 같았거든요, 우리나라 감염인들은. 그런데 외국 국제회의에 가서 만난 감염인들이 너무 컬러풀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왜 저렇게 밝지가 않고 어두울 수밖에 없을까란 생각이 들어서, 우리 감염인끼리라도 좀 다채롭게 모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귀국 후에, 그 때는 커밍아웃하기 전에 나를 도와주던, 보건소에 계시는 다른 업무 보시던 간호사분하고 다른 감염인들하고, 러브포원을 도메인을 따로 내서 닷컴 사이트로 키워보자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다들 반대하는 거예요. 왜 너는 우리 아우팅 시키려고, 노출시키려고 하느냐, 우리끼리 조용하게 까페에 있으면 좋은데, 왜 굳이 외부로 노출하려고 하느냐고 반대를 했어요. 그래도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닷컴으로 시작을 하게 됐는데, 나는 항상 일을 할 때 내가 컴퓨터를 잘 모르니까, 주변의 친구들에게 항상 커밍아웃을 하고 일을 부탁해요. (웃음) 그래서 그 때도 알던 동생에게 얘기를 해가지고 페이지를 하나 만들고 그렇게 시작했던 거죠. 그 때 당시만 하더라도 HIV 감염인 자조모임 '사이트'를 만든 경우는 유일했어요. 그래서 감염인들이 검색해서 많이 찾아왔죠.

 

터울 : 러브포원 인터넷 사이트가 생기고 나서부터, 어쨌든 인프라가 생겼기 때문에 감염인들이 그에 따른 혜택을 받았던 경우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광서 : 나는 사실 지금도 감염인 커뮤니티의 기능 중에 중요한 것이, 감염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주는 게 필요하다고 봐요. 그런데 초창기 때는 나 혼자 거기서 정보를 주고 그랬었거든요. 지금은 러브포원 안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글 남기고 그러잖아요. 회원들이 서로가 정보를 주고 있어요. 서로가 위안을 주고 있고, 그게 약간의 풀뿌리처럼 돼서 그런 것들이 난 되게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우리 입장에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러브포원 홈페이지에 와서 뭘 보고 갔는지 모르잖아요. 가끔 어디 상담받거나 한 얘기가 들릴 때, 러브포원 홈페이지에서 많은 정보를 보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얘기가 들려올 때가 있거든요.

 

터울 : 네, 정보전달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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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포원 홈페이지(2002.1.22)

 

 

 

2000년대 초반의 러브포원 회원모임

 

 

터울 : 그럼 그밖에 러브포원에서 회원모임이나, 정기모임 같은 건 혹시 열렸었나요?

 

광서 : 사실 예전에는 정모도 매달 하고, 1년에 두번씩 워크샵 가서 감염내과 교수님 초청해서 특강도 듣고 여러 가지 많이 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니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그런 행사를 안하는데, 정모를 하면 많을 때 40-50명도 모이고 그랬었어요.

 

터울 : 그 때가 언제쯤이었나요? 정모를 했던 때가,

 

광서 : 2000년대 초반까지 했던 것 같아요. 2004-5년까지는 했던 것 같은데, 그 때 모이면 사람들이 좋으니까 토요일에 모이면 일요일까지 안 헤어지는 거예요. 보통 1차, 2차, 3차 가면 사람이 줄어야 되잖아요. 안 줄어들어요. 그러다가 한번 얘기 나왔던 게, 사람이 많다보니까 하룻밤에 지출되는 금액이 너무 큰 거예요. 돈이 일이백이 막 나가니까, 정산해서 올리면 간혹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해요. 그 때만 해도 돈 없어서 치료 못받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 돈으로 치료받게 도와주는 게 낫지 하루 모여서 놀고 먹고 쓰는 게 뭐냐, 이런 지적도 나오고.

 

그리고 술이 있다보니까 둘이 눈맞았다가 헤어지기도 하고, 뒷얘기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안했었어요. 그리고 요새는 끼리끼리 많이 만나기도 하고, 지금은 모임도 많고 해서 그런 모임을 만드는 데 나까지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터울 : 일단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죠.

 

광서 : 그래서 그냥 지금은 알아서들 만나는 식으로 하고, 온라인 위주로 모임을 운영을 하고 있고, 현재 가장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활동은 상담이랑 정보제공이에요.

 

터울 : 그래도 정모를 하시면서 러브포원 안에서 만났던 감염인들이 있으셨을 텐데요. 기억나시는 분들이 있으실까요?

 

광서 : 음... 기억은 많이 나는데, 어떤 얘기를 해야 될까요? 좋은 얘기? (웃음)

 

터울 : 네, 좋은 얘기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광서 : ...아, 그런 분이 계셨어요. 사실 여성 감염인이 모임에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도 우리 모임에 몇 명 계셨는데, 그 분이 결혼을 하셨어요. 모임에서 만나서, 아이도 태어나서 잘 지내고 있고.

 

터울 : 감염인끼리 만나신 건가요?

 

광서 : 네.

 

터울 : 너무 좋은 일이네요, 진짜.

 

광서 : 사실 여성 감염인이 감염인 커뮤니티 안에서도 잘 안 드러나고 있고, 또 워낙에 게이들이 많다보니까, 모이면 이성애자 감염인들이 적응 못하고 안나오시거든요. (웃음) 끼 떠는 걸 감당할 수가 없는 거죠.

 

터울 : 너무 알죠. (웃음)

 

광서 : 그것도 한두명도 아니고 떼거리로 그래봐요. (웃음) 그래서 이성애자들이 약간 본의 아니게 소수가 돼서, 안해봤던 경험도 하게 되고.

 

터울 : 그래서 더 기억에 남으시는 군요. 그럼 게이들 중에서는 러브포원 안에서 기억에 남는 감염인이 있을까요?

 

광서 : 게이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케이스는... 한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도 나 닮아서 진짜 약 안 먹기로 유명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이 친구는 그동안에 여러 기사들을 많이 본 거예요. 병원에서 차별당하는 것, 그런 기사들을 보다 보니까, 자기가 병원에서 그런 대우를 받으면서 치료를 받으려는 용기가 안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병원에 안 갔었어요, 계속. 그러다 결국은 본인의 몸이 약간 안좋아지고 나서 잘 다니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터울 : 그래도 러브포원에서 얻었던 정보를 늦게나마 수용하신 거네요.

 

광서 : 그렇죠. 그리고 러브포원에서 어플 같은 것도 만들었는데, 관련 정보를 담아 제작한 영상도 많이 본다고 하더라고요. 별로 좋은 케이스랄 만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그런데 딱히, HIV/AIDS 이슈의 특성상 좋은 얘기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터울 : 참... 네, 아름답게 정리가 잘 안되네요. (웃음)

 

광서 : 맞아요. HIV/AIDS는 아름답게 정리를 할 수가 없어. (웃음)

 

 

 

FullSizeRender.jpg

▲ LOVE4ONE 어플.

 

 

 

(계속)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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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경 2018-12-08 오후 14:21

솔직한 이야기가 인상이 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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